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22강(16:1-20)그가 살아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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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가복음 제 22 강
말씀 | 마가복음 16:1-20
요절 | 마가복음 16:6
그가 살아나셨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두 기둥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복음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 짓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활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의 무덤은 비어 있고 그는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는 천상에서 지금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천상행전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도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체험한 분들도 더 깊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른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다 떠났지만 여인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급히 향품을 준비했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무덤으로 가서 시신에 바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자 했습니다. 가면서 걱정이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참, 진심이 충만한 자매님들이 대책도 없이 갑니다. 그 돌은 빌라도의 인장이 찍힌 채로 군인들이 막고 있었습니다. 또 여자 셋의 힘으로 굴릴 수 없는 심히 큰 돌입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진심이 통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의 걱정을 아시고 친히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체로서 돌을 굴리지 않고 그냥 나올 수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여인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현장을 목격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현장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고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까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필요 없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내일 아침에 무엇을 먹을까, 배만 아파도 혹이 암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이 많습니다. 또 여인들이 향품을 바르는 것 같은 필요 없는 일로 바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믿었다면 이런 일로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이 있으면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여 정말 중요한 일,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짧지도 않지만 길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에서 꼭 해야 할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진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 문에 들어가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청년은 천사입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 청년은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는 멸시와 거절, 무시와 비천함을 상징합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구속주로 소망했으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임 당한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눅 24:20,21). 여인들은 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는 심정은 슬프고 원통했을 것입니다. 악의 권세, 죽음의 권세 앞에 짓밟히고 꺾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여인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과 원통함을 줍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활신앙이 없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만 찾습니다.
우리는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분임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나서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빈 무덤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무덤이 있습니다. 또 그 무덤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 놓고 기념합니다. 김일성, 김정일, 레닌, 스탈린, 파라오 등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고 그 시체를 영구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훈 통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가 살아났다’는 선언은 놀라운 역전, 반전이요 예수님의 최종 승리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시고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기독교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섬깁니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놀라운 승리의 소식, 구원의 소식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육체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긴 승리자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생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로 온 것입니다(창 2:17, 3:19).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실 뿐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망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다 도망갔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악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으로 인해 제자들은 원통해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살아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사망 권세에 잡히면 삶에 의욕과 희망을 잃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쾌락주의(15:32)를 추구하게 됩니다. 청년들이 꿈을 잃고 술과 정욕에 빠집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합니다(히브리서 2:15). 독한 욕심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 돌아보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또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 더 두려운 것은 죽은 후의 심판입니다(히브리서 9:27). 심판은 둘째 죽음이며 영원한 형벌입니다(계 20:4).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서 구원하십니다(히 2:14).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몸이 다시 삽니다. 그 몸은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신비한 부활의 몸입니다(고전 15:42-44).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됩니다(계 20:6).
부활 소망이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우리 삶에 희망을 줍니다(행 2:26). 세상 모든 소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하지만 부활 소망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부활 소망은 죽음이 쏘는 죄의 독화살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고전 15:55). 슬픔, 두려움, 원통, 허무, 어두움을 이기게 합니다. 주님 섬기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살아 계셔서 믿음을 주시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도우십니다.
아프리카 보츠와나 그루터기 선교회 소속 김해영 선교사는 자비량 선교사로 그곳에서 재봉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현지에서 재원조달이 가능해지자 초기의 개척선교사들이 건강악화로 지쳐갔습니다. 여러 이유로 사역자들은 다른 사역지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기술학교에서 일하던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지친 기술학교의 선임은 1994년 4월에 교사와 재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본인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남게 됐습니다. 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고 언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내고 났는데 아이들이 그를 찾아와 선생이 돼 달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음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하늘, 전기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은 적막하고 쓸쓸했습니다. 기숙사에서 촛불 빛이 새어나옵니다. 선생도 다 떠난 학교에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래 바닥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도 없어요. 모두 다 떠나고 혼자 남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와 있어요.” 기도는 침묵이 되고 마침내 눈물이 됐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와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려 하니. 너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이와 같이 주님은 지금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종들을 위로하시고 그들과 함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4:28).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14:71). 그들은 무덤에 면회 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시 만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과 잘못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의 처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곳입니다.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가 가득한 곳입니다. 제자들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를 회복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참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는 여자들이 임무 완수에 실패했다고 기록합니다. 어쩌면 마가는 실패 이야기에 솔직했는지 모릅니다. 마가 자신이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선교 사역을 함께 하다가 사역에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전한 부활 후 제자들의 모습은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 일시적이지만 무서움과 실패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부활의 역사적 진정성을 나타냅니다. 여자들이나 제자들, 누구도 부활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이야기 하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가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도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만큼 부활 신앙 가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만 때로 복음 전하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지만 실패도 합니다. 부활신앙은 승리를 항상 가져다주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만병통치약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불신과 연약함과 죄악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회개하고 영적으로 자라고 강해져야 합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우리를 줄기차게 도우시고 더 큰 일에 도전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나타나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증인들의 증거를 듣고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약 그가 나타나야 한다면 승천하시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이 없고 완악한 제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이들에게 놀라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고 시돈과 두로 이상 멀리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온 세상 만민에게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위해 죽으셨고, 만민에게 구원을 주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만민을 위한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좁은 마음을 넓혀 세계를 품어야 합니다. 로마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보다 선진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식민지 나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에 순종했습니다. 선교 역사를 보면 대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복음이 문화와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우리 모임도 후진국이던 197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지금 서울대에서 가장 열매가 많은 분은 서울대 출신 목자가 아니라 지방대 출신 목자님이십니다. 복음은 학력을 뛰어넘어 믿음과 심정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전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힘과 권세가 아닌, 겸손과 사랑으로 영혼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우리 인생이 추구할 절대적인 목표와 사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방향이 없다면 방황하거나 사명 없이 세상일에 파묻혀 사라질 것입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기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신 대 사명을 감당할 때 연약한 사람이 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로 성장합니다.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사명인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복음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가 개인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합니다. 구원과 심판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복음에 대한 반응에 있다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믿고 세례 받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시급합니까?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힘써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게 됩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됩니다. 믿음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선포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할 때 악한 영이 쫓겨나고, 하늘에 속한 새 방언을 말하며, 악에게 해 받지 않고 병자를 낫게 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사 죽음 권세를 파하셨기 때문에 이런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 부활의 한 증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 방언은 다른 민족의 언어였습니다. 또 기도 방언으로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만 아는 방언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언어가 바뀝니다. 불평, 원망하던 말이 감사하고 축복하는 말로 바뀝니다. 말에 독기가 사라지고 생명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최고의 새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게 복음을 잘 설명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역을 계승하신 후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이 자리는 영광과 능력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지만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순종해 나가 두루 복음을 전파할 때 함께 일하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습니다. 여기서 표적은 말씀을 전파하는 곳에 따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일을 할 때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십니다. 표적은 복음의 말씀 전파에 따르는 부차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표적에 관심 갖기보다 복음을 믿고 전파할 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친히 능력을 행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땅에서 순종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를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초청하는 양들 가운데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있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6:1-20
요절 | 마가복음 16:6
그가 살아나셨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두 기둥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복음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 짓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활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의 무덤은 비어 있고 그는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는 천상에서 지금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천상행전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도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체험한 분들도 더 깊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른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다 떠났지만 여인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급히 향품을 준비했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무덤으로 가서 시신에 바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자 했습니다. 가면서 걱정이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참, 진심이 충만한 자매님들이 대책도 없이 갑니다. 그 돌은 빌라도의 인장이 찍힌 채로 군인들이 막고 있었습니다. 또 여자 셋의 힘으로 굴릴 수 없는 심히 큰 돌입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진심이 통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의 걱정을 아시고 친히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체로서 돌을 굴리지 않고 그냥 나올 수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여인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현장을 목격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현장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고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까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필요 없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내일 아침에 무엇을 먹을까, 배만 아파도 혹이 암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이 많습니다. 또 여인들이 향품을 바르는 것 같은 필요 없는 일로 바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믿었다면 이런 일로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이 있으면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여 정말 중요한 일,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짧지도 않지만 길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에서 꼭 해야 할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진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 문에 들어가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청년은 천사입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 청년은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는 멸시와 거절, 무시와 비천함을 상징합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구속주로 소망했으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임 당한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눅 24:20,21). 여인들은 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는 심정은 슬프고 원통했을 것입니다. 악의 권세, 죽음의 권세 앞에 짓밟히고 꺾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여인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과 원통함을 줍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활신앙이 없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만 찾습니다.
우리는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분임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나서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빈 무덤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무덤이 있습니다. 또 그 무덤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 놓고 기념합니다. 김일성, 김정일, 레닌, 스탈린, 파라오 등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고 그 시체를 영구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훈 통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가 살아났다’는 선언은 놀라운 역전, 반전이요 예수님의 최종 승리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시고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기독교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섬깁니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놀라운 승리의 소식, 구원의 소식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육체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긴 승리자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생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로 온 것입니다(창 2:17, 3:19).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실 뿐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망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다 도망갔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악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으로 인해 제자들은 원통해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살아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사망 권세에 잡히면 삶에 의욕과 희망을 잃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쾌락주의(15:32)를 추구하게 됩니다. 청년들이 꿈을 잃고 술과 정욕에 빠집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합니다(히브리서 2:15). 독한 욕심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 돌아보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또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 더 두려운 것은 죽은 후의 심판입니다(히브리서 9:27). 심판은 둘째 죽음이며 영원한 형벌입니다(계 20:4).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서 구원하십니다(히 2:14).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몸이 다시 삽니다. 그 몸은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신비한 부활의 몸입니다(고전 15:42-44).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됩니다(계 20:6).
부활 소망이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우리 삶에 희망을 줍니다(행 2:26). 세상 모든 소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하지만 부활 소망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부활 소망은 죽음이 쏘는 죄의 독화살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고전 15:55). 슬픔, 두려움, 원통, 허무, 어두움을 이기게 합니다. 주님 섬기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살아 계셔서 믿음을 주시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도우십니다.
아프리카 보츠와나 그루터기 선교회 소속 김해영 선교사는 자비량 선교사로 그곳에서 재봉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현지에서 재원조달이 가능해지자 초기의 개척선교사들이 건강악화로 지쳐갔습니다. 여러 이유로 사역자들은 다른 사역지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기술학교에서 일하던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지친 기술학교의 선임은 1994년 4월에 교사와 재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본인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남게 됐습니다. 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고 언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내고 났는데 아이들이 그를 찾아와 선생이 돼 달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음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하늘, 전기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은 적막하고 쓸쓸했습니다. 기숙사에서 촛불 빛이 새어나옵니다. 선생도 다 떠난 학교에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래 바닥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도 없어요. 모두 다 떠나고 혼자 남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와 있어요.” 기도는 침묵이 되고 마침내 눈물이 됐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와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려 하니. 너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이와 같이 주님은 지금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종들을 위로하시고 그들과 함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4:28).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14:71). 그들은 무덤에 면회 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시 만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과 잘못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의 처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곳입니다.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가 가득한 곳입니다. 제자들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를 회복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참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는 여자들이 임무 완수에 실패했다고 기록합니다. 어쩌면 마가는 실패 이야기에 솔직했는지 모릅니다. 마가 자신이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선교 사역을 함께 하다가 사역에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전한 부활 후 제자들의 모습은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 일시적이지만 무서움과 실패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부활의 역사적 진정성을 나타냅니다. 여자들이나 제자들, 누구도 부활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이야기 하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가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도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만큼 부활 신앙 가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만 때로 복음 전하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지만 실패도 합니다. 부활신앙은 승리를 항상 가져다주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만병통치약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불신과 연약함과 죄악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회개하고 영적으로 자라고 강해져야 합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우리를 줄기차게 도우시고 더 큰 일에 도전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나타나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증인들의 증거를 듣고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약 그가 나타나야 한다면 승천하시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이 없고 완악한 제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이들에게 놀라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고 시돈과 두로 이상 멀리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온 세상 만민에게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위해 죽으셨고, 만민에게 구원을 주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만민을 위한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좁은 마음을 넓혀 세계를 품어야 합니다. 로마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보다 선진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식민지 나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에 순종했습니다. 선교 역사를 보면 대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복음이 문화와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우리 모임도 후진국이던 197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지금 서울대에서 가장 열매가 많은 분은 서울대 출신 목자가 아니라 지방대 출신 목자님이십니다. 복음은 학력을 뛰어넘어 믿음과 심정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전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힘과 권세가 아닌, 겸손과 사랑으로 영혼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우리 인생이 추구할 절대적인 목표와 사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방향이 없다면 방황하거나 사명 없이 세상일에 파묻혀 사라질 것입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기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신 대 사명을 감당할 때 연약한 사람이 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로 성장합니다.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사명인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복음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가 개인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합니다. 구원과 심판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복음에 대한 반응에 있다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믿고 세례 받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시급합니까?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힘써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게 됩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됩니다. 믿음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선포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할 때 악한 영이 쫓겨나고, 하늘에 속한 새 방언을 말하며, 악에게 해 받지 않고 병자를 낫게 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사 죽음 권세를 파하셨기 때문에 이런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 부활의 한 증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 방언은 다른 민족의 언어였습니다. 또 기도 방언으로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만 아는 방언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언어가 바뀝니다. 불평, 원망하던 말이 감사하고 축복하는 말로 바뀝니다. 말에 독기가 사라지고 생명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최고의 새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게 복음을 잘 설명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역을 계승하신 후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이 자리는 영광과 능력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지만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순종해 나가 두루 복음을 전파할 때 함께 일하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습니다. 여기서 표적은 말씀을 전파하는 곳에 따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일을 할 때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십니다. 표적은 복음의 말씀 전파에 따르는 부차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표적에 관심 갖기보다 복음을 믿고 전파할 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친히 능력을 행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땅에서 순종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를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초청하는 양들 가운데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있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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