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 10강(13,14장)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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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10 강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20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물질 문제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내적인 승리를 하고 외적인 승리를 합니다. 이는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 눈에 보이는 세력들을 대항해서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싸움을 알아보고 여기서 어떻게 승리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아브람의 내적 승리(1-13)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람은 애굽 왕에게 얻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네게브에서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 더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고자 다투면서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고갔습니다. 때로는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 싸움은 두 가축 목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아브람과 롯의 싸움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싸움은 해결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안 보거나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에서 생긴 갈등은 극복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렇게 극복되지 않은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가 깊어지고 해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 때문에 개운치 않고 찜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브람과 롯의 갈등은 바로 친족의 관계, 같이 사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갈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눈 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갈등을 해결하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문제를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찾아가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먼저 나아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네가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하지”라고 말합니다.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먼저 가서 사과합니다. 그리고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이 상하고 관계만 더 어려워집니다. 아브람은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원문에는 한 형제라고 나옵니다.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문제를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대안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갈등을 겪는 것은 땅이 비좁아서 인데 여기 앞에 땅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합니다. 아브람은 실리를 양보합니다. 자신의 실리를 아낌없이 양보하였습니다. 손해 보기로 결정하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 볼 줄도 알게 되고 포기할 줄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생깁니다. 자존심을 꺾기로 결정하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뺨 맞고 비난 받고 사람들의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했는데 실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아무 잘못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시련과 실패를 통해서 인생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물질보다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이 곳이든 저 곳이든 계속해서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잃더라도 사람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조카 롯과 인격적인 관계를 잘 맺고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싸워서 분열하기보다는 손해보고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포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포기하고 손해보고 자존심을 꺾는 데까지 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브람은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롯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선택 과정에서 아브람과 롯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유익을 따랐습니다. 그는 애굽에 다녀온 이후로 문화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분별하고 떠나기보다 그 지역의 도시에 머물렀습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기심에 눈이 멀고 세속에 눈이 멀어서 그 뒤에 따라올 위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한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불 심판을 당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을 합니다. 선택을 할 때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사를 가도 아이들의 학군을 생각하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하기에 편리한 곳으로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잘 섬길 수 있는 곳으로 가느냐 선택해야 합니다. 직장을 선택해도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갈 것이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으로 선택하기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택을 해야 합니까? 자기중심의 선택은 만족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또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받은 복을 남에게 다 주어버립니다. 아니면 그 많은 복들이 새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롯의 말년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브람과 롯의 인생을 보면 그 차이가 더욱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은 다 잃어버리고 부끄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아브람은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성숙해져서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자식이 없는 그는 외로웠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하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의 마음에는 손해의식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14b-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장 아브람에게 좋은 땅을 주시기보다 북남동서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실 땅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를 비전의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밟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는 그에게 그 자손을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를 위로하시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배하며 영적으로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먹고 살만한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가 롯과의 갈등 과정 속에서 더욱 물질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양보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또 하나님은 아브람의 속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자손과 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처음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서 끝까지 그 말씀을 붙잡도록 도우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그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아브람의 믿음을 키우시고 완성해 나가십니다. 아브람은 내적 승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외적 승리를 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외적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16) : 당시 국제 정세는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연합을 하고 힘이 생기면 배반하고 응징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서방 오 개국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십삼 년에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십사 년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동방 사 개국 동맹을 만들어 배반한 다섯 왕을 징벌하였습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여러 족속을 물리치고 서방 오 개국 동맹을 공격하였습니다. 결국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36계를 쳤습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습니다.
이때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렸습니다. 아브람은 롯과 헤어진 후에 사람들을 키우고 훈련하여 큰 부족을 이루었습니다. 318명의 용사가 있었으니 그들에게 딸린 가족까지 합하면 최소한 200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해 있던 아넬, 에스골, 마므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큰 부족장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롯과 헤어진 후에 그를 놀랍게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동맹한 사람들과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아브람은 롯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목자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용기와 믿음과 지혜를 주셔서 중동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 기술의 핵심은 속이는 것과 속도입니다. 아브람은 적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를 틈타 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추격하여 조카 롯과 재산을 찾아왔습니다. 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싸워야 합니다. 아브람은 물질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감당하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목자 생활을 할 때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가면 달려가서 사자의 입에서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예수님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사후 세계 보다는 현세에 대한 더 많은 관심, 신앙보다는 건강이나 현세적인 쾌락과 흥미에 관심을 집중하고 영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물량주의, 세습주의, 각종 비리들과 연결된 신자들의 모습에 대한 실망, 개인중심적인 사고 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이런 이유로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되찾아 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들을 죄와 사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는 일은 남아 있는 신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치열한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혼자서 싸우지 말고 신자들이 연합해서 싸워야 합니다. 교회, 교단 및 단체 간의 연합, 때로는 대륙적인 연합, 세계적인 연합을 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훈련받은 정병들이 필요합니다. 아브람과 같은 희생적인 사랑과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현실만 생각하면서 손을 늘어뜨리고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영감이 넘치는 음악과 섬김을 통해서 예배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 교회 모임에 학생들을 초청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탁구와 영어회화 모임에 초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바쳐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 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덧입고 이들을 주일 예배와 여름 수양회에 초청하여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아브람을 멜기세덱이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부대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은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람도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십일조는 신앙과 충성의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는 여호와의 소유로 여겨졌고(레 27:30), 구체적으로 성소를 섬기는 레위인의 생활을 위해 쓰였습니다(민 21:21).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자기가 얻은 승리를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제사장을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아브람은 물질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단계로 성숙해졌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들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동 지역의 실제적인 실력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소돔 왕이 교만하게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이는 부당한 제안입니다. 아브람이 자기 생명을 걸고 재산을 투입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들과 전리품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소돔 왕은 이에 대한 감사의 말도 없이 사람은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합니다. 소돔 왕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자선을 베푼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그와 엮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지키고자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신발끈 한 가닥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그와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을 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분명했습니다. 나중에 아브람이 소돔 왕으로 인해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들을까봐 그 꼬투리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자신에게 주심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투입해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자신을 이 일에 써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물질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초기에 신앙체험이 없어서 물질을 자기 능력으로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것을 믿고 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물질에 지배받지 않고 믿음으로 물질을 지배하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되는 자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물질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신앙 초기에 물질을 지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신자가 물질생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살지 못할 때 사실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약속하신 물질 축복을 반드시 받을 수 있습니다. 안요셉 선교사님은 장인이 준 집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리했을 때 장인에게 인정을 받고 매이지 아니하며 복음 역사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자 3층집도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진정한 승리는 남을 이기고 재물을 얻어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양보하는 삶,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여 기꺼이 자기 이익을 포기하며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삶, 이런 내적인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도전하고 때로는 물질에서 손해도 보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20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물질 문제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내적인 승리를 하고 외적인 승리를 합니다. 이는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 눈에 보이는 세력들을 대항해서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싸움을 알아보고 여기서 어떻게 승리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아브람의 내적 승리(1-13)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람은 애굽 왕에게 얻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네게브에서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 더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고자 다투면서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고갔습니다. 때로는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 싸움은 두 가축 목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아브람과 롯의 싸움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싸움은 해결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안 보거나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에서 생긴 갈등은 극복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렇게 극복되지 않은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가 깊어지고 해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 때문에 개운치 않고 찜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브람과 롯의 갈등은 바로 친족의 관계, 같이 사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갈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눈 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갈등을 해결하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문제를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찾아가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먼저 나아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네가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하지”라고 말합니다.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먼저 가서 사과합니다. 그리고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이 상하고 관계만 더 어려워집니다. 아브람은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원문에는 한 형제라고 나옵니다.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문제를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대안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갈등을 겪는 것은 땅이 비좁아서 인데 여기 앞에 땅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합니다. 아브람은 실리를 양보합니다. 자신의 실리를 아낌없이 양보하였습니다. 손해 보기로 결정하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 볼 줄도 알게 되고 포기할 줄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생깁니다. 자존심을 꺾기로 결정하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뺨 맞고 비난 받고 사람들의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했는데 실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아무 잘못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시련과 실패를 통해서 인생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물질보다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이 곳이든 저 곳이든 계속해서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잃더라도 사람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조카 롯과 인격적인 관계를 잘 맺고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싸워서 분열하기보다는 손해보고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포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포기하고 손해보고 자존심을 꺾는 데까지 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브람은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롯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선택 과정에서 아브람과 롯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유익을 따랐습니다. 그는 애굽에 다녀온 이후로 문화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분별하고 떠나기보다 그 지역의 도시에 머물렀습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기심에 눈이 멀고 세속에 눈이 멀어서 그 뒤에 따라올 위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한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불 심판을 당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을 합니다. 선택을 할 때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사를 가도 아이들의 학군을 생각하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하기에 편리한 곳으로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잘 섬길 수 있는 곳으로 가느냐 선택해야 합니다. 직장을 선택해도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갈 것이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으로 선택하기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택을 해야 합니까? 자기중심의 선택은 만족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또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받은 복을 남에게 다 주어버립니다. 아니면 그 많은 복들이 새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롯의 말년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브람과 롯의 인생을 보면 그 차이가 더욱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은 다 잃어버리고 부끄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아브람은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성숙해져서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자식이 없는 그는 외로웠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하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의 마음에는 손해의식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14b-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장 아브람에게 좋은 땅을 주시기보다 북남동서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실 땅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를 비전의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밟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는 그에게 그 자손을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를 위로하시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배하며 영적으로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먹고 살만한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가 롯과의 갈등 과정 속에서 더욱 물질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양보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또 하나님은 아브람의 속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자손과 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처음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서 끝까지 그 말씀을 붙잡도록 도우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그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아브람의 믿음을 키우시고 완성해 나가십니다. 아브람은 내적 승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외적 승리를 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외적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16) : 당시 국제 정세는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연합을 하고 힘이 생기면 배반하고 응징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서방 오 개국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십삼 년에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십사 년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동방 사 개국 동맹을 만들어 배반한 다섯 왕을 징벌하였습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여러 족속을 물리치고 서방 오 개국 동맹을 공격하였습니다. 결국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36계를 쳤습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습니다.
이때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렸습니다. 아브람은 롯과 헤어진 후에 사람들을 키우고 훈련하여 큰 부족을 이루었습니다. 318명의 용사가 있었으니 그들에게 딸린 가족까지 합하면 최소한 200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해 있던 아넬, 에스골, 마므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큰 부족장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롯과 헤어진 후에 그를 놀랍게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동맹한 사람들과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아브람은 롯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목자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용기와 믿음과 지혜를 주셔서 중동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 기술의 핵심은 속이는 것과 속도입니다. 아브람은 적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를 틈타 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추격하여 조카 롯과 재산을 찾아왔습니다. 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싸워야 합니다. 아브람은 물질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감당하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목자 생활을 할 때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가면 달려가서 사자의 입에서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예수님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사후 세계 보다는 현세에 대한 더 많은 관심, 신앙보다는 건강이나 현세적인 쾌락과 흥미에 관심을 집중하고 영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물량주의, 세습주의, 각종 비리들과 연결된 신자들의 모습에 대한 실망, 개인중심적인 사고 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이런 이유로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되찾아 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들을 죄와 사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는 일은 남아 있는 신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치열한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혼자서 싸우지 말고 신자들이 연합해서 싸워야 합니다. 교회, 교단 및 단체 간의 연합, 때로는 대륙적인 연합, 세계적인 연합을 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훈련받은 정병들이 필요합니다. 아브람과 같은 희생적인 사랑과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현실만 생각하면서 손을 늘어뜨리고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영감이 넘치는 음악과 섬김을 통해서 예배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 교회 모임에 학생들을 초청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탁구와 영어회화 모임에 초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바쳐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 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덧입고 이들을 주일 예배와 여름 수양회에 초청하여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아브람을 멜기세덱이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부대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은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람도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십일조는 신앙과 충성의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는 여호와의 소유로 여겨졌고(레 27:30), 구체적으로 성소를 섬기는 레위인의 생활을 위해 쓰였습니다(민 21:21).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자기가 얻은 승리를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제사장을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아브람은 물질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단계로 성숙해졌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들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동 지역의 실제적인 실력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소돔 왕이 교만하게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이는 부당한 제안입니다. 아브람이 자기 생명을 걸고 재산을 투입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들과 전리품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소돔 왕은 이에 대한 감사의 말도 없이 사람은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합니다. 소돔 왕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자선을 베푼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그와 엮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지키고자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신발끈 한 가닥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그와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을 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분명했습니다. 나중에 아브람이 소돔 왕으로 인해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들을까봐 그 꼬투리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자신에게 주심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투입해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자신을 이 일에 써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물질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초기에 신앙체험이 없어서 물질을 자기 능력으로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것을 믿고 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물질에 지배받지 않고 믿음으로 물질을 지배하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되는 자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물질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신앙 초기에 물질을 지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신자가 물질생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살지 못할 때 사실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약속하신 물질 축복을 반드시 받을 수 있습니다. 안요셉 선교사님은 장인이 준 집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리했을 때 장인에게 인정을 받고 매이지 아니하며 복음 역사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자 3층집도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진정한 승리는 남을 이기고 재물을 얻어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양보하는 삶,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여 기꺼이 자기 이익을 포기하며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삶, 이런 내적인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도전하고 때로는 물질에서 손해도 보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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