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21강(15:1-47)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4회 작성일 12-09-09 13:19

본문

2012년 마가복음 제 21 강                                                        153
말씀 | 마가복음 15:1-47
요절 | 마가복음 15:34

버림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시는 예수님은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는지, 예수님의 절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빌라도가 초라한 몰골의 예수님을 그들 앞에 내세운 후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민족의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예수님을 공격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비겁한 처사입니다. 그들은 지금 빌라도에 대해, 로마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황제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든지, 아니면 빌라도에게 돌을 던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힘과 용기가 없으니까 예수님을 그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 자신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 빌라도에게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절규라고 믿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약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한 유대 겁쟁이들의 비겁한 외침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을 왕따 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더 연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먼저 만만한 친구를 정해서 왕따 시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데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인간의 악함을 예수님이 지고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이 고발하는 내용을 들으시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그를 고발하는지 듣고 있던 빌라도가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빌라도가 재촉할지라도 예수님이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은 고발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 길을 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침묵에 대해서 체념의 침묵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반론해봤자 별 의미를 지닐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항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약자의 침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그런 침묵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의 침묵을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충분히 희망이 있는 상황에서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의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침묵하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려고 힘썼습니다. 이런 태도로 인해서 죄 문제는 해결되기보다 더욱 꼬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버림을 받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전도하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버림받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또 이 세상에는 사실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거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일하시기 때문에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버림을 받은 아이들은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는데 어려움을 당합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서, 또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또는 친구에게 집착해 버립니다. 그것이 안 되면 여러 가지 중독에 걸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돌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은 아이들이 사회의 문제아가 됩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바른 관계가 회복되도록 힘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도 그 기회를 활용하기를 은근히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대제사장들의 충동질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무리들은 바나바에게 혜택 받은 것은 하나도 없고 예수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왜 기를 쓰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을까요?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은혜 망각증 그리고 사리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무리들은 세계 역사를 통해 항상 악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용을 당해왔습니다. 그들을 순진한 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순진함이 아니라 순수함입니다. 순진함은 뭘 몰라서 단순한 것을 말하고 순수함이라는 것은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정당한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의 순진함은 결국 민란을 꾸미고 살인한 자는 살아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빌라도도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 그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처형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에 굴복하고 맙니다.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정의를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악과 타협을 한 것입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지기까지 이렇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무리들의 무지, 맹목적이고 비겁한 민족적 자존심, 빌라도의 직무 유기 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가운데 개입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악인들의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모략과 경륜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해야 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나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그 뜻대로, 그 방식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때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이끌려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모인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습니다. 그들은 희롱을 다 한 후에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폴란드 프란시스파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가 있었습니다. 몇 명의 죄수들이 처형이 결정되었을 때 그 중 한 사람이 자기는 자녀를 가진 기혼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에 “콜베 신부가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가 그 사람대신으로 처벌될 수 없겠느냐고 요구했습니다. 관계 당국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그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으며 그 곳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수양을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창22:13).”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의 경우, 그 마을의 장로들은 먼저 그들 자신의 결백을 선언한 이후에 그 밝혀지지 않은 살인자 대신에 어린 암소를 희생시키기도 했습니다(신21:1-9). 이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 이르셨는데 군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을 조금도 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이 때가 오전 아홉시였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페르시아 시절에 고안해 낸 형벌인데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사람을 눕히고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박아서 세우게 되면 체중에 의해서 몸이 쳐지게 됩니다. 이때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몸을 움직일수록 신경세포가 집중된 손과 발에 고통이 집중적으로 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복음서에 십자가에 대한 기술은 매우 담백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나름대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고백과 회개시를 써넣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던 부분이 바로 이곳이었을 텐데 왜 그들은 그 흔한 찬송시 하나 이곳에 인용하지 않았을까요? 성경 가운데 웅장한 찬송시나 혹은 우리의 가슴을 찢는 비탄과 회개의 기도가 등장해야 하는 곳이 여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을 이토록 간결하게 처리하셨을까요?

  만약 십자가 옆에 어떤 찬송시나 나름대로의 설명이 들어간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그 설명에 의해 갇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매우 깊고 넓습니다. 죤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503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읽을수록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평생 묵상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기술을 이렇게 단순하게, 담백하게 처리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경험과 재주를 다해 십자가를 묘사하려고 했던 각 복음서 기자들의 마음을 억누르셔서 아무런 다른 설명도 기록하지 못하게 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침묵 속에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모욕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며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도 모욕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구원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무능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중심을 지키며 하나님을 믿는 것일 때가 있습니다.

  열두시가 되었을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오후 세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오후 세시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것은 패배자의 자리에서 원수들 앞에서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 것입니다. 자신이 일평생 한 일들이 무의미한 일로 평가될 때 그 분노가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고통에는 고통 자체의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몰라서가 아니라 그 무게 자체 때문에 주저앉게 되고 맙니다. 지난 주에 한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었습니다. 그 녀는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 못하였습니다. 무너질 만한 고통이 오면 누구나 다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에는 고통 자체의 무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 세 시간 동안 깊은 어둠이 임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무시무시한 고독을 뜻합니다. 어둠은 단절을 뜻합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인생들은 타락한 본성대로 우상 숭배자가 되었고, 온갖 음란과 부도덕, 강포가 충만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생들은 하나님의 영영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가정에서 버림받은 자녀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조직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고통도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가장 비참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그야말로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버렸을 때 110만명이 죽고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리방황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인생들은 타락한 본성대로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율법적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지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예수님께서 버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10)” 우리가 죄에 빠질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우리 죄를 위해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사랑을 감사 찬양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아들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다면 또한 성자는 스스로 오신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가 꺼리는 시련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으셨고, 또한 성자는 성부가 베풀기를 원치 않는 구원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형태의 불화가 있었다는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성부가 성자 예수님에게 내키지 않는 희생을 강요했다든지, 성자가 성부로부터 억지로 구원을 빼앗아 낸다는 식의 불화는 없었습니다. 어느 편에서도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의 뜻은 사랑에서 우러난 완전한 자기희생 속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챨스 웨슬레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놀라운 사랑!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나의 하나님, 당신이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니?”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선교사가 되고, 자기희생이라는 고난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자님들이, 선교사님들이 얼마든지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데 그런 사회적 지위와 기회를 버리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는 분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첫 사랑을 회복하여 다시 한 번 이 길을 가고자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시고 우리의 치부를 감당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스스로 자기를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 저도 주님이 가신 길을 기쁨으로 가게 인도하소서.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4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648 로마서 이엘리야 893 12-09
647 로마서 이엘리야 896 12-02
646 로마서 이엘리야 892 11-25
645 특강 이엘리야 866 11-18
644 로마서 이엘리야 899 11-11
643 로마서 이엘리야 906 11-04
642 로마서 이엘리야 903 10-28
641 로마서 이엘리야 1011 10-21
640 로마서 이엘리야 927 10-14
639 로마서 이엘리야 914 10-07
638 로마서 이엘리야 983 09-30
637 로마서 이엘리야 964 09-23
636 마가복음 이엘리야 870 09-16
열람중 마가복음 이엘리야 955 09-09
634 마가복음 이엘리야 954 09-0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