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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3년 창세기8강(9:18-11:26)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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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32회 작성일 13-05-1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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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8 강 
말씀 | 창세기 9:18-11:26
요절 | 창세기 11:9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오늘 말씀은 의인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목표를 잃어버리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수치를 대하는 자녀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문화를 이룹니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화 문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 자신이 신의 위치에 오르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죄 중에 교만이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교만한 인간은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는 대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흩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셈족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분별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인데 이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시작했습니다. 한 잔 두 잔 시작된 포도주로 인해서 취기가 올라왔습니다. 몸도 더워지자 하나 둘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발라당 누워있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옷을 벗고 누워있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될까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앞뒤 문맥과 자녀들의 반응을 보면 아버지가 술을 먹고 취해서 수치를 당한 사건은 큰 사건으로 보입니다. 자녀들에게 몹시 갈등을 느끼게 했고 부모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잠20:1)” 잠 23:29-35절은 말씀합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하나님 앞에 의롭고 완전한 자로 불렸던 노아도 홍수 심판 후에 긴장이 풀어진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긴장을 풀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누구든지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홍수 전에는 방주 짓는 사명이 있어서 죄를 지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새로운 사명이 없을 때 안일을 즐기면서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명이 있을 때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투쟁을 하게 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일생 감당할 수 있는 캠퍼스 사명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고 어렵지만 이 역사에 자신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아무리 의롭고, 은혜를 입고, 성자처럼 살고,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성경은 거룩하고 존경받으며 귀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처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무너지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벗은 노아를 보고 가나안의 아비 함과 두 아들 셈과 야벳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 ‘라하’로서 ‘보고 즐기다’는 뜻입니다. 알린다는 말은 폭로한다는 뜻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비난하고 비방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럴 수 있느냐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을 보라. 아버지가 주책이고 이제 노망이 들었어. 우리 아버지는 문제가 있다”고 떠벌이며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우선 몸을 덮어드리고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4:8).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입니다(잠 17:9).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허물을 감당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잘 감당한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노아는 함보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 가나안이 함과 같이 교만하고 죄악된 자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해석과 노아가 미래의 가나안과 그 후손들의 죄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쨌든 자식이 저주를 받는 것은 함에게 큰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말대로 가나안 족속들은 실제 저주를 받았고 후에 셈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한 노아가 셈과 야벳을 축복했는데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 예언대로 셈의 후손 중에 아브라함이 나왔고 그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야벳 족속은 주로 유럽 족속인데 그리스와 로마는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창대하였고 후에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셈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거주하게 된 함족들을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노아는 개인적인 감정과 분노로 자녀들을 저주하고 축복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시행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비록 실수했으나 아버지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속에 아들들의 평소 생활이 다 나타나 있기에 누구는 축복을 받고 누구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영적인 지도자들이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가 허물이 있다고 여기저기 나팔을 불고 인터넷에 올리고 문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친히 다루시며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일대일로 만나서 고언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죽 옷을 지어 가리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에게 옮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도 형제의 죄와 허물을 볼 때 덮어주고 감당해 주는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를 잘 이루어가기를 기도합니다.

  10장 8,9절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이란 ‘반역’의 뜻입니다. 즉 여호와께 대항하는 자였다는 뜻입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등장한 첫 용사였습니다. 그는 용감한 사냥꾼이었는데 당시 용사들은 평소에 전쟁차원에서 사냥을 즐겼습니다. 그는 아주 날쌔고 겁이 없는 전사였습니다. 그는 짐승만 잘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억압과 횡포로 사람들을 노예화시킨 최초의 제국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바벨탑을 쌓은 주동자로 알려졌습니다. 가인, 라멕, 니므롯으로 이어지는 악인들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바벨은 이후로 계속해서 사탄적인 이미지로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건설합니다. 후에는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 계시록에서는 강대국의 대표가 음녀 바벨론으로 나옵니다. 니므롯의 역사는 세상의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등도 거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니므롯들을 반드시 심판하셨고 또 심판하실 것입니다. 

  10장의 족보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족보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족보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한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제국을 건설하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처럼 함족이나 세상의 영웅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힘과 지혜를 뽐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고 웃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풀과 같아서 지내고 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허망한 삶에 불과했습니다.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만드는 목적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자기 영광을 높이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벽돌을 만드는 것은 획기적이 발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과 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홍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높은 탑을 쌓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심판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게 되는데 그 진보를 볼 때 무서운 속도였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사람이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므로 의사소통이 잘 되고 집단 지성을 활용하여 엄청난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후에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하자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갑자기 혀가 꼬이더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들이 튀어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벽돌 좀 줘”라고 했더니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역청을 주고 다른 쪽에서는 “역청 좀 줘”라고 했더니 벽돌을 주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김정은보다 더 무서운 니므롯이 와서 공사 지휘를 해도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천하의 니므롯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와 탑공사는 흉물스런 모습을 남기고 중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안 되니 함께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온 지면으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바벨탑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면서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놀랍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100년 내에 세계는 생각하는 컴퓨터, 유전 공학과 우생학의 발전 등으로 인해서 지구 합중국이 되고, 핵무기 통제를 위해서 단일한 군대, 단일한 핵무기 병기고, 그리고 이를 담당하는 개인이 있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단일하고도 통일된 공동체 내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전지구 상에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반역이 무르익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바벨탑을 쌓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계획하고 도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돕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훼방하시고 원수들을 계속해서 일으키십니다. 오해가 생기게 합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소통이 안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런 일도 성취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설령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겸손히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와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겸손히 동역하며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0-26절을 보면 셈의 족보는 아브람으로 이어집니다. 셈에 대한 노아의 축복은 아브라함으로 성취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대가 됩니다. 또 셈의 족보는 “낳았고”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생명과 소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기술문명을 발달시킨 자나 니므롯처럼 강대한 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식도 없이 늙어가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보다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많은 자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뭉치고자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했을 때 결국 그 결과는 바벨탑을 쌓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 인간의 기대가 무너져 가는 현실 속에서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역사 속에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나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진정한 희망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는 것이 힘들다고 낙망하지 말고 실패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겨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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