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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3년 겨울 로마서 12강(9:1-33)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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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79회 작성일 13-01-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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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로마서 제 12강 
말씀 | 로마서 9:1-33
요절 | 로마서 9:16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복음을 전해도 이스라엘은 이를 배척했고 이방인들은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준비되었던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상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는 결국 긍휼에 기초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그 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모순되게 보이는 진리가 사실은 완벽하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여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바울의 고뇌와 유대인이 받은 특권(1-5) : 바울은 자기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구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볼 때 큰 근심이 되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동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의 불길 속에서 나온 불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은 모세를 통해서도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앞에 두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신이라고 절하며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이들의 죄로 인해서 멸망당하기 직전에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그렇지 않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동족에 대한 이런 끓는 듯한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그 많은 핍박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복음을 전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 앞에서 예루살람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능력이 아니라 눈물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길 때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이들을 향한 눈물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학은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25%에서 4%로 줄었습니다. 이 나라는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캠퍼스 구원, 일가친척, 동족들의 구원에 대한 상한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받은 여덟 가지 특권을 제시하면서 그 안타까움을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들이 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엘리야, 다윗, 다니엘 등 믿음의 조상들도 그들의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상하고도 완벽한 특권을 받은 민족이면서도 그 특권의 보석과 같은 그리스도를 거절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서 준비하고 교육을 받아왔는데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어둡고 황폐해졌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메시야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과 바울은 이 복음을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열렬히 환영했지만 유대인들은 배척했습니다. 소수만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난 달 27일  미국 와이오밍주 에반스턴의 철도역사에서 노숙자 티모시 헨리 그레이(60)가 저체온증으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한 노숙자의 쓸쓸한 죽음이 화제가 된 것은 그가 미국에서 록펠러에 버금가는 재력가인 위게트 클라크의 먼 손주 뻘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부호인 클라크는 약 3억 달러(약 3200억원)에 달하는 유산을 남긴 채 지난해 5월 10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리 그레이는 무려 1900만 달러(약 200억원)에 달하는 유산을 상속받을 사람이었는데 노숙자로 살다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꼭 그와 같습니다. 엄청난 특권을 받고도 이를 누리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주권(6-18) : 바울은 6절에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 복음을 배척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로 고민하다가 창세기를 연구했습니다. 거기 보니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는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가 낳은 이삭과 후처들이 낳은 여섯 아들들(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 중 이삭 외의 자녀들에게서 난 아랍인들은 수억인데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은 약 1500만 명 정도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 근거를 약속의 자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의 씨는 ‘이삭’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출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해 된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혈통과 자연 출생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에 의한 것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밝혀졌습니다. 그 이후 약 이천 년이 지난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자연 출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씀 공부와 회개를 통해 거듭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리브가가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습니다. 즉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말라기 1:3절에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도 역시 야곱과 에서가 무슨 선행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사랑스럽다는 것은 보니까 사랑스럽다는 것이고 밉상이라는 것은 보니까 밉다는 것입니다. 즉 조건을 보아서 사랑스러우니까 사랑하고 미우니까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조건도 보지 않고, 아직 출생하기도 전에,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토대는 인간의 선행과 전혀 관계없이 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대로 원하는 자를 선택하셔서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편애가 어디 있나 싶습니다. 사랑했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미워했다는 것은 너무한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태어나기도 전에,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장자를 미워했다니 말입니다. 철천지원수가 아니고야 어떻게 태어나기도 전에 미워합니까? 에서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해야 할 판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구원을, 미움은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에 하나님의 목적은 선택에 의해서 시작되는 진리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목적은 선택에 의해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선택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팥죽 한 그룻에 에서의 장자권을 산 행위를 내다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서 어차피 죽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적 주권대로 어떤 사람은 사면해서 영생의 길을 가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사망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이니까 억울하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영생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가’라며 의아해 하고 감격하고 감사할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야곱이고, 저 사람은 에서’라는 식의 판단은 금물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최후 심판 때까지는 누가 버림받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에서’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고 겸손하게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115:1).”
 
  그러면 하나님의 이런 선택이 과연 의로운 것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태도를 가지고 인간 편에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문제를 공의의 차원에서 다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잣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긍휼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서 누구를 긍휼히 여기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15).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출애굽기 33장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은 진멸하시려 합니다. 모세는 차라리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명되더라도 자기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하시면서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도중에 그들을 진멸하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저보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함께 갈 자를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친히 함께 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를 편하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자신이 지나갈 때에 그를 덮었다가 등만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면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자기 백성을 진멸하시겠다는 긴급 상황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법대로 하세요” 라고 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영접하기 위해서 세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상의 존재가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그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주권자로서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 위해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긍휼을 입은 모세와 대조되는 인물이 바로 바로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보이고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고 세우셨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던 애굽의 왕입니다. 그가 강력하게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 일어섰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우상들은 헛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모든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십니다(18). 성경은 바로 자신이 완악하게 된 책임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를 강퍅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셨으나 완악하게 하는 행위는 바로 왕 자신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에게도 그가 죄를 짓도록, 완악하게 되도록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범죄의 책임자라거나 범죄의 조장자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만 완악해지도록 허용하실 뿐입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대로 내버려두시거나, 성령의 영향을 철수하셔서 악을 억제하는 작용을 제거하심으로 완악해 지도록 허용하십니다. 모세와 바로의 경우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때에 긍휼에도 죄가 전제되고, 강퍅해지는 것도 죄가 전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도 죄가 있기 때문이고, 완악하게 하신 경우도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만사를 주권적으로 처리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을 보고 누구도 권한 남용이라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구원 받은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자유 의지나 자신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셋째, 토기장이 비유(19-33) :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대로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사람은 강퍅하게 하신 다음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면 하나님이야말로 잔인한 신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행사에 대해서 바울은 논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으로서 주제 파악을 하라고 합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인간이 하나님과 똑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조주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진흙 한 덩이로 고려청자를 만들든, 뚝배기를 만들든 토기장이의 맘입니다. 또 그가 만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부수어 버려도 토기가 따질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나를 왜 부수느냐고 따지는 것은 토기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이런 목적으로 토기장이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9장부터 11장까지 논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질문 자체를 꾸짖지 아니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휼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진흙과 달리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관용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인간 편에서 회개에 이르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벧후 3:9절에서 “주께서 너희에게 오래 참으사 너희 가운데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제에서 좀 벗어난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날 이 모양 이 꼴로 만드셨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잘 생겼더라면, 내가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내가 좀 더 유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내가 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나의 삶에 대해서 갈등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편 139:13,14절에서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빚어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을 치는데 찍은 것이 다 맞아서 전국 일등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맞은 답을 시간이 남아 다시 생각하다가 고쳤는데 틀려서 점수가 깎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이 있고, 요한의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현재의 상황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그 위에 인생의 집을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평안과 확신과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기초한 주권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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