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3년 일양특강(시1:1-6)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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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일용할 양식 교육 특강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늘 말씀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면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고 의인이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악인이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아무 열매도 없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합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번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인생에서 행복만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잡히지 않는 것도, 복잡한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건강, 아름다운 외모, 이상적인 결혼, 자녀, 안락한 가정, 성공, 인기, 물질적 부요, 좋은 학점, 안정된 직장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얻은 사람이 행복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입니까? 시편 1편과 시편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1a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합니다. 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보다 먼저 그의 존재 자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이란 최상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복의 의미는 우선 3절 말씀에 나오는 나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생각해 보면 먼저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생명력이 왕성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나무는 생명이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겨는 죽은 것입니다. 겨는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겨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날립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열매도 없는, 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땔감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나무는 계절을 좇아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또 복이 있다는 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서 바로 연상이 되는 것처럼 “영구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잎사귀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물이 넉넉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행복한 나무는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냇물에 뿌리를 담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개수로에서 항상 풍족한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잎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겨는 시들어 바람에 날립니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립니다. 정함이 없습니다.
또 복이 있다는 것은 “존재 의미”를 특징으로 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성취하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겨가 아무 쓸모없다는 것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즉 “끝나고,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 입니다. 겨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악인의 길도 사라집니다. 열매를 맺는 의인의 길과 대조적으로 악인의 길은 열매가 없는 무익한 삶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헛수고로 돌아갈 뿐입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 10:28).” 신명기 28:1-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는 것은 위로 덮친다는 뜻입니다. 이른다는 것은 끝까지 따라와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형통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과 복을 쏟아부어주십니다. 복이 끝까지 그를 따라와 붙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형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도 물론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번에 온두라스의 강다윗 선교사님이 노상에서 총격을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가족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영적으로 더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거룩한 삶은 행복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한 마디로 “거룩”입니다. 시편에 의하면 거룩한 삶은 행복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사는 소박한 삶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세상 죄악을 본 받지 아니하고, 구별된 생활을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과 반대편에 선 사람으로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나누었습니다.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점층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악인들은 절대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꾀가 많습니다. 이들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거짓과 배신을 밥 먹듯이 합니다. 진리가 그 마음에 없으니 잘 속입니다. 어떤 면에서 악인의 꾀가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를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도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가 일시적으로 자기를 흥하게 하나 필경은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악인의 꾀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악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견실치 못한 사람이라면, 죄인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빗나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동에 발을 맞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를 넘어서 조소하는 단계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결국은 우준하게 되어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롬1:22,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겸손히 다만 그를 섬깁니다.
셋째, 말씀 묵상은 어떻게 하는가? 2절을 보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교훈과 인생이 마땅히 따라야 할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일생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며 탐구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시편 119편은 말씀에 대해서만 길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의 뜻을 되새기며,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법을 ‘말씀의 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개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쥐듯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말씀을 섭취합니다. 듣기, 읽기, 공부, 암송 그리고 묵상입니다.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묵상인데 가장 중요합니다.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성경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처럼 들을 때도 묵상, 읽을 때도 묵상, 공부할 때도 묵상, 암송할 때도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기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듣고 관찰하고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옵니다. 묵상하는 것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반복하여 명상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을 밝혀 주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올빼미 타입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종달새 타입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어제 하루를 반성하며, 세상 죄악에 물든 마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찬 새 날을 계획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그 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친밀함입니다. 묵상은 우리의 속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부정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충만하게 되어 모든 관계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하면 말씀에 순종하고 삶에 변화가 생기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삶 속에 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껏 당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묵상이 없으면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기 어렵습니다. 묵상을 해도 깊이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깊은 묵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회개하고 나를 사랑하여 구원하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가장 먼저 주신 훈련이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끌어내어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후에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신 8:3).”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 때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말씀이 필요 없었습니다. 빵만 있으면 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된 그들에게는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게 하시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준행하는 생활을 가르치셨습니다(출16:4). 또 신명기 6:6-9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손목에 메고 미간에 붙이고, 온 집안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모든 삶이 말씀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며 일용할 영의 양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도 생명의 말씀에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지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합니다.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형통한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이 그 마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풍성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요14:21절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넷째, 악인의 멸망(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기자는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자기 꾀를 좇아 삽니다. 이들은 말씀을 들어도 교회 밖을 나가면서 잊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그 마음에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에 게임에 대한 생각, 정욕적인 생각, 각종 염려,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온갖 범죄를 일삼습니다. 또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건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또 이들은 일시적으로 부요하게 되어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를 가려내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인사 청문회를 보면 일생에 악인의 꾀를 따르다가 말년에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며, 때를 따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늘 말씀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면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고 의인이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악인이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아무 열매도 없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합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번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인생에서 행복만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잡히지 않는 것도, 복잡한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건강, 아름다운 외모, 이상적인 결혼, 자녀, 안락한 가정, 성공, 인기, 물질적 부요, 좋은 학점, 안정된 직장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얻은 사람이 행복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입니까? 시편 1편과 시편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1a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합니다. 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보다 먼저 그의 존재 자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이란 최상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복의 의미는 우선 3절 말씀에 나오는 나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생각해 보면 먼저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생명력이 왕성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나무는 생명이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겨는 죽은 것입니다. 겨는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겨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날립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열매도 없는, 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땔감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나무는 계절을 좇아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또 복이 있다는 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서 바로 연상이 되는 것처럼 “영구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잎사귀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물이 넉넉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행복한 나무는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냇물에 뿌리를 담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개수로에서 항상 풍족한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잎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겨는 시들어 바람에 날립니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립니다. 정함이 없습니다.
또 복이 있다는 것은 “존재 의미”를 특징으로 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성취하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겨가 아무 쓸모없다는 것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즉 “끝나고,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 입니다. 겨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악인의 길도 사라집니다. 열매를 맺는 의인의 길과 대조적으로 악인의 길은 열매가 없는 무익한 삶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헛수고로 돌아갈 뿐입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 10:28).” 신명기 28:1-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는 것은 위로 덮친다는 뜻입니다. 이른다는 것은 끝까지 따라와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형통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과 복을 쏟아부어주십니다. 복이 끝까지 그를 따라와 붙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형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도 물론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번에 온두라스의 강다윗 선교사님이 노상에서 총격을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가족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영적으로 더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거룩한 삶은 행복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한 마디로 “거룩”입니다. 시편에 의하면 거룩한 삶은 행복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사는 소박한 삶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세상 죄악을 본 받지 아니하고, 구별된 생활을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과 반대편에 선 사람으로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나누었습니다.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점층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악인들은 절대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꾀가 많습니다. 이들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거짓과 배신을 밥 먹듯이 합니다. 진리가 그 마음에 없으니 잘 속입니다. 어떤 면에서 악인의 꾀가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를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도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가 일시적으로 자기를 흥하게 하나 필경은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악인의 꾀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악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견실치 못한 사람이라면, 죄인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빗나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동에 발을 맞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를 넘어서 조소하는 단계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결국은 우준하게 되어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롬1:22,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겸손히 다만 그를 섬깁니다.
셋째, 말씀 묵상은 어떻게 하는가? 2절을 보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교훈과 인생이 마땅히 따라야 할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일생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며 탐구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시편 119편은 말씀에 대해서만 길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의 뜻을 되새기며,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법을 ‘말씀의 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개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쥐듯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말씀을 섭취합니다. 듣기, 읽기, 공부, 암송 그리고 묵상입니다.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묵상인데 가장 중요합니다.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성경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처럼 들을 때도 묵상, 읽을 때도 묵상, 공부할 때도 묵상, 암송할 때도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기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듣고 관찰하고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옵니다. 묵상하는 것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반복하여 명상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을 밝혀 주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올빼미 타입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종달새 타입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어제 하루를 반성하며, 세상 죄악에 물든 마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찬 새 날을 계획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그 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친밀함입니다. 묵상은 우리의 속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부정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충만하게 되어 모든 관계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하면 말씀에 순종하고 삶에 변화가 생기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삶 속에 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껏 당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묵상이 없으면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기 어렵습니다. 묵상을 해도 깊이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깊은 묵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회개하고 나를 사랑하여 구원하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가장 먼저 주신 훈련이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끌어내어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후에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신 8:3).”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 때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말씀이 필요 없었습니다. 빵만 있으면 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된 그들에게는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게 하시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준행하는 생활을 가르치셨습니다(출16:4). 또 신명기 6:6-9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손목에 메고 미간에 붙이고, 온 집안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모든 삶이 말씀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며 일용할 영의 양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도 생명의 말씀에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지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합니다.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형통한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이 그 마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풍성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요14:21절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넷째, 악인의 멸망(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기자는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자기 꾀를 좇아 삽니다. 이들은 말씀을 들어도 교회 밖을 나가면서 잊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그 마음에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에 게임에 대한 생각, 정욕적인 생각, 각종 염려,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온갖 범죄를 일삼습니다. 또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건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또 이들은 일시적으로 부요하게 되어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를 가려내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인사 청문회를 보면 일생에 악인의 꾀를 따르다가 말년에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며, 때를 따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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