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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3년 학생수양회 3강(행 5:1-42)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김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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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91회 작성일 13-02-0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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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수양회 주제 3강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 사도행전 5:1-42
요절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부흥했는 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시간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장 첫 부분은 아나니아 부부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죽음은 초대교회를 살리는 불씨역할을 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헌금문제에 있어서 사도들을 속이려 했습니다.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으로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거짓말은 더욱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워지는 단계에서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시고자 아나니아 부부를 데려가셨습니다. 이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정직하게 서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앞에 서고자 했을 때 초대교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12). 표적은 메시지가 있는 기적이며 기사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분명한 표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덧입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도 하십니다. 표적과 기사만 추구하면 표적신앙이 되지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우리 삶속에 얼마든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저도 목자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지금은 요회목자가 된 한 형제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성대 사회당 학생위원장이었습니다. 말씀공부를 해도 벽에다 하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학점문제와 여동생 가출문제로 진지하게 기도해보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느라 공부를 안해서 취업이 어려운 2.0대의 학점이었기에 4.0의 학점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피식 웃었지만 결과적으로 정확히 4.0의 학점을 얻었습니다. 가출한 여동생도 놀랍게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결혼식 참석 차 대구 경산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길거리에서 여동생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관방에 돌아와 부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 믿음없이 살아온 것을 회개하고 다음날 결혼식도 참석하지 않고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 두 사건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였고 그후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와 말씀공부를 절대적으로 지키게 되었으며 요회목자가 되었고 믿음의 가정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분명히 드러나자 성도들은 모이기를 힘썼는데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12). 솔로몬 행각은 성전에 온 사람들이 모여서 랍비들의 가르침을 듣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한쪽 벽이 트인 집회장소로서 누가 모였는지 다 노출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많이 모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실존을 분명하게 체험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많이 일어난 대표적인 표적은 병든 사람이 낫고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자유케되어 건강하고 쓸만한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임가운데도 이런 치유와 회복의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임은 대학생들이 내외적 질병과 귀신의 세력에 나음받고 건강하게 되어 성서한국와 세계선교에 귀하게 쓰임받는 Healing Camp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대학생들이 병과 귀신에서 나음받고 이 나라를 살리는 힐링캠프요, 파워스테이션으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고 사도들을 따르자 시기심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사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었습니다(19). 아마 옥졸들의 눈을 가리운 것같습니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기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사도들을 다시 자유케 해 주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사도들을 끌어낸 후 그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었습니까? 요절 말씀인 5장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주의 사자는 사도들을 끌어 내었으면 ‘고생 많았으니 빨리 가서 은신처에 숨으라’ 혹은 ‘고향으로 도피하라’ 등의 방향을 줄 것같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그들에게 성전으로 가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서서’ 말하라는 것은 눈치보지 말고 당당하고 담대히 말하는 것이며 ‘다 말하라’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도 빼뜨려서는 안되는 참으로 소중한 말씀임을 뜻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갇혔던 사도들을 끌어내어 다시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 하신 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있습니까? 하나님은 계속하여 복음전파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들의 이제까지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자녀사랑을 표현할 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역시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부모가 세 자녀가 있는데 두 자녀가 구원받았으니 하나는 잃어도 괜챦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항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위한 구원사역을 쉴 수 없으십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하늘의 천사들도 대신 전할 수 없고 오직 이 땅의 복음전도자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음전파자들인 사도들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이 묶여 있으면 구원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숨어 있으면 구원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침묵하고 있으면 구원역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복음전도자들의 몸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전도자들이 사명의 땅으로 가지 않습니다. 가더라도 침묵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사람들이 파멸로 가고 있는 데 복음맡은 이들이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자기자녀들이 한발 한발 천길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데 자녀의 생명을 맡은 종들이 바라만 보고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깝고 화가 나실까요?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종들을 향해 “벙어리 개들”과 같다고 탄식하셨습니다.(사 56:10) 하나님은 당시 주의 종들을 영혼의 파수꾼들로 세우셨고 그들은 다가오는 파멸을 보고 외쳐야 했는데 벙어리 개들처럼 침묵하였습니다. 뼈다귀같은 것을 보면 달려와서 미친 듯이  핥아댔지만 정작 자신의 본분인 도적이나 강도가 오는 것을 보고 짖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전방 부대에 초병들이 잠을 자서, 북한군이 철조망을 넘어서 남한의 내무반 문을 두들길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북한병사가 수류탄이라도 내무반에 던져넣고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사건은 영혼의 파숫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자의식이 들고 때로는 바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명령이기때문입니다. 명령도 준엄한 명령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에 불순종할 때 심판을 받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말씀을 전하지 않아서 어떤 영혼이 파멸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핏값을 침묵한 영혼의 파숫군에게서 찾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복음을 들으면 듣는 사람이 생명을 얻기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삶이 살아날뿐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세째로 이 복음은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 이루신 복음이기때문입니다. 레위기강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맥이 끊기고 피를 토하며 갈기갈기 찢겼던 소처럼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생명바쳐 이루신 생명의 복음이기때문입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이 명령에 사도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데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다시 체포되었고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리새인 공회원 랍비 가말리엘을 통해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때린 후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도록 엄포를 놓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초대교회는 날로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복음전파 명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안전이나 이 땅에서 잘되고 축복을 받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고지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지론은 우리가 세상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와 세상 일을 위해서 복음전파는 뒤로 미루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일들도 잘해야 합니다. 뛰어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 세상명예, 인정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생명의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과 같이 사신 분이 바로 안요셉 선교사님이십니다. 이분은 반기문총장과 같이 외무고시에 합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명예와 인정을 얻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서 명예로운 대사의 길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는 것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명예심과 세상야심이 많았던 사도요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1:17)”

요새 사람들은 모두다 성공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에서 성공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성공과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반기문 총장, 이건희 회장과 같은 명예와 부를 얻었다고 하더라고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그는 불쌍한 인생의 패배자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성공의 기준은 복음전파입니다. 얼마나 이땅에서 안정되고 편한 삶을 살았는 가, 얼마나 명예와 부를 지닌 사람이었는 가가 아닙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 가 입니다. 즉 복음과 복음전파가 성공의 기준입니다. 그런 면에서 UN의 반기문총장보다 UBF의 안요셉 선교사님이 더 성공한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기풍 선교사 기념 수양관에서 수양회를 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님은 제주도에서 13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전라도에서 여러 개의 교회를 섬기신 한국의 사도바울과 같은 분입니다. 결국 그는 사도바울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순천의 한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이기풍 목사님외에도 여러 명의 순교자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성공한 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적인 반기문이요 영적인 이건희 이상입니다. 이렇게 영적 성공, 복음적인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복음역사에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전파에 헌신하면서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복음전파를 했으니 하나님이 세상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복음전파가 정말 가치있다고 믿었기에 복음전파에 헌신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친히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복음전파를 앞세우고 헌신하는 이들을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관악 3부출신 영국의 지은 캐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시고 미국 UCLA에 장학생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국복음역사를 위해서 그보다 못한 UCL에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이는 세상적으로보면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축복이 아니라 복음역사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녀는 지금 세계 제 1의 종합대학, 옥스퍼드대학의 언어학과 학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그녀를 스카우트 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이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추복하십니다. 결코 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축복이 없다하더라도 복음전파하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과 같이 복음과 복음전파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도들이 있었을 때 초대교회는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힘차게 확장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문의 사도들처럼 복음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복음전파를 최고 인생목적으로 삼고 충성하는 복음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입을 열어서 복음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내성적인 성격과 자의식으로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내 신앙만 지키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나 삼촌들이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하면 내 신앙을 변명하고 지키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광주나 서울에서 공부하고 방학때 집에 가면 만성결핵을 앓고 계신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어차피 영접도 하지 않으실 텐데 하면서 잠을 자거나 TV를 보았습니다. 그러던 대학 4학년을 마칠 쯤 졸업식에 오시겠다고 하신 아버지가 졸업식 한달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버지 시신앞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이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복음을 다 말하지 못한 것으로 인한 자책과 죄의식으로 인한 통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후 저는 제가 소심함, 안일함으로 인해서 복음을 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며 슬픔을 남기게 되는지 알게 되었고 뒤늦은 자각, 몸부림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물불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경우, 새벽에도 전화를 걸어서 복음을 말하고 고향에 가면 어르신으로 대화하기 거북한 상대였지만 입만 열면 복음을 말하였습니다. 결국 저의 조부께서는 눈에 흙이 들어와도 교인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하셨던 분인데 돌아가시기 2주전에 목사님과 교인들을 초청하여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예배를 2번 드리시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기독교인으로 장례를 치루었고 더불어 저희 집에서 제사는 철폐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좀 자의식과 어색함과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할아버지가 구원을 받게 되어서 감사했고 영적인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입을 다물고 복음을 말하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다문 입때문에 영혼들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입을 열어 말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입을 억지로라도 벌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도록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모든 잔재미들을 끓고 가장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매일 3년동안 새벽기도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제게 담대한 마음, 품는 마음을 주시고 할아버지를 잘 섬기게 하셨습니다. 입을 열기가 어렵다면 저처럼 진지하게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담대하게 입을 열 수있도록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의 사자는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중심은 어디일까요? 국회나 청와대일까요? 아닙니다. 캠퍼스가 우리 나라의 중심입니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캠퍼스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캠퍼스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입니다. 이 캠퍼스에 청년사도로 부르심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캠퍼스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남에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저는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서 1000명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나님께 헌신의 오병이어로 드리기로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제가 1000명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독일월드컵 때였습니다. 저는 축구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사랑, 영혼사랑을 배우기위해서 한국 전이 열릴 때마다 피싱하러 캠퍼스에 갔습니다. 그때 가장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기에 이기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저의 피싱역사를 받으시고 3명의 영혼을 구원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이곳에 오신 청년학생여러분들도 저처럼 캠퍼스시절에 1000명의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30만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아주시고 캠퍼스를 변화시키는 데 오병이어로 써주시며, 황금같은 캠퍼스시절을 주께 드린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축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복음전파입니다. 소시민적이고 안정된 삶, 출세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소원도 인생의 성공의 기준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성공의 척도는 복음이고,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을 전파했으면 성공한 것이고 아무리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복음전파에 실패했으면 그는 인생의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서 울부짖고 있으며 마약을 하고 자살을 시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의 내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안위만 돌보지 않고 “가서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전파에 헌신함으로 복음을 먼저받은 자의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서 캠퍼스에 서서 이 생명 의 말씀을 다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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