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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3년 창세기 6강(6:1-22) 은혜 입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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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89회 작성일 13-04-28 18:18

본문

2013년 창세기 제 6 강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8 
은혜 입은 노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 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자 작정하셨지만 의인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롯의 가정을 구원하십니다. 바벨론 침공으로 유다를 멸망시키시는 가운데서도 의인 다니엘을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 나라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악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의롭게 살고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듯이 우리에게도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습니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외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오늘 한국에 성형 수술 붐이 불고 있습니다. “너만 빼고 다 했다.” 이는 성형 수술 광고의 문구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날 낳으시고 성형외과 의사가 나를 거듭나게 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지식을 가진 의사들이 성형외과와 피부과를 지원하고 산부인과 의사들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고 여자의 외모만 보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능력을 일순위로 보고, 남자들은 여자들의 외모를 일순위로 보면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에서야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만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회에서도 믿음에다가 능력과 외모, 재산, 가족 사항까지 다 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늘어만 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타락할 때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할 신자들이 세상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되자 사람들의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마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가나안 성도(교회를 안 나가 성도)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너무 세상과 같아지다 보니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신자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이 극심해지자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더 이상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신데 인간의 부패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함께 하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이후로 인간은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심판하고자 작정하시고 120년간 심판을 유예하는 기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노아를 통해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어 갈수록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것은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당시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4). 네피림은 체구가 큰 거인들이었습니다. 여자는 아름다움을, 남자는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몸짱, 얼짱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내가 죄를 지을 때 누구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돌을 호수에 던지면 파장이 퍼져나가는 것 같이 죄로 인한 악영향이 퍼져나갑니다. 누구보다도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누구를 등쳐먹을까, 내일은 누구를 괴롭게 할까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더 기발하게 죄를 짓고 죄를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 어떤 결심을 하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들이 썩고 부패하여 쓰레기와 같이 되었기 때문에 지면에서 쓸어버리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당시 인구가 약 10억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지만 하나님은 성적인 타락과 포악함이 충만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쓸어버리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도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부패 공화국, 뇌물 공화국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전관예우, 국내에서의 성매매뿐만 아니라 해외 성매매의 주 고객이 한국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초등학생은 선생님께서 그를 믿고 물을 떠다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일년 동안 변기의 물을 떠다 드리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한 67세의 할머니는 평택시 합정동 길가에서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라고 한 20대에게 훈계를 했다가 벽돌로 머리를 맞고 숨지는 변을 당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부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는 심판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사람들이 부패하여 하나님이 영이 떠난 시대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은 후에 셋을 통해서 그의 역사를 계승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노아를 통해서 구원역사를 잇고자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은 선택의 의미가 포함됩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사람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새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 가운데서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합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천을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우리를 남겨두셨습니다. 구원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인간의 행위에 기초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라고 해서 구원받을 만한 꼬투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아도 홍수 후에 깨어 있지 못하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술수정을 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그 시대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떤 점에서 그 시대 사람들과 달랐습니까? 9,10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첫째,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의’는 바르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살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귀히 여기고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때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둘째,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완전한 자란 ‘흠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NIV,RSV,NASV)은 ‘그 시대 비난 받을 것이 없는(blameless)’으로 번역했습니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 중에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전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죄인이었습니다(창 5:3). 그러나 그는 늘 말씀 앞에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셋째,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 보다 힘든 것이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이 통했습니다. 평생을 같이 가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노아는 온갖 죄악과 강포가 충만한 그 시대에  그는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성경 선생으로 살았습니다(벧후2:5). 모든 사람들이 물질과 인간 중심으로 살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살아있는 잉어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듯, 홀로 죄악의 파도와 싸우는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 한 사람을 그 시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보다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노아가 당시 악한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살고자 할 때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흰 배를 뒤집고 물에 떠내려 가는 죽은 잉어와 같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구별되게 사는 노아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사람들은 그를 소외시켰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거룩한 왕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자기를 위로했을 것입니다. ‘나 혼자서 이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나 혼자서 십자가 보네. 나 혼자서 봐야 하네. 누가 대신 봐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봐야 하네.’ 또 소신있게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와 ‘예스, 예’하며 타협할 때 그는 홀로 ‘노우,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마음씨만 가지고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고,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고, 죄에 대해서 철저할 때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노아가 잘 나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덧입었기에 가능합니다. 또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알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더욱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는 더욱 노아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은혜의 선순환’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자기 조상인 므두셀라와 에녹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 선배들을 통해서 선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였습니다.

  우리도 육체가 되어 죄악이 만연하고 부패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 노아를 배우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거하십니다. 성령의 내주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과 지배를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날마다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 혼자서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선배들이 이렇게 살아 왔고 또 살고 있음을 알고 힘을 내야 합니다.

  넷째, 노아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노아는 당시 믿음이 없는 여인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480세 이후에 결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도 평범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도 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자기와 함께 살면서 방주를 짓도록 인도했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끝 날을 대비하여 무엇을 만들라고 하십니까? 13-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심판 날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방주는 고페르라고 하는 잣나무 만들어야 합니다. 역청이라고 쓰인 낱말은 코페르입니다. 이는 속죄란 말로도 쓰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죄를 위한 속죄물, 즉 죄를 덮어주는 역할을 할 때 쓰는 말이 ‘코페르’입니다. 방주는 안팎이 역청으로 칠해졌는데 아마 송진을 함유한 역청이었을 것입니다. 방주는 고페르 나무로 짓고, 코페르라는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는 것은 장차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죄물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죄를 덮어주십니다. 장차 임할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방주는 노아 가족과 원하는 사람들을 실어야 하고 또 짐승들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크기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크기를 정해주셨습니다. 길이 약 135미터, 넓이 약 22.5미터, 높이 약 13.5미터로서 부피를 따져보면 40,000입방 미터가 됩니다. 이것은 철도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지붕이 있는 화차 522개 정도의 양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이 약 17만 5천종이 되고 암수로 하면 약 35만 쌍이 된다고 합니다. 그 동물들이 방주 안에서 일년동안 먹고 배설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습니다. 또 이 방주는 홍수에서 견딜 수 있도록 가장 안전한 비율로 만들어졌습니다. 방주가 폭우와 급류와 높은 파도와 소용돌이 속에서 쓰러질 지라도 안정되게 복원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라고 하십니다. 폭우가 내릴 때에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주에는 동력이 없습니다. 모든 배는 돛을 달든지 노를 달아서 빨리 가거나 늦출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에는 속도를 조절하거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노나 키가 없었습니다. 동력이 없으니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방주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합니다. 우리가 인생 항해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두렵고 불안합니다. 걱정과 근심과 고통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내 인생 항해의 선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우리 각자의 인생길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 모든 일을 너를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방주를 짓는 일이 힘들지만 사실 노아와 그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섬기고, 사랑의 수고를 하며 애를 쓰지만 자신의 영적인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입니다. 내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를 힘쓰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사명이 있을 때 우리는 방황하지 않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이 있을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의 설계도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죄의 댓가를 치루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죄의 결과가 죽음인데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 아내와 며느리들을 구원하고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생명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모든 양식을 가져다가 저축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가족과 생물들이 먹을 음식의 양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코페르 나무가 없다고 다른 나무를 대충 사다가 쓰지 않았습니다. 역청을 부분적으로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양식도 힘들다고 적당히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다 준행하였습니다. 한 가지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려면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의 말씀은 노아가 들었습니다. 또 방주를 짓는 일은 중노동입니다. 또 120년이라는 긴 시간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아들들은 아버지 노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세상의 쾌락을 좇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돈을 벌면 그것을 모두 방주 만드는 일에 투자를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방주를 만든다고 하지만 세상의 즐거운 일들이 많은데 허구한 날 산에다 방주를 짓는 일은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좋은 봄날에 소풍을 가자며 유혹을 하고 쉬엄쉬엄 하라고 충고도 했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노아에게 미쳤다고 비난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 홍수를 위해서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20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가면서 묵묵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그로 하여금 방주를 끝까지 만들도록 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 앞에 서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방주 만드는 일을 끝마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방주를 만들면서 그 시대의 죄악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으로 방주 짓는 사명에 집중했을 때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우리가 힘들지만 일대일 말씀 공부와 성서한국, 세계 선교에 힘을 쓰는 가운데 나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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