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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3년 학생 수양회 1강(레11:44-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김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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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37회 작성일 13-02-03 14:22

본문

13년 제주도 학생 수양회 1강
말씀 / 레위기 11:44,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낯선 레위기 말씀을 1강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가진 분이 있으십니까? 레위기는 율법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중요했습니다. 율법에 구원의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의 새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로 인해 신약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 길이 나면 옛 길은 폐쇄됩니다.
  예전에 눈이 내리기만 하면 단골로 등장하던 뉴스가 대관령길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옛 길은 대관령을 굽이굽이 넘어 다녔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갑자기 큰 폭설이 내려 대관령을 넘어 가던 차들이 발이 묶였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기름이 떨어져 추위에 떠는 사람, 길이 뚫리길 기다리다 못해 차를 버리고 걸어서 내려오는 사람 등이 속출했습니다. 그런데 대관령에 터널을 여섯 개나 뚫어 새 길을 내었습니다. 이로써 대관령을 오르던 옛 영동고속도로는 폐쇄되었습니다. 눈이 와도 대관령 길이 더 이상 뉴스에 등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길이 바뀐 것이지 강릉으로 가는 목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옛 길로 어렵게 가는 곳도 강릉이고, 새 길로 쉽게 가는 곳도 강릉입니다.
  우리는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구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최종적인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먼 훗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까? 어떤 이상한 곳에서는 ‘구원 받아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고,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마음대로 범해도 괜찮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맞나요? 맞지 않다면 왜 맞지 않나요?
  이를 알려면 구약으로 돌아가서 근본정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기독교)의 사상, 근본정신은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는 레위기가 중요합니다. ‘율법은 구원 받아 어디에 이르려 했는가?’ 답이 율법서인 레위기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려 구원의 방법은 달라졌지만 구원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 목표가 분명해집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어디에 이르러야 하는가?’ 그 근본정신이 확고해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학생 리더, 형제자매님들 중에 대다수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마음이 뜨거운 분들일 것입니다. 또 구원을 소망하며 지금 막 그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구원 받은 학생 리더들이 믿음의 방향을 분명하게 세우는, 또 구원을 소망하는 형제자매님들이 더욱 구원을 갈망하는 말씀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거룩하라











   
성화

  정화



거룩


정함

부정



속화 


더럽힘 




하나님
속성
세상
속성











  레위기의 요절은 11:45절이고, 한마디로 정리하면 ‘거룩하라’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거룩’이 무엇일까요? ‘일상(common, 세속)적인 용도로부터 구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거룩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이라는 단어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표에서 보듯이 거룩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흠없음)하십니다. 그래서 거룩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은 아름답습니다.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은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신비감,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기품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두고 거룩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거룩성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에게 내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항상 머물러 계시고,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흠 없는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 더러운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 되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해져 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수준 높은 인격성을 꼽으라면 바로 거룩입니다. 세상의 불순물이 없는 상태, 그러면서도 완벽하고 온전한 상태가 바로 거룩입니다. 과연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겠지만 거룩은 바로 그러한 경지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순수하고 열정과 꿈을 품고 있는 시기입니다. 나에 대해, 나의 삶에 대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모습, 곧 거룩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고 그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래서 장차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신비로움이 나타나는 수준 높은 품성을 지닌 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왜 거룩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거룩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요절인 11:4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그들은 삼개월 전만 해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나온 것, 해방된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왜 구원하셨습니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이스라엘 편에서 표현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받으면 소속이 변합니다. 이전에는 애굽의 바로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바뀐 소속의 분위기, 문화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속했으니 하나님 안의 분위기를 따라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 백성다워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정리 해봅시다. 구원 받은 사람은 외적으로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내적으로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거룩은 함께 갑니다. 겉과 속을 분리할 수 없듯이, 마음과 몸을 분리할 수 없듯이 하나님 백성과 거룩은 나눌 수 없습니다. 동일한 본질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나안 땅,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 백성인데 거룩하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애굽에서 하던 대로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어디에 소속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군대에서는 매와 벌이 있고, 회사에서는 쫓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속이 된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애굽에서 나왔으니 곧바로 애굽의 문화와 습관을 버렸을까요? 하나님의 소속이 되었으니 거룩해졌을까요? 12월 말에 3세계 선교사 한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5년간 선교했는데, 그 나라와 사람들에 대해 적지 않게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곳에서 20년간 빈민 선교를 한 어떤 분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20년 동안 사역했는데 아직까지도 믿을 만한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거짓, 불신, 거지 근성이 팽배하기 때문이랍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는 10대 미혼모가 널려 있고, 몇 가문들만 부를 독식해서 호의호식하고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기회만 되면 이 나라를 떠나려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수록 이 나라가 앞으로 좋아질 기대와 소망을 갖기가 너무 어렵답니다. 독립한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이러한데,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홍해를 건넌 기쁨도 잠시 조금 가다가 길이 험하다고 원망 불평, 목마르다고 원망 불평, 배고프다고 원망 불평, 고기 못 먹는다고 원망 불평,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으니 싫증이 난다고 원망 불평, 끝이 없었습니다. 틈난 나면 ‘애굽에서 나온 것이 후회된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인도했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38번 노래를 불렀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는 너무 힘들어 이런 삶에서 해방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애굽에서 나가기만 하면 새 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나왔지 마음은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고대 영화를 보면, 종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온갖 악을 대행하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은 사납고, 무자비하고, 포악합니다. 또 종은 절제가 없고, 규범도 없습니다. 왜냐면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가 없고,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면 육신적이 되고, 탐욕적이 됩니다. 고대의 내시들이 음흉하고 재산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도 삶의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랍니다. 이러한 종의 모습이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노예 백성, 거지 백성, 천박한 백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시내산으로 데려 오십니다. 갓 구원 받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계명과 규례를 주십니다. 레위기는 여기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레위기에는 주옥과 같은 계명들이 나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의 규례는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신비롭고 고상한 도덕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도록 도와 가십니다. 더러운 그들을 정결한 사람으로, 정결한 그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일용할양식이었습니다. 날마다 쓸 양식만을 거두게 하셔서 노예 생활에서 몸에 밴 불신, 탐욕, 이기심, 무절제를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날 필요한 것만 거두도록, 안식일을 지키도록, 서로 돌아보도록 도우십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품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윤리와 절제와 신앙을 가진 민족이 됩니다. 애굽의 종들이 세계에 대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하나님 백성의 품격입니다. 거룩 없는 하나님 백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달랑 내놓고는 ‘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구원 받아 천국 가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천박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왜 구원하셨는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려고 구원하셨습니다. 거룩함을 향해 행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거룩함을 향해 올라가는 하나님 백성들. 거룩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높은 품격이라고 한다면 거룩한 하나님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높은 품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거룩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종들이 세상에서 가장 품격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만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품격있는 하나님 백성들로 빚고자 하신 것입니다. 품격있는 인생, 품격있는 삶, 품격있는 행동, 품격있는 인격, 품격있는 개성, 품격있는 생각으로 우리를 높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는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범생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사회 문제에 휩쓸리면서 분노, 혈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술에 파묻혔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개차반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밤새 전봇대 밑에서 자다가 새벽녁에 깨어났습니다. 가방은 풀어 헤쳐져 사방에 널려 있었고, 군데군데 찢어진 옷은 더러웠습니다. 얼굴은 누구에겐가 맞아서 광대뼈가 부어있었습니다. 제 모습은 미쳐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버스를 타고 돌아 오는데 빙빙 도는 것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누워 있으면서 저는 어둠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저는 어느 덧 교수님들도 부담스러워하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자포자기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접고 낙향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를 쫓아다니던 목자님은 제게 ‘방향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나는 모든 것이 다 꼬여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다’라고 했지만 목자님은 ‘방향을 잘 잡으면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은사들이 잘못 쓰여져서 이렇게 된 것이니 방향만 돌이키면 된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돌이켜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게로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뜬 구름 잡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해 깊이 절망했기에 성경 공부는 꾸준히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제가 품격있는 학생으로 회복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3학년 2학기 기말시험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몇 장에 걸쳐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지도 교수님이 옆으로 쓱 오더니 끝나고 함께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한때 거침없이 밀어 붙이는 저로 인해 아주 곤란을 겪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식사하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떻게 그렇게 변하게 되었나?” 당시 저는 말씀이 충만했기 때문에 거침없이 구원의 은혜와 복음 진리를 전했습니다. 교수님은 ‘나는 불교 신자네’라고 하면서 방어막을 쳤지만 진지하게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선교사로 간 강바나바 선교사는 하숙방에서 하숙생들과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낮시간은 잠을 잤습니다. 그는 자다 일어나서 부시시하게 왔기 때문에 볼 때마다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도 나는 못난이, 나는 바보라고 자학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루하루가 너무 깝~깝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뭘 했는지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아침 먹고 잤습니다. 11시에 수업에 들어갔다가 점심 먹고 돌아와 또 잤습니다. 저녁에 일어나 밥 먹고 또 잤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니 나도 깝~깝하다.’ 그는 더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도 말씀을 공부하고 장막 생활을 하면서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좋은 점이 살아났습니다. 특히 연약한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잘 붙들어 주었습니다. 또 축구를 하면서는 강력한 오른발 슛팅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그가 누워 지내던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처음으로 들어가 사업을 하는 한국인입니다. 마케도니아에 라면을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맨땅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이제는 상당한 기반을 놓았습니다. 마케도니아 현지인들이, 또 우리 선교사님들이 그를 좋아합니다. 그는 참 좋은 선교사입니다. 그는 매우 부지런히 제게 스카이프로 성경공부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제가 게으르고 힘들어 하기 때문에 하다가 중단되고 하다가 중단되길 반복합니다. 폐인 같은 한 사람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구원, 거룩입니다.
  귀하신 여러분, 꼭 구원 받아 하나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하십시오. 여러분이 거룩해지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멋진 분들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은 값진 인생이 됩니다. 오늘 새벽 강의를 하신 안요셉 선교사님은 제가 학생 시절에 흠모하던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멋지게 살고 계시는 것을 오늘 아침에 확인했습니다. 더러워져서 개차반 같이 살았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다면, 우리의 미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멋지게 살아 봅시다. 

  어디에서 거룩해야 하는가
  ‘너희는 거룩하라’고 하면 이런 오해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이슬만 먹으면서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우리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왠지 거룩은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11장을 살펴 보십시다. 11장이 무엇에 대한 말씀입니까? 1-43절까지 계속해서 음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를 알려 주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나서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땅에 기는 길짐승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 부정한 것을 먹어 자신을 더럽히면 거룩함에서 멀어집니다. 이렇게 먹거리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해라’, ‘제사할 때 거룩해라’고 하면 거룩이라는 말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으로 거룩해라’고 하면 왠지 어색하게 들립니다. 성전, 제사, 거룩은 어울립니다. 그러나 음식, 깨끗함, 거룩은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먹는 것을 통해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먹어야 거룩하게 먹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는 음식으로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 삶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곳, 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곳이 거룩해야 합니다. 먹는 것은 삶의 가장 기초 본능입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가 채워지면 입는 것, 사는 것, 자녀를 낳는 것, 좀 더 나가면 명예, 자기실현 등의 욕구가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을 절제하고, 먹는 것에서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다른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개를 조련할 때도 먹을 것을 주면서 조련하지만 조련의 마지막 단계는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구별하게 합니다. 그것을 마치면 실전에 투입된다고 합니다. 만일 먹는 것을 가리지 못하면, 즉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그 개가 아무리 훌륭한 품종이라도 똥개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맹도견이 맹인을 인도하다가 족발집으로 달려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전에서 거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사할 때 거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서는 누구나 다 조심하고, 절제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성전에 머무는 것은 잠깐이요 대부분의 시간은 먹을 것을 찾고, 먹을 것을 위해 삽니다. 그곳이, 그 시간이 거룩할 때 거룩은 진정한 가치를 발합니다. 내 생활의 가장 기초, 생활의 밑바닥이 어떤 모습인가? 학교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집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혼자 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인가? 그 모습이 진짜 내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적당히 눈 가리고 살려 하고, 본성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다른 모습으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 모습은 거짓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을, 그 시간들을 부정한 것으로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될 때 그곳이 거룩해집니다. 그럴 때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겠습니까?
  저희 센터에 한 학사 목자는 약점이 많지만 진실하고 강직한 분입니다. 그는 직장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항상 진실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것을 결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직장에 들어가면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한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며 해외지사를 견학하는데, 가는 곳마다 책임자가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그가 적당히 한잔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또 거절하더라도 적당히 건강문제로 둘러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이 곧대로 ‘나는 신앙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라고 거절했습니다. 때로는 바닥에다 부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한 상관은 화가 나서 ‘너 앞으로 두고 보자. 나에게 찍히고 살아 남나 봐라’면서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진실하게 말하고, 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주위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신뢰를 했습니다. 한번은 상무가 퇴직하고 나서 회사를 차렸습니다. 상무는 해외출장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돈과 통장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상무는 이 학사에게 전화를 해서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센터에서 한 사람이 가게 되었는데, 그는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았고,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도 다룰 줄 몰랐습니다. 상무는 ‘도대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그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무는 ‘뽑을만한 꼬투리가 하나도 없지만 OOO씨가 소개했기 때문에 믿고 뽑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번은 중국 지사를 책임진 이사가 마음이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이 학사에게 연락을 해서 스카이프로 성경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 과장이 참 신자인 것은 내가 안다. 신 과장에게 신앙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평소 삶이 거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또 삶이 거룩할 때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백성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미칩니다. 여러분들의 센터에서 열매가 많은 분을 보면 삶에서 좋은 향기를 발하는 분들일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학과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분들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왜 음식을 통해 거룩하도록 하셨는지 납득하시죠? 레위기가 참 좋죠? 이러한 정결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승되고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해집니다.

  어떻게 거룩해 지는가
  우리는 번번이 죄에 넘어지고, 더러워집니다. 나는 거룩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허물과 실수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종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럼 포기해야 할까요? 버려져야 할까요? 이스라엘은, 또 우리는 한번에 당장 거룩해지지 못합니다. 거룩함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해 갈뿐입니다. 즉 빚어져 갑니다. 그러면 당장 나의 더러움은 어떻게 하죠? 어떻게 거룩함을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레위기에 제사가 나옵니다. 제사는 더러움을 씻고, 죄를 사함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에는 속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듭 말씀드려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이 구약의 제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사를 살펴보는 이유는 제사 안에 정신,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중요한가를 제사의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제사법은 레위기 1장에 나옵니다. 제사 중에서 짐승(소, 양)을 제물로 드려 죄를 속하는 제사가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입니다. 이 네 제사는 속죄를 기본하고 있기 때문에 네 제사에는 공통된 부분이 있습니다. 공통된 부분을 제사 드리는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첫째, 안수. 제사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그는 제물인 소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는 제사장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안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신’의 의미입니다. 본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안수함으로써 소가 나를 대신합니다. 그래서 내용상으로 소와 내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소=나’입니다. 둘째는 ‘전가’의 의미입니다. 내 죄를 소에게 얹는 절차가 안수입니다. 소가 내 죄를 짊어지고 제물이 되어 죽습니다. 그래서 제사하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가 희생됨으로 나는 죄 용서를 받고 깨끗해집니다. 이를 ‘정화’(淨化)라고 하는데, 정화를 거치면 부정한 사람이 정한 사람이 되고, 다시 정한 사람이 거룩함에 이릅니다. ‘대신’과 ‘전가’는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는데 내 대신 죽으셨고,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은 곧 내가 십자가에 달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갈2:20).
  둘째, 잡으라. 안수를 마치면 소를 잡습니다. 누가 잡습니까? 제사하는 사람이 잡습니다. 레위기는 소를 잡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당연히 소를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직접 소를 잡지 않기 때문에 그 과정을 생생하게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현장에서 직접 보듯이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를 알려면 제사를 드리는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제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잔인하다’, 혹은 ‘야만적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잔인하더라도 들으셔야 합니다. 오히려 잔인함에 치를 떨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대신 제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한 과정인가를 충분히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제물이 된다는 것,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소는 자기 죽을 때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는 겁이 많습니다. 주위 상황에 민감합니다. 죽기 전, 겁을 잔뜩 먹은 소의 큰 눈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는 모습을 그렇게 말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돼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개는 몸을 땅에 붙이고 부들부들 떱니다. 그런 소를 끌고 와서 날카로운 칼로 소의 목을 푹 찔러 목 동맥을 찾아 자릅니다. 그러면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그 피를 그릇으로 받습니다.(피를 다 뽑아 내는 것이 중요함 - 피채 먹지 않기 위해, 고기를 제사장이나 백성들이 먹기 때문). 이때 식도와 기도를 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지 않고 발버둥을 치면서 숨을 거칠게 쉴 때마다 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옵니다. 소는 그렇게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립니다. 그러다가 점점 발버둥이 잦아들고,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소의 심장이 멈추면서 목에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잡으라’입니다.
  셋째, 피를 뿌리라. 피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피 뿌림은 생명이 희생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본래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피를 뿌렸습니다. 피로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깼습니다. 그럼 피로 맺었기에 내 생명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 언약 파기에 대한 속죄 제사임으로 다시 피를 뿌립니다. 내 대신 다른 생명을 희생해서 용서를 받고, 다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뿌림은 용서의 피뿌림이며, 다시 언약을 맺는 피뿌림입니다. 누가 피를 뿌립니까? 제사장이 피를 뿌립니다. 제사장이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증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피뿌림은 주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로 연결됩니다. 주님이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 받습니다. 주님의 피로 씻음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자녀로 회복됩니다. 주님의 피, 곧 주님의 생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나는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주님의 피를 새언약의 피라 일컫습니다.
  넷째, 각을 뜨라. 각을 뜨는 것은 머리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을 분리해 내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하면 갈기갈기 찢는 것이 각을 뜨는 것입니다. 태우기 위해 일정한 조각으로 찢고(번제), 제사장에게 주려고 부위별로 찢고(속죄제), 많은 사람과 나눠 먹기 위해 조각조각 찢습니다(화목제). 그렇게 해서 번제는 고기까지 다 태우고,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는 내장과 기름을 태웁니다. 이렇게 각을 뜨는 일을 누가 합니까? 누가 소를 잡고, 누가 각을 뜹니까?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제사장에게 소를 넘기면 제사장이 해줍니까?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소를 잡고, 각을 뜹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중에는 심약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았겠지만 그래도 그가 주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제사하는 사람에게 소를 잡고, 각을 뜨라고 하셨을까요? 이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함으로써 소가 당하는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직접 보고, 겪게 하십니다. 자기 손으로 안수를 하고, 목을 찌르고,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살을 도려내는 그 끔찍하고 처참한 일을 직접 하게 하십니다. 소를 갈기갈기 찢어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여기에 ‘대신’과 ‘전가’가 있습니다. 내 대신 소가 죽어간 것이고, 내 죄로 인해 소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죄가 이처럼 무섭다’, ‘죄의 형벌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내가 이런 고통과 두려운 일을 겪어야 하는구나. 갈기갈기 찢어져야 하는구나.” 제사는 시청각 교육이며, 몸으로 체험하는 교육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제사에 대해 ‘제물을 희생해서 내 죄를 대속한다’는 큰 개념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소고삐 제사장에게 넘겨주었으니 내 할 일 다 했다’가 아닙니다. ‘소 한 마리 바쳤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일은 직접 소의 피를 뒤집어쓰고, 소의 살을 찢는 그 과정입니다. 그것을 해야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죽음의 과정, 그 고통의 과정, 그 처참하고 안타까운 과정을 거쳐서 내 죄가 속(용서)해 지는 것입니다. 죄가 진정 그렇게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냐고 반문하시겠습니까? 한번 소 잡아 볼까요?
  제가 섬겼던 한 형제는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버지가 외도를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죄를 용서하지 못해 화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죽어가는 자리에서 자식들은 아버지를 위협하며 말합니다. “어머니를 살려내. 어머니가 죽으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죽여 버리겠어.” 그 형제는 험악해진 형들을 말리며 울었습니다. 그의 마음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아버지 자신도, 부인도, 자식들도 죽음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자 흉내 내는 샘치고 친구들과 함께 태백 카지노로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달 만에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카지노에서 준 차비로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 아니라 카지노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사람들이 희귀한 인생, 희귀한 분들입니까? 어느 덧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하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의 실수로 삶이 파탄나 본인도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주위 사람도 죽음의 고통을 맛봅니다. 그 심령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인생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연예인은 영화감독으로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도 뒤로 몰래 카지노를 하고, 어두운 짓을 하다가 채권자들에게 쫓겨 다니고, 사원들에게 고소당하고, 집은 경매 당했습니다. 얼마전 까지 재판에 불려가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최근 인사 청문회에서도 인생의 허물로 갈기갈기 찢어지잖습니까? 왜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지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장차 인사 청문회 자리에 가시는 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흠이 없으면 더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더러우면 국가적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한번 시원한 음료수 마시는 정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어느 덧 우리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영화에서 그런 사람을 멋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왜 세상에서 인기 있고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술에 절어 살아야 하는지, 마약에 손을 대는지, 이혼 삼혼을 하는지, 자살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져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의 고통입니다. 죄의 삯도 죽음의 고통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편히 살지 못합니다. 노이로제, 강박관념,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도 많은 경우 죄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일생 즐겁지 못합니다. 역으로 일생 고통당합니다.
  그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을 처절하게 느끼는 자리가 바로 제사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짐승의 울부짖음이 있고,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처절하고 처참한 제사입니다. 우리는 먼저 죄의 고통, 죄의 대가에 대해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제물을 잡는 과정입니다. 처절하고, 처참한 죽음의 현장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고통으로 울부짖으셨습니다. 그 몸이 질그릇 조각같이 찢어지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죄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가 속죄 받았습니다. 깨끗해졌습니다.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으로 계속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넘어지지만 그래도 또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된 것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대속을 받으니 대속을 쉽게 여깁니다. 우리가 소를 직접 잡아 대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대속이 얼마나 어렵게 얻은 대속인가를 몸으로 체험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한 것이 없이 대속을 받으니 구원을 함부로 여겨요.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해요. 그리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무지하고, 미련하게 행동하기 쉬워요.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건 데 죄를 무겁고, 무섭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내가 거룩해진 것이 처절한 십자가, 피가 튀기고, 살점이 도려지고, 처절한 고통과 울부짖음이 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되는 과정은 처참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속죄 받았고, 우리가 구원 받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거룩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반면에 죄가 얼마나 무섭고, 악하고, 두려운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 우리의 주님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김엘리야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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