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3년 학생 수양회 2강(히 12:1-13) 예수를 바라보자(염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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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UBF 제주도 학생 연합 수양회 주제2강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1-13
요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한 목사님이 전도 집회를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제 친구는 예수님이 저의 모든 문제를 가져가셨기 때문에 앞으로 제 인생은 쉬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났더니 마음에 여러 갈등이 생겼고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편할 것 같지만 막상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전쟁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믿는 진리를 사람들 사이에서 고수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여러 문제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쳐나가는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인내한 결과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는지 알려주는 모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로마에 사는 유대크리스천입니다. 연대는 서기64-67년 로마 네로황제 때 입니다. 64년에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콜로세움 같은 대전차 경기장에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하여 6일 동안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때 네로가 로마시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건설하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지르고 불을 보면서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네로는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 예수그리스도만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이 미움 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 때 부터 신자들에게 고난의 경주가 시작됐습니다. 믿는 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매달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소뿔에 찔려 죽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면 신자를 공중에 매달아서 불로 태워서 등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박해 때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대교는 지도층의 노련한 타협으로 핍박 없이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예수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남은 자들도 고통스런 이 신앙경주에서 탈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겐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11장에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비롯한 19명의 선진이 나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구름 같이 많은 선진들도 우리 못지않게, 혹은 더 혹독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늘 상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확신 가운데 신앙경주를 하고 있습니까? 올해 처음 UBF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여기로 오셨습니까? 밥 몇 번 얻어먹으러 왔다가 원치 않게 성령께 붙들려서 거듭난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름 수양회를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안타깝게도 죄가 무엇인지 알아버렸습니다. 옛날처럼 마음대로 못삽니다. 맘대로 음란물 보고, 술 취하고, 커닝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이런 것을 하면 죄의식이 듭니다. 또 주말에 교회 다닌다고 가족에게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친구들에게 “너 교회 다니더니 이상해졌다?”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제사 때가 되면 아버지도 무섭고 하나님도 무서워서 절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죽겠습니다. 차츰 신앙생활이 만만한 게 아닌 것을 알고서 중도 하차를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보장된 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목자님들과 진실한 친구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최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신앙생활을 할까 말까 발을 넣다 뺐다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참 좋은데 내가 목자 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괜히 경건한 UBF에 있다가 아까운 청춘 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손해 보게 하시는 분 아닙니다. 그리고 나를 지으신 분보다 내 인생을 더 잘 인도할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 믿고 신앙경주를 하십시오.
리더 목자님들은 경주를 하면서 내 삶을 온전히 드릴까 말까? 하는 고민을 가장 많이 합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전히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온전히 헌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삶에는 내가 죽는 아픔이 있지만 생명의 열매 맺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Best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2010년 11월 26일 평범했던 어느 날 저는 나만을 위해서 살던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아무도 모르게 쓰고 사인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보셨는지 몇 개월 후 저를 풀타임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제 비전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순종했을 때 캠퍼스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첫해는 창고청소, 페인트칠, 운전 같은 허드렛일을 주로 했고, 올해는 새 양 365명을 만나서 말씀을 주고 그 중 몇 명을 목동으로 세우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2년 동안 삶을 온전히 드렸다고 말할 순 없지만 드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 2년이 너무나 괜찮은 시간이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삶이 너무나 기대됩니다. 우리 모두가 확신가운데 하나님께 삶을 드리고, 같이 찬양하면서, 같이 스릴 있는 신앙경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우리가 확신 가운데 시작한 이 경주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1절이 그 비결을 말씀합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먼저 무거운 것을 벗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베베는 가벼운 맨발로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습니다. 수영선수는 백분의 일초를 위해 삭발을 하기도 합니다. 경주를 하는데 코트를 입고, 워커를 신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꼭 신앙경주 할 때는 무거운 것을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달리면서 그 무거운 세상욕심과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각종 염려들을 낑낑대며 매고 달립니다. 이러면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점에 대한 염려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갑자기 종교가 무교로 바뀝니다. 예배를 비롯해서 모든 신앙생활을 접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기독교로 돌아옵니다. 또 가정문제를 겪는 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거나 매일 싸웁니다. 기도하는데 진전이 없습니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됩니다. 마음이 1t, 2t, 3t 무거워지고 결국 기도를 접습니다. 이런 문제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해결하려면 답이 안 나옵니다. 마음만 무겁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매일 싸우다, 결국 이혼하시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짐을 예수님께 맡길 때 7년 만에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염려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달리는 데만 집중해야합니다. 그래야 가볍고 경쾌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또 경주를 잘하기 위해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합니다. 우리를 얽혀 넘어뜨리는 습관적인 죄를 말합니다. 달리다가 신발 끈이 풀리면 끈을 밟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면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2번 3번 꽉 묶어버립니다. 신앙경주를 할 때도 끈을 밟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님들은 음란물을 보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음란물을 보면 순식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평생 정욕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과 하나님이 날 버리실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얼른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시는 끈이 풀려 넘어지지 않도록 2번 3번 꽉! 묶는 진짜 회개가 필요합니다. 진짜 회개는 지 정 의에 기초한 전인격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잘못했다고 애통함을 정서적으로 느끼고,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 정 의에 입각한 진짜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애통한 마음과 의지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얽매이기 쉬운 죄와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가벼운 몸으로 신앙경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부터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만 벗어버리면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경주는 마라톤보다 더 장거리입니다. 마라톤은 2시간 걸리는데 신앙경주는 얼마나 걸립니까? 100년이 걸립니다. 시간적으로 365,000배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 1년 정도 하고서 신앙에 대해서 거의 아는 듯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많이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1/100정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거리를 달리다보면 무거운 것이 없어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어도 달리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내리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경사 45도 정도 되는 고난의 오르막도 많습니다. 인내가 없다면 완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완주할 수 있는 인내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의 인간성에서 나오는 인내는 한계가 있습니다. 잘 참다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샴페인이 뻥 터지듯이 갑자기 화가 빵 터집니다. 온전한 인내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목자를 엄청 괴롭히는 양들이 있습니다. 목자가 받아주니까 독한 말로 목자의 마음을 쿡쿡 쑤십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이 양이 아무리 괴롭혀도 언젠가는 예수님 믿고 변화된다는 믿음만 있으면 돌부처같이 인내합니다. 다윗도 자기를 죽이려고 평생 따라다니는 사울을 감당하며 살려주고, 용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a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이 말은 원어로 ‘믿음의 창시자.’ ‘온전하게 하시는 이’ 이것은 ‘믿음의 완성자’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탁월하게 보여주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능이나, 공무원, 편입, 고시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합격수기를 읽습니다. 합격자들이 어떻게 공부했고, 몇 시간 잤고, 졸릴 때는 어떻게 했고,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만점으로 수석합격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도중 너무 피곤하고 낙심이 될 때 예수님의 합격수기를 읽으면 어떻게 이 고난을 견대 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2b, 3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몸과 마음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우리들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깨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기도했습니다. 로마의 시세로가 기록했듯이 십자가형은 지구상에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사형수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일종의 마취제인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못에만 살짝 긁혀도 아픈데 예수님은 채찍에 온 몸이 찢겨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3개로 온 몸을 지탱하는데 아픔을 참을 수가 없어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그토록 사랑하고, 섬기고, 말씀을 주고, 병을 고쳐준 백성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배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이 전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도 버림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진짜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난스런 저주의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아무 원망도, 아무 미움도, 아무변호도 없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조용히 인내하셨습니다.(사53:7) 어떻게 이 모든 아픔들을 겪으며 잠잠히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얻게 될 기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인내하여 여기 있는 우리가 다 구원을 받고, 온 인류가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평화롭게 영원토록 살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저도 종종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그만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욕과 음란과 싸우는 것이 지긋지긋 합니다. 그냥 양심을 팔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제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피해를 입는 것 같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최근에 어머니가 직장에서 못된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좀 많이 벌면 고생 안 시킬 텐데’하는 생각에 장남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 석사 박사 학위를 따고 스펙을 쌓는 것이 부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한 몸만 간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주변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내 인생만 신경 쓰면 됐는데 자꾸 다른 사람인생에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점점 내 인생이 내 인생 같지 않고 인생을 잃어버린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내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정이나 사명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때론 지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어려움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캠퍼스라는 특수사명을 주셨습니다. 고난이 따르지만 내가 온전히 순종할 때 캠퍼스에 제자가 세워지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이들이 장차 사회에서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 이들을 통해서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가 이루어 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될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지만 비전이 있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습니다. 풍성한 미래가 있고 장차 예수님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리로 올라와서 네게 예비 된 영원한 나라를 상속하라” 이 한 마디를 들을 것을 생각할 때 기쁨은 모든 고난을 압도합니다. 저를 즐겁게 달리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이 들면 고난이 없는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배신을 당했습니까?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버림당한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오해받고 있습니까? 죄가 없으시나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왜 나만 이런 힘든 길을 가야 하냐고 불평이 나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예수님이 결국 어떻게 되셨는가?” 생각하십시오. 나를 바라보기보다,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오직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어려움 앞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해결되지 않는 인생문제,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학점걱정, 누군가 나를 험담하고 괴롭히는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무리 커 보일지라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면 그 문제가 좁쌀만 하게 변해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앞에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길 기도합니다.
5-13절까지는 “왜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다 잘나가고, 편안하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힘들게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7a를 보십시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징계는 원어로 훈육 또는 가정교육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가정교육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2005년-7년까지 교도소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죄를 지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군대생활을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복무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많이 만나고 얘기도 자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가운데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고아가 많았습니다. 훈련시켜주고, 잘못을 잡아주는 부모님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가 올바르게 자라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8절도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친아들로 여기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또 한국남자는 자상하고 리더십이 있다는 이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강제 징용돼서 군 생활하는 동안 시어머니 같은 수십 명의 선임들을 상큼한 미소로 섬기고, 야간행군, 화생방 같은 빡센 훈련을 눈물로 감당하고, 선임이 되어서는 말 안 듣는 후임들을 이끄는 마음고생을 하지만 이런 훈련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인내심 있고, 자상하고, 리더십 있는 훈남으로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징계는 당시는 슬퍼 보이지만 유익합니다. 10b과 11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를 잘 받으면 거룩함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십니다. 그래 자녀인 우리도 의롭고 거룩하기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징계 당시는 슬프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거룩하고 평안을 누리는 성품을 가지도록 징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의 때에 우리는 2가지를 해선 안 됩니다. 5b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첫 째, 경히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셨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길 원하시는 거지?” 생각해야 합니다. 가볍게 넘긴다면 거룩하고 의롭고 평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낙심하면 안 됩니다. 사랑으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를 주시는데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처럼 징계를 받을 때 "다리 아파서 못가겠다. 그만하고 싶다"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내 안에 맺힐 열매를 바라보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징계를 당한다면 감사함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빚어지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고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잘 인내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역사 가운데 사용하시고, 징계를 잘 참는 자에게는 거룩함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고난과 징계 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낙심하기보다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염준섭 목자)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1-13
요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한 목사님이 전도 집회를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제 친구는 예수님이 저의 모든 문제를 가져가셨기 때문에 앞으로 제 인생은 쉬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났더니 마음에 여러 갈등이 생겼고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편할 것 같지만 막상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전쟁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믿는 진리를 사람들 사이에서 고수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여러 문제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쳐나가는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인내한 결과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는지 알려주는 모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로마에 사는 유대크리스천입니다. 연대는 서기64-67년 로마 네로황제 때 입니다. 64년에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콜로세움 같은 대전차 경기장에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하여 6일 동안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때 네로가 로마시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건설하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지르고 불을 보면서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네로는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 예수그리스도만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이 미움 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 때 부터 신자들에게 고난의 경주가 시작됐습니다. 믿는 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매달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소뿔에 찔려 죽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면 신자를 공중에 매달아서 불로 태워서 등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박해 때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대교는 지도층의 노련한 타협으로 핍박 없이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예수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남은 자들도 고통스런 이 신앙경주에서 탈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겐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11장에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비롯한 19명의 선진이 나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구름 같이 많은 선진들도 우리 못지않게, 혹은 더 혹독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늘 상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확신 가운데 신앙경주를 하고 있습니까? 올해 처음 UBF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여기로 오셨습니까? 밥 몇 번 얻어먹으러 왔다가 원치 않게 성령께 붙들려서 거듭난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름 수양회를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안타깝게도 죄가 무엇인지 알아버렸습니다. 옛날처럼 마음대로 못삽니다. 맘대로 음란물 보고, 술 취하고, 커닝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이런 것을 하면 죄의식이 듭니다. 또 주말에 교회 다닌다고 가족에게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친구들에게 “너 교회 다니더니 이상해졌다?”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제사 때가 되면 아버지도 무섭고 하나님도 무서워서 절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죽겠습니다. 차츰 신앙생활이 만만한 게 아닌 것을 알고서 중도 하차를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보장된 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목자님들과 진실한 친구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최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신앙생활을 할까 말까 발을 넣다 뺐다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목자님들은 참 좋은데 내가 목자 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괜히 경건한 UBF에 있다가 아까운 청춘 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손해 보게 하시는 분 아닙니다. 그리고 나를 지으신 분보다 내 인생을 더 잘 인도할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 믿고 신앙경주를 하십시오.
리더 목자님들은 경주를 하면서 내 삶을 온전히 드릴까 말까? 하는 고민을 가장 많이 합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전히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온전히 헌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삶에는 내가 죽는 아픔이 있지만 생명의 열매 맺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Best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2010년 11월 26일 평범했던 어느 날 저는 나만을 위해서 살던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아무도 모르게 쓰고 사인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보셨는지 몇 개월 후 저를 풀타임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제 비전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순종했을 때 캠퍼스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첫해는 창고청소, 페인트칠, 운전 같은 허드렛일을 주로 했고, 올해는 새 양 365명을 만나서 말씀을 주고 그 중 몇 명을 목동으로 세우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2년 동안 삶을 온전히 드렸다고 말할 순 없지만 드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 2년이 너무나 괜찮은 시간이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삶이 너무나 기대됩니다. 우리 모두가 확신가운데 하나님께 삶을 드리고, 같이 찬양하면서, 같이 스릴 있는 신앙경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우리가 확신 가운데 시작한 이 경주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1절이 그 비결을 말씀합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먼저 무거운 것을 벗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베베는 가벼운 맨발로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습니다. 수영선수는 백분의 일초를 위해 삭발을 하기도 합니다. 경주를 하는데 코트를 입고, 워커를 신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꼭 신앙경주 할 때는 무거운 것을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달리면서 그 무거운 세상욕심과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각종 염려들을 낑낑대며 매고 달립니다. 이러면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점에 대한 염려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갑자기 종교가 무교로 바뀝니다. 예배를 비롯해서 모든 신앙생활을 접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기독교로 돌아옵니다. 또 가정문제를 겪는 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거나 매일 싸웁니다. 기도하는데 진전이 없습니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됩니다. 마음이 1t, 2t, 3t 무거워지고 결국 기도를 접습니다. 이런 문제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해결하려면 답이 안 나옵니다. 마음만 무겁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매일 싸우다, 결국 이혼하시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짐을 예수님께 맡길 때 7년 만에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염려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달리는 데만 집중해야합니다. 그래야 가볍고 경쾌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또 경주를 잘하기 위해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합니다. 우리를 얽혀 넘어뜨리는 습관적인 죄를 말합니다. 달리다가 신발 끈이 풀리면 끈을 밟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면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2번 3번 꽉 묶어버립니다. 신앙경주를 할 때도 끈을 밟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님들은 음란물을 보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음란물을 보면 순식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평생 정욕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과 하나님이 날 버리실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얼른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시는 끈이 풀려 넘어지지 않도록 2번 3번 꽉! 묶는 진짜 회개가 필요합니다. 진짜 회개는 지 정 의에 기초한 전인격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잘못했다고 애통함을 정서적으로 느끼고,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 정 의에 입각한 진짜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애통한 마음과 의지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얽매이기 쉬운 죄와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가벼운 몸으로 신앙경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부터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만 벗어버리면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경주는 마라톤보다 더 장거리입니다. 마라톤은 2시간 걸리는데 신앙경주는 얼마나 걸립니까? 100년이 걸립니다. 시간적으로 365,000배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 1년 정도 하고서 신앙에 대해서 거의 아는 듯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많이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1/100정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거리를 달리다보면 무거운 것이 없어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어도 달리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내리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경사 45도 정도 되는 고난의 오르막도 많습니다. 인내가 없다면 완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완주할 수 있는 인내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의 인간성에서 나오는 인내는 한계가 있습니다. 잘 참다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샴페인이 뻥 터지듯이 갑자기 화가 빵 터집니다. 온전한 인내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목자를 엄청 괴롭히는 양들이 있습니다. 목자가 받아주니까 독한 말로 목자의 마음을 쿡쿡 쑤십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이 양이 아무리 괴롭혀도 언젠가는 예수님 믿고 변화된다는 믿음만 있으면 돌부처같이 인내합니다. 다윗도 자기를 죽이려고 평생 따라다니는 사울을 감당하며 살려주고, 용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a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이 말은 원어로 ‘믿음의 창시자.’ ‘온전하게 하시는 이’ 이것은 ‘믿음의 완성자’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탁월하게 보여주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능이나, 공무원, 편입, 고시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합격수기를 읽습니다. 합격자들이 어떻게 공부했고, 몇 시간 잤고, 졸릴 때는 어떻게 했고,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만점으로 수석합격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도중 너무 피곤하고 낙심이 될 때 예수님의 합격수기를 읽으면 어떻게 이 고난을 견대 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2b, 3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몸과 마음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우리들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깨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기도했습니다. 로마의 시세로가 기록했듯이 십자가형은 지구상에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사형수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일종의 마취제인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못에만 살짝 긁혀도 아픈데 예수님은 채찍에 온 몸이 찢겨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3개로 온 몸을 지탱하는데 아픔을 참을 수가 없어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그토록 사랑하고, 섬기고, 말씀을 주고, 병을 고쳐준 백성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배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이 전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도 버림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진짜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난스런 저주의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아무 원망도, 아무 미움도, 아무변호도 없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조용히 인내하셨습니다.(사53:7) 어떻게 이 모든 아픔들을 겪으며 잠잠히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얻게 될 기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인내하여 여기 있는 우리가 다 구원을 받고, 온 인류가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평화롭게 영원토록 살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저도 종종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그만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욕과 음란과 싸우는 것이 지긋지긋 합니다. 그냥 양심을 팔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제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피해를 입는 것 같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최근에 어머니가 직장에서 못된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좀 많이 벌면 고생 안 시킬 텐데’하는 생각에 장남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 석사 박사 학위를 따고 스펙을 쌓는 것이 부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한 몸만 간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주변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내 인생만 신경 쓰면 됐는데 자꾸 다른 사람인생에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점점 내 인생이 내 인생 같지 않고 인생을 잃어버린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내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정이나 사명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때론 지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어려움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캠퍼스라는 특수사명을 주셨습니다. 고난이 따르지만 내가 온전히 순종할 때 캠퍼스에 제자가 세워지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이들이 장차 사회에서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 이들을 통해서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가 이루어 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될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지만 비전이 있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습니다. 풍성한 미래가 있고 장차 예수님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리로 올라와서 네게 예비 된 영원한 나라를 상속하라” 이 한 마디를 들을 것을 생각할 때 기쁨은 모든 고난을 압도합니다. 저를 즐겁게 달리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이 들면 고난이 없는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배신을 당했습니까?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버림당한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오해받고 있습니까? 죄가 없으시나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왜 나만 이런 힘든 길을 가야 하냐고 불평이 나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예수님이 결국 어떻게 되셨는가?” 생각하십시오. 나를 바라보기보다,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오직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어려움 앞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해결되지 않는 인생문제, 가정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학점걱정, 누군가 나를 험담하고 괴롭히는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무리 커 보일지라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면 그 문제가 좁쌀만 하게 변해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앞에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길 기도합니다.
5-13절까지는 “왜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다 잘나가고, 편안하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힘들게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7a를 보십시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징계는 원어로 훈육 또는 가정교육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가정교육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2005년-7년까지 교도소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죄를 지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군대생활을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복무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많이 만나고 얘기도 자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가운데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고아가 많았습니다. 훈련시켜주고, 잘못을 잡아주는 부모님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가 올바르게 자라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8절도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친아들로 여기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또 한국남자는 자상하고 리더십이 있다는 이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강제 징용돼서 군 생활하는 동안 시어머니 같은 수십 명의 선임들을 상큼한 미소로 섬기고, 야간행군, 화생방 같은 빡센 훈련을 눈물로 감당하고, 선임이 되어서는 말 안 듣는 후임들을 이끄는 마음고생을 하지만 이런 훈련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인내심 있고, 자상하고, 리더십 있는 훈남으로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징계는 당시는 슬퍼 보이지만 유익합니다. 10b과 11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를 잘 받으면 거룩함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십니다. 그래 자녀인 우리도 의롭고 거룩하기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징계 당시는 슬프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거룩하고 평안을 누리는 성품을 가지도록 징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의 때에 우리는 2가지를 해선 안 됩니다. 5b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첫 째, 경히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셨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길 원하시는 거지?” 생각해야 합니다. 가볍게 넘긴다면 거룩하고 의롭고 평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낙심하면 안 됩니다. 사랑으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를 주시는데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처럼 징계를 받을 때 "다리 아파서 못가겠다. 그만하고 싶다"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내 안에 맺힐 열매를 바라보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징계를 당한다면 감사함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빚어지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고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잘 인내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역사 가운데 사용하시고, 징계를 잘 참는 자에게는 거룩함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고난과 징계 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낙심하기보다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염준섭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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