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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20강(14:32-72)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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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4회 작성일 12-09-0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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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가복음 제 20 강                                                       
말씀 | 마가복음 14:32-72
요절 | 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내 원대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소원대로 될 때 마음이 시원합니다. 내 소원대로 될 때 성취감을 느낍니다. 자기 소원대로 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모세, 사도 바울, 예수님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이 더 크고 좋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 소원보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이르셨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막상 자신에게 닥치니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철저하며 무서운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인류의 죄 짐을 홀로 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일을 생각할 때 심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슬픔이 가슴에 사무쳐 왔습니다. 그는 세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주위 사람들을 못살게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피곤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불신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힘든 일을 앞에 놓고 행방불명이 된다든지 잠수를 하든지 드러누워 버리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힘든 일에 부딪히면 실컷 먹고 자버립니다. 또 어떤 분은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본 받아 동역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조금 나아가셨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땅에 엎드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코자 하는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아빠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처절하게 찢기고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자기의 소원을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원을 진실하게 아뢰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고난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을 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막상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고자 할 때 심히 고민이 되고 슬펐습니다.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좀 더 살아서 제자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의 유익을 잘 아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일이라도 좀 쉽게 성취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누구나 좀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일등 하기를 원합니다. 누가 내 마음을 알고 섬겨주고 대접해 주기를 바랍니다. 전도하지 않고 좋은 양과 일대일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일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얻은 영광은 쉽게 사라집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결국이 대부분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힘들 때 제자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애걸까지 합니다. 같이 동참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제자들 모습에 원망하는 것 같은 비탄마저 서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하게 실패한 기도로 귀결됩니다.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을 열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시던 하나님, 변화상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및 모든 제자들에게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예수님께 모든 권위를 부여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아들의 기도에 왜 이리 침묵하십니까? 후일 주의 형제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요(약5: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거센 풍랑조차 잔잔해졌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예수님의 요청에 즉각적인 응답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정작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말로 기도했으나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적한 겟세마네의 밤에 칠흑보다 더 어두운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실패한 기도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그의 적들이 이를 놓고 무어라 비난을 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저 친구가 남은 구원한다 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구나(15:31).”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응답을 못 받은 것 같은 기도, 하나님의 깊은 침묵만이 대답이었던 예수님의 이 기도는 모든 신자가 본받아야 할 ‘모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실패한 기도, 그러나 성공한 기도가 여러 번 나옵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요단을 건너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반복해서 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고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순종하여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입성을 맡기고 자신은 신명기를 선포합니다. 바울은 몸에 고통스러운 병이 있어서 세 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의 그 애절한 요청은 들어 주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 한 마디로 때우시고 말았습니다(고후 12:9). 이렇게 실패한 바울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모델로 삼아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는 부활로 응답되었습니다. 바울의 치유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은 사역에의 능력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광대하십니다. 성숙한 기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도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피땀 흘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무엇입니까?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하면 좋은데 일치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더 좋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열매를 맺고 싶고 영광을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갖기 원합니다. 직장의 안정을 갖기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현재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좀 더 근본적인 것, 미래적인 것으로 채우십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기를 원하거나 더 쉬운 길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심마태 목자님은 철두철미한 선배 시험관을 만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을 통해서 성공 확률 50% 정도였던 장비가 99.9% 좋아졌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대충 넘어가면 좋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독한 사람을 만나면 그 만큼 남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믿음이 정금과 같이 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썩는 밀알과 같이 조용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내면에 힘을 얻으셨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62:1).”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셨지만 한편으로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권면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조용하지만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육체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사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깊은 확신을 덧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오셔서는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기도를 시작할 때는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지만 기도하면서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마음의 막힌 것이 뚫리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형식적으로 끝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힘을 얻기 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에 짓눌려서 끙끙 거리며 기도할 지라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끙끙 거리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록음악 같이 강하고 거칠게 기도할 수도 있고 클래식 같이 조용하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기도도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소리로 부르짖건 작은 신음 소리로 기도하건 예민하게 들으십니다. 우리는 어쨌든 기도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매일 새벽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기도 생활이 영적인 근육을 만들고 고난을 박차고 나가게 합니다. 신실하게 기도할 때 구덩이 속에 처하더라도 비상할 수 있는 은혜를 덧입게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총리가 되었듯이,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총리로 높임을 받았듯이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습관적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라도 확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우리가 어려울 때 잠잠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기도할 때 주님은 새 마음을 주십니다.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기도 후에 공회와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가장 어두운 상황에서도 비전에 충만하셨습니다. 자신의 승리와 재림의 영광까지 바라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는 멀찍이 따르다가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한 계집종이 너도 그 도당이라는 말에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멀찍이 따르다가 결국은 점점 멀어져갔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대제사장의 뜰에서 발생한 은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털어놓기 전에는 그냥 묻힐 수도 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 이야기가 구전될 때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권위에 손상이 가서 리더십 구사에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대법관이나 국무총리 등 청문회에서 부동산 문제나 자식의 병역 문제, 위장 전입 등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결국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경우가 많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이러한 치부를 자발적으로 드러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린다 해도 자신은 죽을지언정 그리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는데 가장 비참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했습니다(눅22:62).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려고 단에만 서면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전설이 나왔겠습니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읽는 선악과의 원죄와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수치스러운 실패를 덮을만큼 충분하게 넓고 컸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지난 모든 일을 마감하여 회한의 일생을 살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여인들에게 먼저 베드로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16:7).”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는데 그 첫 번째가 ‘게바’였습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부인한 제자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 당신을 보이신 것은 꾸중하고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고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주님을 뵈올 면목이 없었고 그 안에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 ‘세 번의 사랑 고백’을 하도록 하심으로 ‘세 번 부인’을 상쇄시켜 주시고 그의 죄의식과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숨어 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타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알았기에 베드로는 과거의 수치를 끄집어 내 후대에 알리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 가장 아픈 실패의 이야기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장되어 마감을 합니다.

  우리도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갈등만 할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의 투쟁을 해야겠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나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영적인 싸움을 하여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실패한 기도 같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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