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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3년 로마서 15강(12:1-21)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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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30회 작성일 13-02-17 13:47

본문

2012년 로마서 제 15 강
말씀 | 로마서 12:1-21
요절 | 로마서 12:1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저는 이번 주 그레이스 A 리 선교사님으로부터 김진경 총장의 인생을 다룬 「사랑주의」라는 책을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김진경 총장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국 연변과 북한 평양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들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올 5월에는 톨레도의 폴홍 박사님과 시카고의 폴고 박사님이 평양 과기대에 나아가서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분들에 의해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할 때 주일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습니다. 본래 제물은 죽여서 피를 다 뽑고 각을 떠서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는 불에 태워서 드립니다. 그런데 산제사는 우리의 생명을 산 채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과 생각과 몸을 세상과 구별되게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6:12,13).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번 죽는 순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안요셉 선교사님은 외교관으로서 매우 가치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온 마음을 다 드려서 감당하자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외교관을 사표 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다음날 사표를 내었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이 놀래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인데 그럴 줄 몰랐다고 하고 다시 사표를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외교관을 사표 내는 것이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매우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자기를 부인하고 다시 가서 사표를 찾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죽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산제물로 드리는 삶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여러분의 눈으로 하여금 나쁜 것이라고는 그 어느 것도 쳐다보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눈은 산제물이 된 것이다. 그대의 혀로 누추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혀가 산 제물이 된 것이다. 그대의 손으로 무법한 행위를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손은 완전한 번제물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 전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열심으로 헌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단들의 열심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병들이고 죽이는 데로 이끌게 됩니다. 이 세상의 유행을 좇아가는 사람들의 열심도 대단합니다. 우리는 과거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본받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대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살고자 할 때 때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꼭 이 세대의 가치관과 다른 특별한 삶의 방식을 좇아 살고자 투쟁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일어납니다. 때로 이 세대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멋진 연예인들을 사모하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자가용을 가지고 주말에 교외로 나아가 드라이브하고 등산을 하고 콘도를 빌려 주말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런 것이 좋아 보이고 부러워 보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이런 세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니 어쩐지 나의 삶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또 나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해도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의 생애를 본받아 살고자 하면 세상은 이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손해를 보고, 고난과 아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가 성경에 기초한 내 삶의 가치관과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오해하고 때로는 핍박합니다. 이때 마음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과 방향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요, 불신의 세대요, 하나님이 없는 세대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이 자기 목전의 유익과 실리를 좇아 언제든지 여러 우상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지조를 바꾸는 세대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실용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목전의 사사로운 유익이나 실리를 좇아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취하고 자기에게 손해나 아픔이 있으면 버립니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 세대는 남편과 아내마저도 쉽게 버리고 이혼합니다.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자신들이 한 약속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기적인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합니다. 이런 상대주의야말로 이 세상을 어둡고 슬프게 하며 불행하게 하는 최대의 원수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이런 상대주의적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안일주의입니다. 세속주의입니다. 자신의 장래의 성공, 돈, 삶의 안정, 편안함이 이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관이요 삶의 양식입니다. 이런 가치관과 삶의 양식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극도로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합니다. 캠퍼스에 동성애 예찬론자들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청년들의 정신과 영혼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거의 모든 젊은 청년들이 이 세대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안일주의에 병들어 진리에 대한 정열과 스피릿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잠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의 가치관과 물결은 우리들의 내면에도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들에 끊임없이 접하고 그 영향을 받고 나면 성경에 기초한 영적인 가치관과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우리의 삶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들의 정신과 영혼은 스피릿을 잃어 시들어가고 죽어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명을 감당할 의욕과 힘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물결에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고자 하거나 이 세대와 조금이라도 타협하고자 하면 어떤 삶이 뒤따릅니까? 이 세대의 환영을 받습니다. 뒤이어 영적 패배와 부패와 타락이 따라옵니다. 사단 앞에서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열매 없고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대의 세속주의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성이나 머리로 이 세대의 가치관과 물결이 옳지 않다고 인정하고 본받지 않겠다는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결심과 의지는 오래가지 못해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먼저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변화시킬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육체의 연습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혈과 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씨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시 1: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아 살든지 변화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둘째, 자기의 은사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신앙 공동체의 윤리를 다루면서 바울은 제일 먼저 신자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앙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는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정당한 대우와 섬김을 받지 못하고 부당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그는 자기가 맡은 위치와 직분에 대해서 감사를 잃게 되고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신을 정당하고 합당하게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역사에 대해서 판단을 하게 되고 비판을 하게 됩니다. 사람과 갈등하게 되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게 됩니다. 그리하면 그 공동체의 질서와 성령의 그릇이 깨어지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연주하는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원하는 포지션만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위치에 서야 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때 각 사람이 맡은 위치와 직분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아야  팀 플레이가 이루어질 수 있고,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설사 자기가 진정 정당한 대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불평이나 원망하는 대신에 그 위치와 직분을 감사함으로 받아드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며, 그것이 자신의 몸을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되는 것을 보면 만족해하고, 잘 되면 시기 질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눈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머리가 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발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직분과 역할이 있습니다. 또 서로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의 직분과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때 다른 사람도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성경공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모두가 일대일만 하고 식사를 준비해서 섬기고, 청소하는 사람, 음악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조롭고 획일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입니다. 예언과 가르치는 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언은 주로 선지자들에 의해서 행해졌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끝난 시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새로운 계시를 위한 예언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설교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직분이었습니다. 즉 예언은 단순히 미래사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경고와 권면과 교훈과 판단을 두는 것입니다(고전14:3). 가르치는 일은 예언과 구별되는 직분입니다. 예언은 계시와 관계가 있는 반면에 가르치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조화롭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하게 하고 신자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고전14:26). 오늘날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아니하거나 이에서 벗어나면 무가치한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예언이면 그것이 성취되는 여부를 입증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언이 맞는 경우도 있지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초해서 믿어야지 예언 중독이 되면 위험합니다. 꿈도 절대 신뢰해서도 안 되지만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의미 있는 꿈이 있습니다. 한 선교사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한 영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1,2년 그 음성을 듣고 성령이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그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믿음의 분량대로 각각의 은사를 나눠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위대한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그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은사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며, 그 은사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맡은 은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가진 위치와 직분에 대해서 부러워하며 자기에게 주신 위치와 직분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워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직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불평을 일삼고 게으르고 불충하게 살아갑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언젠가는 그에게서 주신  은사마저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기시고 때가 이르면 더 큰 은사를 주십니다.

  고전 14장에는 방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방언은 같은 말을 한 두 시간씩 반복하면서 기도합니다.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기도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은 방언을 하는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니 입이 아프다며 그만두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입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이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방언을 행한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방언은 가장 초보적인 것입니다. 또 방언을 말하는 것과 죄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서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기 쉽습니다. 유대인들의 표적 신앙을 예수님은 싫어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표적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 더 자극적인 체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을 때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회개하고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을 추구해야 합니다. 또 은사가 많이 나타난다고 열매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보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은사를 행하면서 교만하고 음란영상을 보고 즐기기보다 마음으로 깊이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은사를 받아 성경도 가르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방언이 능력은 아닙니다. 방언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영으로 기도함으로 형제들을 위하여 영적인 전투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사랑에 대한 정의와 개념이 빗나간 세대입니다. 연극과 영화, T.V 소설 등에서는 정욕적 감정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사랑으로 미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랑에 윤리나 진리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합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악도 눈감아주고 받아주기 시작할 때 그것은 그 형제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형제의 영혼과 생명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절하고 선한 것에 대해서는 격려하고 붙들어 줄때 그 형제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며 유익되게 할 수 있습니다.

  김진경 총장님은 북한의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구호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간첩혐의로 42일 동안 억류하여 심문을 하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29개월 후 그들의 요청에 따라 평양 과기대를 세워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의 악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할 때 그들은 고통과 수치와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진정으로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정복하고 이기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을 사심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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