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3년 겨울 로마서 13강(10:1-21)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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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로마서 13 강
말씀 | 로마서 10:1-21
요절 | 로마서 10:17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찬양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할 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과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바로 잡고 말씀 공부를 경외심을 가지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말씀(1-13) : 바울은 9장에 이어 10장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은 그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밝히셨지만 신성모독이라며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 사랑과 의로운 삶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시기하고 핍박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를 쌓고자 했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도 일생 높은 기둥 위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인도에서 사는 어떤 수도자는 못 침대 위에서 잠으로 의를 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염되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공부했지만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듣고 배운 지식이 많지만 그것을 하나로 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을 때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 또는 왕국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실 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UBF 생활 10년 정도 하면 말씀을 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항상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경험한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합니다.
열심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열정이 없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지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크리스천들을 찾아다니며 핍박하였습니다. 우리도 자기 영광을 위한 열심, 경쟁심에 기초한 열심,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은 열매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열심을 축복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열심히 수고해도 깨어진 바가지에 물을 담는 것 같이 헛되어 새어나갑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매순간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살아계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할 때 몰랐던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요 모든 믿는 자에게 제공되는 의라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예수님은 제사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태어나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 즉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심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할 것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자는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5). 이 말씀은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대로 행한다면 산다는 것인데 문제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것 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그를 믿으면 구원(의)에 이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의를 믿고 영접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완벽한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부터의 의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 무저쟁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복음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영접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입에,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면 사람이 어떻게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은 지정의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단순하게 지적인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보다 더 깊고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행위는 마음이 없어도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은 형식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으로 믿는 것은 주님께 마음을 드리는 헌신의 의미요,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어 드리는 결단의 표시요 또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지적인 차원을 넘어 삶을 통해서 고백되어야 합니다. 상황이 좋을 때나, 믿음의 가족 앞에서 고백할 뿐 아니라 원수 앞에서, 핍박자들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핍박이 두려워 두더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내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신자라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당시는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시대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무신론자요 반역자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믿음이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믿음은 고백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오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불신이 떠나가고 용기와 담대함이 생깁니다. 핍박과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할 때 신앙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삶이 새로워집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이며,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둘째,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14-21) : 후 반부는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는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파해야 할까요? 말로 전하고 사랑의 섬김으로 전해야 합니다. 신년 메시지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해야 합니다. 효과적으로 전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련한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되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전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 있어야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알곡을 거두려면 씨를 뿌리는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8절에서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우리를 참여자로 부르셨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귀한 역사에 우리가 직접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듯이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해산의 수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십자가이지만 은혜요, 축복입니다.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전도를 통해서 영적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 전도자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죄 지으러 가는 발들은 부끄러운 발이지만 복음 전하러 가는 발은 너무나 아름다운 발입니다. 우리 목자님들, 선교사님들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측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 측면에서는 생사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특효약을 가지고 있다면 나만 가지고 있어서야 쓰겠습니까? 나도 그 약을 소개 받아서 효험을 받았다면 우리도 이제 그 약을 소개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언과 같은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야 합니다. 가서 만나야 합니다. 가서 전하는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에서 권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책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책을 전해주었습니다. 죠지 휫필드는 일주일 40시간-60시간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56세까지 살았는데 마지막 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미국에서 애즈베리 선교사와 감리교 전도자들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니지 않아도, 까마귀도 너무 추워 움직이지 않는데 그들만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이런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도 있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도 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우리에게로 이끄시고 또 보내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시사적인 이야기나 주변 이야기를 하기보다 한 말씀을 꼭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총알 전도라고 부릅니다.
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까?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닌다고 믿음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믿음은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고행을 많이 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찬송을 많이 하면 믿음이 생길까요? 기도를 많이 하면 믿음이 생길까요? 믿음은 메시지를 들을 때 생깁니다. 들어야 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마음으로 깨달을 때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보냄 받은 예수님이 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길 가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 복음을 전파할 목자, 선교사 양성을 3년 동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라 칭하시고 그들을 보내사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전도를 통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명했습니다. 말씀 전파는 신자로서의 의무요 특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 전파가 중지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단체나 교회나 국가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축복의 촛대를 옮기십니다. 이스라엘이 복음 전파의 사명에 순종하지 않자 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영접하고 또 전파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복음 전파의 주체 세력이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그를 찾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캠퍼스에 나가 전도할 때 복음을 배척하는 자도 있지만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가르쳐 주는 자가 없어 듣지 못하고 갈급한 자도 있습니다. 때로 양들이 스스로 자기 발로 찾아와 말씀 공부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목자들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자들로서 빛을 가지고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슬러 말하는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종일 손을 벌리며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놀랍습니다.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를 소망 없다고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지난 주에 한양 센터의 김모세 목자님 부친의 장례식에 같습니다. 김모세 목자님은 아버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깨닫고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었고 학생 시절에는 저의 스승이었고 제가 목자가 되었을 때는 저의 지원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상처를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도 믿고 싶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짐바브웨에서 귀국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아들이 복음을 전한지 30년 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을 갖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써서 아름다운 발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공부하고 묵상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10:1-21
요절 | 로마서 10:17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찬양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할 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과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바로 잡고 말씀 공부를 경외심을 가지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말씀(1-13) : 바울은 9장에 이어 10장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은 그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밝히셨지만 신성모독이라며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 사랑과 의로운 삶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시기하고 핍박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를 쌓고자 했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도 일생 높은 기둥 위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인도에서 사는 어떤 수도자는 못 침대 위에서 잠으로 의를 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염되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공부했지만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듣고 배운 지식이 많지만 그것을 하나로 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을 때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 또는 왕국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실 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UBF 생활 10년 정도 하면 말씀을 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항상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경험한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합니다.
열심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열정이 없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지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크리스천들을 찾아다니며 핍박하였습니다. 우리도 자기 영광을 위한 열심, 경쟁심에 기초한 열심,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은 열매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열심을 축복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열심히 수고해도 깨어진 바가지에 물을 담는 것 같이 헛되어 새어나갑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매순간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살아계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할 때 몰랐던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요 모든 믿는 자에게 제공되는 의라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예수님은 제사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태어나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 즉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심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할 것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자는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5). 이 말씀은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대로 행한다면 산다는 것인데 문제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것 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그를 믿으면 구원(의)에 이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의를 믿고 영접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완벽한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부터의 의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 무저쟁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복음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영접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입에,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면 사람이 어떻게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은 지정의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단순하게 지적인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보다 더 깊고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행위는 마음이 없어도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은 형식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으로 믿는 것은 주님께 마음을 드리는 헌신의 의미요,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어 드리는 결단의 표시요 또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지적인 차원을 넘어 삶을 통해서 고백되어야 합니다. 상황이 좋을 때나, 믿음의 가족 앞에서 고백할 뿐 아니라 원수 앞에서, 핍박자들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핍박이 두려워 두더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내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신자라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당시는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시대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무신론자요 반역자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믿음이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믿음은 고백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오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불신이 떠나가고 용기와 담대함이 생깁니다. 핍박과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할 때 신앙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삶이 새로워집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이며,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둘째,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14-21) : 후 반부는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는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파해야 할까요? 말로 전하고 사랑의 섬김으로 전해야 합니다. 신년 메시지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해야 합니다. 효과적으로 전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련한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되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전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 있어야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알곡을 거두려면 씨를 뿌리는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8절에서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우리를 참여자로 부르셨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귀한 역사에 우리가 직접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듯이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해산의 수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십자가이지만 은혜요, 축복입니다.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전도를 통해서 영적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 전도자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죄 지으러 가는 발들은 부끄러운 발이지만 복음 전하러 가는 발은 너무나 아름다운 발입니다. 우리 목자님들, 선교사님들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측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 측면에서는 생사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특효약을 가지고 있다면 나만 가지고 있어서야 쓰겠습니까? 나도 그 약을 소개 받아서 효험을 받았다면 우리도 이제 그 약을 소개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언과 같은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야 합니다. 가서 만나야 합니다. 가서 전하는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에서 권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책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책을 전해주었습니다. 죠지 휫필드는 일주일 40시간-60시간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56세까지 살았는데 마지막 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미국에서 애즈베리 선교사와 감리교 전도자들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니지 않아도, 까마귀도 너무 추워 움직이지 않는데 그들만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이런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도 있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도 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우리에게로 이끄시고 또 보내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시사적인 이야기나 주변 이야기를 하기보다 한 말씀을 꼭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총알 전도라고 부릅니다.
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까?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닌다고 믿음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믿음은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고행을 많이 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찬송을 많이 하면 믿음이 생길까요? 기도를 많이 하면 믿음이 생길까요? 믿음은 메시지를 들을 때 생깁니다. 들어야 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마음으로 깨달을 때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보냄 받은 예수님이 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길 가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 복음을 전파할 목자, 선교사 양성을 3년 동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라 칭하시고 그들을 보내사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전도를 통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명했습니다. 말씀 전파는 신자로서의 의무요 특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 전파가 중지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단체나 교회나 국가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축복의 촛대를 옮기십니다. 이스라엘이 복음 전파의 사명에 순종하지 않자 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영접하고 또 전파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복음 전파의 주체 세력이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그를 찾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캠퍼스에 나가 전도할 때 복음을 배척하는 자도 있지만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가르쳐 주는 자가 없어 듣지 못하고 갈급한 자도 있습니다. 때로 양들이 스스로 자기 발로 찾아와 말씀 공부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목자들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자들로서 빛을 가지고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슬러 말하는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종일 손을 벌리며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놀랍습니다.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를 소망 없다고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지난 주에 한양 센터의 김모세 목자님 부친의 장례식에 같습니다. 김모세 목자님은 아버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깨닫고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었고 학생 시절에는 저의 스승이었고 제가 목자가 되었을 때는 저의 지원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상처를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도 믿고 싶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짐바브웨에서 귀국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아들이 복음을 전한지 30년 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을 갖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써서 아름다운 발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공부하고 묵상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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