로마서 2012년 로마서 1강(1:1-17) 복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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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1 강
말씀 | 로마서 1:1-17
요절 | 로마서 1:16
복음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수많은 사람들과 교회와 단체를 변화시켰습니다.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로마서를 깊이 공부하고 주석을 펴냄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죤 웨슬레, 칼 바르트 등이 로마서를 통해서 변화되고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은 분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변화를 기대하면서 로마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하고 복음의 기원과 능력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종이란 노예로서 말하는 당나귀, 재산 취급을 당했습니다. 당시 종은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종이 된 것을 주저 없이 표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기는 대상이 있습니다. 자유인이지만 어디엔가 매여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과 쾌락 또는 명예, 인기 등에 매여 살아갑니다. 바울도 본래는 율법과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대적자요 훼방자인 자신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택정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일생 그를 섬기고 충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고자 작정했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임금들을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목숨을 바치고자 결단했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 패배하던 군인들이 승리하여 전하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왕의 탄생 소식도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절 말씀대로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복음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신성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이 멈추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은혜를 감당하는 길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돕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죄의 뿌리는 불신과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고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의 죄가 얼마나 뿌리가 깊든지 복음은 이를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죄를 극복하고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죄를 이기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이가 먹으면 사람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믿지만 변화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변화에 근거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 진리의 말씀을 믿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육신까지도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삶에 적응해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하나님으로 믿게 되면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정한 구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회복은 믿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순종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할 때 당하는 어려움과 그 축복을 알 때 다른 사람에게도 순종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고 순종을 가르칠 때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란 사람들은 순종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복음을 알고 순종하도록 돕는 과정이 제자 양성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배웁니다. 또한 순종은 훈련을 통해서 배웁니다. 죄의 본성을 이기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신앙은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지속될 때 그것이 인격화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에베소의 책임자로 세우고 각 도시에 지도자들을 세워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아시아 전역을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당시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 까지 가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의 선교 열정은 일생 동안 꺼지지 않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그는 로마 성도들을 만나 복음을 나누고 믿음 안에서 피차 안위함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길이 막혔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로마에 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둘째,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14절을 볼 때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면 빚을 갚기 전까지 마음이 불편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에게 빚을 졌습니다. 특히 예수님께 빚을 졌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아가서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미 믿는 로마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원한다는 말은 그냥 복음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내 안에서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나누기를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애경에 있을 때는 2080 치약으로, KTF에서는 SHOW로 마케팅의 귀재라는 명성을 얻게 된 조서환 부사장이 있습니다. 그는 육군소위로 임관해 장군으로 사는 걸 인생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훈련 중 수류탄 폭발 사고를 당해서 오른쪽 팔을 잃었습니다. 그가 수술대에서 깨어났지만 사귀고 있던 애인을 어떻게 만날지는 걱정이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 오른손이 없는 채로 ‘머리며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미라 같은 모습’을 보여주려니 덜컥 겁이 났던 것입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 지금의 아내는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뻤지만, 그는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이제 그만 이 천사 같은 사람을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당신,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얼굴 봤으면 이걸로 정리하고 끝내자.” 그러자 그 여자는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한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터는 당신 곁에 내가 있어야 해요.” 그녀는 병원 근처에 방을 잡고 이사를 와서 그를 간호했습니다. 그가 완쾌되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장인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오른 팔이 없는 남편과 어떻게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딸의 팔을 잡고 끌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딸이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엄마가 어떻게 해주시기를 바라세요?”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할 말을 잃고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조서환 씨는 이런 아내를 보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일생 아내의 행복을 목표로 살겠다.” 그는 하는 일에 성공해서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KTF 부사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빚을 갚겠다는 그의 마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요 착한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16개국에서 온 167명의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루비 켄드릭의 묘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생명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Ruby Kendric) 그녀는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로 1907년 9월 텍사스 주 엡윗 청년회의 후원을 얻어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왔습니다. 그녀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뜨거운 사명감으로 사역하다가 맹장염으로 26세의 나이에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미국 연합 대회에서 그녀의 선교편지를 읽고 참석자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다음 날 그녀가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놀라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여 한국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루비 캐드릭과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이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바친 희생 위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축복과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같은 죄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 자신을 믿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16,17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것임이라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내가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바울은 나이도 늙고 그 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60이 넘은 나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습니다. 태풍과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고 로마에 도착해서 셋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섬길 때 공동체가 성숙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빚진 자의 심정이 충만해서, 예수님으로 충만해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복음의 능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당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무시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바라봅니다. 예전처럼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이를 볼 때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초대 교회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헬라어로 뒤나미스로서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을 가진 힘을 말합니다. 다이나마이트로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내는 것처럼 복음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의 태산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홍대 믿음의 조상들인 폴최 선교사님은 방탕과 정욕으로, 이페트라 선교사님은 허무와 미움의 죄로 고통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홍대 학생 역사의 주춧돌과 같이 귀하게 쓰임 받았고 지금은 각각 미국과 짐바브웨의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미국과 아프리카 양들의 죄와 싸우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을 보면 복음의 능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한분 한분도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기적이고 죄악된 이 시대에 제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죄를 보면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에 이르도록 구원자를 보내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입니다. 의는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길이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완성하신 의입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 인간의 수양과 인간의 공로와 선행을 통해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와 철학들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이 너무 부패하여 하나님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지는 의, 이것을 겸손히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인격적인 믿음, 믿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신자의 삶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종일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초신자의 믿음의 단계에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합니다. 이런 믿음의 성장이 있기 까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도우십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의 믿음에서 사람의 믿음으로’이르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언약을 세우고 언약을 지키시며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도우십니다. 17b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우리 성경의 번역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요 다른 해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살리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요 또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산다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즉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 생명력이 충만한 삶, 부활의 능력을 덧입은 삶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참된 삶을 누리고,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나 사람들을 보고 믿음에 회의를 품거나 울고불고 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의 경험을 믿고 한계에 부딪치면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때로는 분위기나 환경을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경험이나 분위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대로 내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험도 믿음으로, 용서도 믿음으로, 전도도 믿음으로, 찬양도 믿음으로, 성경공부도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제자 양성도 믿음으로, 결혼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할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 때 거룩한 삶, 능력있는 삶, 승리하는 삶, 패자부활의 삶, 역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 | 로마서 1:1-17
요절 | 로마서 1:16
복음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수많은 사람들과 교회와 단체를 변화시켰습니다.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로마서를 깊이 공부하고 주석을 펴냄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죤 웨슬레, 칼 바르트 등이 로마서를 통해서 변화되고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은 분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변화를 기대하면서 로마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하고 복음의 기원과 능력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종이란 노예로서 말하는 당나귀, 재산 취급을 당했습니다. 당시 종은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종이 된 것을 주저 없이 표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기는 대상이 있습니다. 자유인이지만 어디엔가 매여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과 쾌락 또는 명예, 인기 등에 매여 살아갑니다. 바울도 본래는 율법과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대적자요 훼방자인 자신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택정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일생 그를 섬기고 충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고자 작정했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임금들을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목숨을 바치고자 결단했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 패배하던 군인들이 승리하여 전하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왕의 탄생 소식도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절 말씀대로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복음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신성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이 멈추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은혜를 감당하는 길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돕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죄의 뿌리는 불신과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고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의 죄가 얼마나 뿌리가 깊든지 복음은 이를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죄를 극복하고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죄를 이기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이가 먹으면 사람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믿지만 변화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변화에 근거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 진리의 말씀을 믿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육신까지도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삶에 적응해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하나님으로 믿게 되면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정한 구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회복은 믿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순종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할 때 당하는 어려움과 그 축복을 알 때 다른 사람에게도 순종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고 순종을 가르칠 때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란 사람들은 순종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복음을 알고 순종하도록 돕는 과정이 제자 양성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배웁니다. 또한 순종은 훈련을 통해서 배웁니다. 죄의 본성을 이기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신앙은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지속될 때 그것이 인격화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에베소의 책임자로 세우고 각 도시에 지도자들을 세워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아시아 전역을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당시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 까지 가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의 선교 열정은 일생 동안 꺼지지 않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그는 로마 성도들을 만나 복음을 나누고 믿음 안에서 피차 안위함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길이 막혔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로마에 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둘째,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14절을 볼 때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면 빚을 갚기 전까지 마음이 불편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에게 빚을 졌습니다. 특히 예수님께 빚을 졌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아가서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미 믿는 로마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원한다는 말은 그냥 복음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내 안에서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나누기를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애경에 있을 때는 2080 치약으로, KTF에서는 SHOW로 마케팅의 귀재라는 명성을 얻게 된 조서환 부사장이 있습니다. 그는 육군소위로 임관해 장군으로 사는 걸 인생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훈련 중 수류탄 폭발 사고를 당해서 오른쪽 팔을 잃었습니다. 그가 수술대에서 깨어났지만 사귀고 있던 애인을 어떻게 만날지는 걱정이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 오른손이 없는 채로 ‘머리며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미라 같은 모습’을 보여주려니 덜컥 겁이 났던 것입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 지금의 아내는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뻤지만, 그는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이제 그만 이 천사 같은 사람을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당신,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얼굴 봤으면 이걸로 정리하고 끝내자.” 그러자 그 여자는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한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터는 당신 곁에 내가 있어야 해요.” 그녀는 병원 근처에 방을 잡고 이사를 와서 그를 간호했습니다. 그가 완쾌되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장인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오른 팔이 없는 남편과 어떻게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딸의 팔을 잡고 끌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딸이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엄마가 어떻게 해주시기를 바라세요?”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할 말을 잃고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조서환 씨는 이런 아내를 보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일생 아내의 행복을 목표로 살겠다.” 그는 하는 일에 성공해서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KTF 부사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빚을 갚겠다는 그의 마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요 착한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16개국에서 온 167명의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루비 켄드릭의 묘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생명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Ruby Kendric) 그녀는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로 1907년 9월 텍사스 주 엡윗 청년회의 후원을 얻어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왔습니다. 그녀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뜨거운 사명감으로 사역하다가 맹장염으로 26세의 나이에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미국 연합 대회에서 그녀의 선교편지를 읽고 참석자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다음 날 그녀가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놀라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여 한국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루비 캐드릭과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이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바친 희생 위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축복과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같은 죄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 자신을 믿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16,17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것임이라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내가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바울은 나이도 늙고 그 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60이 넘은 나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습니다. 태풍과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고 로마에 도착해서 셋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섬길 때 공동체가 성숙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빚진 자의 심정이 충만해서, 예수님으로 충만해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복음의 능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당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무시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바라봅니다. 예전처럼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이를 볼 때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초대 교회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헬라어로 뒤나미스로서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을 가진 힘을 말합니다. 다이나마이트로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내는 것처럼 복음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의 태산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홍대 믿음의 조상들인 폴최 선교사님은 방탕과 정욕으로, 이페트라 선교사님은 허무와 미움의 죄로 고통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홍대 학생 역사의 주춧돌과 같이 귀하게 쓰임 받았고 지금은 각각 미국과 짐바브웨의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미국과 아프리카 양들의 죄와 싸우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을 보면 복음의 능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한분 한분도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기적이고 죄악된 이 시대에 제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죄를 보면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에 이르도록 구원자를 보내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입니다. 의는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길이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완성하신 의입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 인간의 수양과 인간의 공로와 선행을 통해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와 철학들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이 너무 부패하여 하나님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지는 의, 이것을 겸손히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인격적인 믿음, 믿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신자의 삶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종일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초신자의 믿음의 단계에서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합니다. 이런 믿음의 성장이 있기 까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도우십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의 믿음에서 사람의 믿음으로’이르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언약을 세우고 언약을 지키시며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도우십니다. 17b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우리 성경의 번역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요 다른 해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살리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요 또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산다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즉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 생명력이 충만한 삶, 부활의 능력을 덧입은 삶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참된 삶을 누리고,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나 사람들을 보고 믿음에 회의를 품거나 울고불고 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의 경험을 믿고 한계에 부딪치면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때로는 분위기나 환경을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경험이나 분위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대로 내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험도 믿음으로, 용서도 믿음으로, 전도도 믿음으로, 찬양도 믿음으로, 성경공부도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제자 양성도 믿음으로, 결혼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할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 때 거룩한 삶, 능력있는 삶, 승리하는 삶, 패자부활의 삶, 역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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