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 5강(4:1-5:32) 셋을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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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5 강
말씀 | 창세기 4:1-5:32
요절 | 창세기 4:25
셋(Seth)을 주신 하나님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오늘 말씀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가 가정에서 사회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형제를 죽인 첫 살인자 가인과 그 후손들은 더 강퍅해져갑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죄를 다루시는 과정에서 그를 보호하는 표를 주신 기이한 사건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돌이킬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돌보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주셔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구속 역사를 이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을 낳은 아담 부부는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하와는 죽을 것 같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제사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며 화목하고 자신을 드리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제사는 제물 자체보다도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믿음과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아니하신다면 우리의 마음 자세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를 볼 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히 11:4).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형식과 전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식 안에 믿음이 없다면 이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반복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워줍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기초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산제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는 삶을 삽니다. 교회에 와서 단순히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죄를 가리움 받고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이로 인해 안색이 변했습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분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화를 내는 원인은 하나님이나 아벨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시기심이 문제였습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의롭게 생활하는 아벨의 삶이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미움과 반발심을 불태우면서 동생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경고하시면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한다’는 뜻은 죄가 너를 소유하려고 한다, 사로잡으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 위에 왕 노릇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죄의 힘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죄는 대단히 집요하고 강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삼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가 나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서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싸우는 지름길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죄 지을 기회를 박탈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으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즉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죽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으로서 죄를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죄의 본성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기도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면과 방향이 가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훈계를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은 시기심과 분노와 미움이 발전하여 증오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사랑해야 마땅한 동생을 미워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존속 살인이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는 가인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너무나 버릇이 없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당장 죽여도 할 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와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어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는데, 가인에게는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유감스럽게도 모른다고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어떻게 징계하십니까? 10-1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들리고 그는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준엄한 심판을 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고 땅은 삶의 터전입니다. 그가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히자 땅이 그에게 열매를 주지 않습니다. 죄는 하늘을 닫고 땅을 황무하게 합니다. 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가인은 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방황이라는 말이 문학적으로는 아름답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 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자기가 미워하던 동생 아벨을 제거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불안으로 인해서 마음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시달립니다. 자신이 형제를 죽였기 때문에 자기도 죽임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죽어도 싼 놈아” 하면서 저주하고 짱돌을 들고 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면 가인에게 내린 벌의 일곱 배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표를 통해 가인의 생명을 죽음에서 보호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가인을 지켜 주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가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심판을 유보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기다려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살인자 가인의 생명을 지켜주시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합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죄를 지어도 당장 호적을 파버리지 않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뻔뻔한 가인일지라도 생명을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사랑스런 아벨을 죽인 자인데 복수하지 않고 인내와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죄인을 끌어안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표는 대속적인 표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아오라고 초청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쉼을 누리고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그가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탁 트인 동산을 창설하셨는데 인간은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열려 있고 함께 할 수 있는데 죄를 범한 인간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이 없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문화의 내용이 어떠합니까?
라멕이 일부다처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이름을 하나는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라고 했습니다. 아다는 장식품이라는 뜻이고 씰라는 딸랑거림이라는 뜻입니다. 아내를 돕는 배필이 아니라 육신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기계공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각종 무기를 만들어 대량 살상을 하고 영웅이 탄생하게 됩니다. 또 라멕은 아내들에게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잔인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 십 칠 배이리로다.” 이는 라멕의 복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화가 얼마나 잔인하고 강포한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처는 긁힌 것, 상함은 타박상 정도인데, 그로 인해 소년을 죽일 정도로 보복이 잔혹합니다. 더 가관인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조롱하며 자기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십칠배나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양심이 얼마나 뻔뻔한지, 가인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라도 했는데 라멕은 죽음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 죄가 강하게 번성해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고 오직 나만 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감정, 내 욕구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누구를 주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지정된 자’ ‘보상’ ‘대체’입니다. 아담의 마음에 가인의 후손이 번성해가는 것을 볼 때 착잡하고 슬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창 3:15) 성취에 의구심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습니다. 씨란 작지만 생명이 있고 희망을 상징합니다. 셋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새 역할을 하게 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이름을 에노스로 지었습니다. ‘에노스’란 ‘약함’을 뜻합니다. 그로부터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공적 예배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을 떠나 문화를 창달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했다면 셋의 후손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에노스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는 에녹, 노아를 통해서 계승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인본주의 문화를 꽃피우는 동안에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끊어질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역사의 끈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십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새순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소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어떤 가운데서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가인의 짧은 족보는 문화적 진전 속에 살인과 뻔뻔함으로 끝난 반면,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는 하나님의 형상(5:1)과 하나님의 복(2)이 언급됩니다. 동시에 오랜 수명과 많은 자녀 낳은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세상 문화 창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나타나지 않으나,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의 삶이 특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녹만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오직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뿐입니다. 에녹의 특징은 그가 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변함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처음이나 끝이나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평범한 삶을 살면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 믿음으로 살았다,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큰일이나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큰 일을 하고, 무언가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의하면 에녹은 불경건한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유 1:14,15).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에녹은 셋의 후손 가운데서 홍수심판 이전에 최고의 믿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즉 에녹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임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986세를 살고 죽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심판하기를 얼마나 오래 끄셨는가,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당장 죄를 뿌리 뽑지 않으시고 가인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의로운 씨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예배를 받으십니다. 때로 의인의 씨가 마르는 것 같은 위기의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절망스런 시대에 셋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통해 희망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거룩한 씨를 세워가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말씀 | 창세기 4:1-5:32
요절 | 창세기 4:25
셋(Seth)을 주신 하나님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오늘 말씀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가 가정에서 사회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형제를 죽인 첫 살인자 가인과 그 후손들은 더 강퍅해져갑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죄를 다루시는 과정에서 그를 보호하는 표를 주신 기이한 사건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돌이킬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돌보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주셔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구속 역사를 이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을 낳은 아담 부부는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하와는 죽을 것 같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제사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며 화목하고 자신을 드리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제사는 제물 자체보다도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믿음과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아니하신다면 우리의 마음 자세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를 볼 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히 11:4).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형식과 전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식 안에 믿음이 없다면 이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반복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워줍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기초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산제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는 삶을 삽니다. 교회에 와서 단순히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죄를 가리움 받고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이로 인해 안색이 변했습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분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화를 내는 원인은 하나님이나 아벨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시기심이 문제였습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의롭게 생활하는 아벨의 삶이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미움과 반발심을 불태우면서 동생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경고하시면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한다’는 뜻은 죄가 너를 소유하려고 한다, 사로잡으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 위에 왕 노릇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죄의 힘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죄는 대단히 집요하고 강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삼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가 나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서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싸우는 지름길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죄 지을 기회를 박탈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으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즉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죽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으로서 죄를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죄의 본성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기도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면과 방향이 가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훈계를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은 시기심과 분노와 미움이 발전하여 증오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사랑해야 마땅한 동생을 미워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존속 살인이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는 가인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너무나 버릇이 없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당장 죽여도 할 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와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어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는데, 가인에게는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유감스럽게도 모른다고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어떻게 징계하십니까? 10-1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들리고 그는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준엄한 심판을 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고 땅은 삶의 터전입니다. 그가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히자 땅이 그에게 열매를 주지 않습니다. 죄는 하늘을 닫고 땅을 황무하게 합니다. 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가인은 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방황이라는 말이 문학적으로는 아름답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 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자기가 미워하던 동생 아벨을 제거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불안으로 인해서 마음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시달립니다. 자신이 형제를 죽였기 때문에 자기도 죽임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죽어도 싼 놈아” 하면서 저주하고 짱돌을 들고 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면 가인에게 내린 벌의 일곱 배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표를 통해 가인의 생명을 죽음에서 보호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가인을 지켜 주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가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심판을 유보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기다려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살인자 가인의 생명을 지켜주시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합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죄를 지어도 당장 호적을 파버리지 않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뻔뻔한 가인일지라도 생명을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사랑스런 아벨을 죽인 자인데 복수하지 않고 인내와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죄인을 끌어안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표는 대속적인 표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아오라고 초청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쉼을 누리고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그가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탁 트인 동산을 창설하셨는데 인간은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열려 있고 함께 할 수 있는데 죄를 범한 인간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이 없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문화의 내용이 어떠합니까?
라멕이 일부다처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이름을 하나는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라고 했습니다. 아다는 장식품이라는 뜻이고 씰라는 딸랑거림이라는 뜻입니다. 아내를 돕는 배필이 아니라 육신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기계공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각종 무기를 만들어 대량 살상을 하고 영웅이 탄생하게 됩니다. 또 라멕은 아내들에게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잔인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 십 칠 배이리로다.” 이는 라멕의 복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화가 얼마나 잔인하고 강포한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처는 긁힌 것, 상함은 타박상 정도인데, 그로 인해 소년을 죽일 정도로 보복이 잔혹합니다. 더 가관인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조롱하며 자기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십칠배나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양심이 얼마나 뻔뻔한지, 가인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라도 했는데 라멕은 죽음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 죄가 강하게 번성해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고 오직 나만 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감정, 내 욕구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누구를 주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지정된 자’ ‘보상’ ‘대체’입니다. 아담의 마음에 가인의 후손이 번성해가는 것을 볼 때 착잡하고 슬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창 3:15) 성취에 의구심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습니다. 씨란 작지만 생명이 있고 희망을 상징합니다. 셋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새 역할을 하게 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이름을 에노스로 지었습니다. ‘에노스’란 ‘약함’을 뜻합니다. 그로부터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공적 예배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을 떠나 문화를 창달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했다면 셋의 후손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에노스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는 에녹, 노아를 통해서 계승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인본주의 문화를 꽃피우는 동안에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끊어질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역사의 끈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십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새순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소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어떤 가운데서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가인의 짧은 족보는 문화적 진전 속에 살인과 뻔뻔함으로 끝난 반면,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는 하나님의 형상(5:1)과 하나님의 복(2)이 언급됩니다. 동시에 오랜 수명과 많은 자녀 낳은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세상 문화 창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나타나지 않으나,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의 삶이 특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녹만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오직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뿐입니다. 에녹의 특징은 그가 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변함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처음이나 끝이나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평범한 삶을 살면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 믿음으로 살았다,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큰일이나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큰 일을 하고, 무언가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의하면 에녹은 불경건한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유 1:14,15).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에녹은 셋의 후손 가운데서 홍수심판 이전에 최고의 믿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즉 에녹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임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986세를 살고 죽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심판하기를 얼마나 오래 끄셨는가,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당장 죄를 뿌리 뽑지 않으시고 가인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의로운 씨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예배를 받으십니다. 때로 의인의 씨가 마르는 것 같은 위기의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절망스런 시대에 셋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통해 희망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거룩한 씨를 세워가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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