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4강(3:1-24)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페이지 정보

본문
2013년 창세기 제 4 강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말씀의 권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좋은 환경뿐만 아니라 계명의 말씀이 있었고, 사명이 있었고,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이 불행하게 된 근본원인과 범죄한 우리 인간의 실존이 잘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뱀이 등장했습니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 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20:1) 이 말씀에 기초해 볼 때 본문의 뱀은 바로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다가 쫓겨났습니다(겔 28:12-17).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탄이 뱀을 통해 여자에게 다가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자 의심폭탄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b)
이 질문은 참 간교합니다. ‘참으로’라는 부사는 긍정문에서는 확신을 주지만 의문문에서는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실까요?’라고 물으면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원래 하나님은 창세기 2:16,17절에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선악과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아름다운 에덴을 주셨구나!’ 하며 존재의 근원을 알게 되고, 선악과 계명을 떠올리면서 ‘아 그렇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무한한 자유와 영적 질서를 지키도록 계명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에덴의 행복을 유지하는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악과 계명이 없으면 무한한 자유 속에서 인간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종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해 놓으시고 선악과 열매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마음껏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아무것도 못 먹게 한 것처럼 질문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불평과 의심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색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분인 것처럼 간교하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탄과 대화하며 사탄의 말을 듣기 시작한 여자는 벌써 마음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도 몽롱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탄의 독이 여자의 영혼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의 악한 술수에 넘어가기 시작한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자들만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 여자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여자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으라는 말씀을 빼 먹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안하셨는데, 만지지도 말라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첨가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며 마치 설마 죽겠냐는 듯이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의 힘으로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연약함을 타고 여지없이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요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성령의 검을 휘두르셨습니다. 그럴 때 사탄은 꼼짝 못하고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는 일에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여자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절대성이 없는 것을 알자 뱀은 어떻게 했습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 사탄은 여자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 확신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런 것이라고 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매우 유혹적입니다. 인간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니! 사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 하다가 타락한 천사입니다. 사탄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교만을 심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질서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아지고 남편도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여자는 선악과가 전에는 그냥 한 나무의 열매에 불과하였는데 다시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습니다(6a). 또한 요일 2:17-19절에 말씀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세상 영광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에 빠져 스피릿을 잃고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결국에는 그 인생이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말씀을 붙잡지 않은 여자의 허점을 사탄은 강하게 공격했습니다. 결국 여자는 유혹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상실하고, 선악과를 따먹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죄짓는 것이 꺼림직 했는지 남편에게 주어 함께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죄에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전에 없던 죄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왔고 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이 벗겨짐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이제는 정죄감과 수치심으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커다란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려야 겨우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가려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려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동산에 거닐며 하나님과 함께 부모와 자식과 같이 사랑스러운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을 치고 어두운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자의식과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을 은폐하고 위장하게 됩니다. 죄로 인한 상처와 정죄의식을 털어놓지 못하고, 자꾸 감추는 이중인격자가 됩니다. 누군가 자신의 추한 내면을 알까 두려워서 일부러 억지웃음을 짓고, 수다를 떨고, 학벌이나, 돈, 외모로 자신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사이버 세계, 어두운 술집과 모텔, 자취방에 숨어 지내며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든 혼자 있든 고독감과 죄로 인해 상해 버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회에 동성애법을 소수인권보호라는 차원에서 입법화시키고자 합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아이들에게 동성연애가 합법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목사는 감옥에 가게 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사회는 지금보다 더 악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죄는 재미있게 또 작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죽음인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심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이들을 먼저 찾아와 물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죄로 인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왜 나를 피하느냐?”,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담의 문제를 돕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는 길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 하나님이 아담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담이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전처럼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위대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너의 이전의 모습은 어디로 갔고 지금 너의 모습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시는 질문입니다. 이 음성은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음성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사실 이 질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없어 불신 가운데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신분과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생활인의 삶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놓쳐버리고 여러 한계 앞에 무릎 꿇고 두려움과 무기력 가운데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를 죄인 줄도 모르고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 또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자기 정욕대로 사는 우리의 죄악된 이름은 부르고 싶지 않은 부담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것은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형사가 장발장을 악착같이 쫓아다녔던 것처럼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두운 죄가 용서받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이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시간 저희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담은 ‘아이고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문제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을텐데 변명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남자들만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자신의 두려움과 수치심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에게 그의 죄를 분명하게 회개토록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 그러나 아담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죄에 대한 1차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아내에게 2차 책임을 전가시키며 자신을 합리화하였습니다. 하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뱀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잘못은 그럴듯하게 변명하면서 남에게 화살을 돌리고 끝내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길 잘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이 범죄한 이 순간에도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십니다. 15절 말씀은 뱀을 저주하시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밝히시는 원시 복음의 말씀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과 여자의 후손은 원수가 됩니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은 사탄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상하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박살내어 죽이고 승리할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발꿈치를 상하는 아픔을 당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53:3-5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찌르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죄 범한 우리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16-19절은 공의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엄정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임한 형벌이 어떠합니까? 우선 임신하여 출산하는 고통이 크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자는 자신의 행복이 남자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남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일생은 남편에게 다스림 받으며 남편에 따라 울고 웃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남자와 여자가 변화되어야 아름답고 동등한 부부관계가 회복됩니다.
남자는 어떤 형벌을 받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농사짓는 것을 방해하였고 평생 씨 뿌리고 경작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무엇입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바로 죽음입니다. 무서운 사형선고에 따라 인간은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절망적입니까? 아무리 노력을 하고 일가를 이루어도 우리의 수고가 무로 돌아갈 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늘 우리 심령에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 이름을 하와라 불렀습니다. 하와란 생명이란 뜻입니다. 아담은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여자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났고 땀을 흘려야 하지만 이 여자 안에는 생명의 약속이 있고 이 여자가 낳을 후손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고 징계를 받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벌거벗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이시고 그것으로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랑하시며 어떻게 해서라도 수치와 허물을 감추어 주시고 우리를 다시 만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서 쫓아내시지만 이들을 보호하여 지켜주기 위해서 짐승을 죽여 가죽 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이 짐승의 죽음은 앞으로 계속 죽을 짐승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심으로써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화목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셨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생명나무로부터 격리되어 영생의 가능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차 언젠가는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떡이십니다(요6:35).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11:25).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고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게 됩니다(요5:24).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생명나무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에 보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내 안에 있으면 형제를 용서할 수 있고, 사랑이 생기고,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함으로 날마다 이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를 찾고 찾고 또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현재 나의 실존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성을 맺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말씀의 권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좋은 환경뿐만 아니라 계명의 말씀이 있었고, 사명이 있었고,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이 불행하게 된 근본원인과 범죄한 우리 인간의 실존이 잘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뱀이 등장했습니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 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20:1) 이 말씀에 기초해 볼 때 본문의 뱀은 바로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다가 쫓겨났습니다(겔 28:12-17).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탄이 뱀을 통해 여자에게 다가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자 의심폭탄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b)
이 질문은 참 간교합니다. ‘참으로’라는 부사는 긍정문에서는 확신을 주지만 의문문에서는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실까요?’라고 물으면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원래 하나님은 창세기 2:16,17절에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선악과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아름다운 에덴을 주셨구나!’ 하며 존재의 근원을 알게 되고, 선악과 계명을 떠올리면서 ‘아 그렇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무한한 자유와 영적 질서를 지키도록 계명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에덴의 행복을 유지하는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악과 계명이 없으면 무한한 자유 속에서 인간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종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해 놓으시고 선악과 열매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마음껏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아무것도 못 먹게 한 것처럼 질문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불평과 의심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색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분인 것처럼 간교하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탄과 대화하며 사탄의 말을 듣기 시작한 여자는 벌써 마음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도 몽롱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탄의 독이 여자의 영혼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의 악한 술수에 넘어가기 시작한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자들만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 여자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여자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으라는 말씀을 빼 먹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안하셨는데, 만지지도 말라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첨가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며 마치 설마 죽겠냐는 듯이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의 힘으로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연약함을 타고 여지없이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요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성령의 검을 휘두르셨습니다. 그럴 때 사탄은 꼼짝 못하고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는 일에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여자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절대성이 없는 것을 알자 뱀은 어떻게 했습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 사탄은 여자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 확신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런 것이라고 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매우 유혹적입니다. 인간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니! 사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 하다가 타락한 천사입니다. 사탄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교만을 심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질서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아지고 남편도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여자는 선악과가 전에는 그냥 한 나무의 열매에 불과하였는데 다시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습니다(6a). 또한 요일 2:17-19절에 말씀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세상 영광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에 빠져 스피릿을 잃고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결국에는 그 인생이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말씀을 붙잡지 않은 여자의 허점을 사탄은 강하게 공격했습니다. 결국 여자는 유혹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상실하고, 선악과를 따먹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죄짓는 것이 꺼림직 했는지 남편에게 주어 함께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죄에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전에 없던 죄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왔고 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이 벗겨짐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이제는 정죄감과 수치심으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커다란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려야 겨우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가려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려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동산에 거닐며 하나님과 함께 부모와 자식과 같이 사랑스러운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을 치고 어두운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자의식과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을 은폐하고 위장하게 됩니다. 죄로 인한 상처와 정죄의식을 털어놓지 못하고, 자꾸 감추는 이중인격자가 됩니다. 누군가 자신의 추한 내면을 알까 두려워서 일부러 억지웃음을 짓고, 수다를 떨고, 학벌이나, 돈, 외모로 자신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사이버 세계, 어두운 술집과 모텔, 자취방에 숨어 지내며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든 혼자 있든 고독감과 죄로 인해 상해 버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회에 동성애법을 소수인권보호라는 차원에서 입법화시키고자 합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아이들에게 동성연애가 합법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목사는 감옥에 가게 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사회는 지금보다 더 악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죄는 재미있게 또 작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죽음인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심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이들을 먼저 찾아와 물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죄로 인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왜 나를 피하느냐?”,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담의 문제를 돕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는 길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 하나님이 아담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담이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전처럼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위대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너의 이전의 모습은 어디로 갔고 지금 너의 모습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시는 질문입니다. 이 음성은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음성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사실 이 질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없어 불신 가운데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신분과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생활인의 삶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놓쳐버리고 여러 한계 앞에 무릎 꿇고 두려움과 무기력 가운데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를 죄인 줄도 모르고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 또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자기 정욕대로 사는 우리의 죄악된 이름은 부르고 싶지 않은 부담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것은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형사가 장발장을 악착같이 쫓아다녔던 것처럼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두운 죄가 용서받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이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시간 저희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담은 ‘아이고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문제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을텐데 변명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남자들만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자신의 두려움과 수치심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에게 그의 죄를 분명하게 회개토록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 그러나 아담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죄에 대한 1차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아내에게 2차 책임을 전가시키며 자신을 합리화하였습니다. 하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뱀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잘못은 그럴듯하게 변명하면서 남에게 화살을 돌리고 끝내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길 잘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이 범죄한 이 순간에도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십니다. 15절 말씀은 뱀을 저주하시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밝히시는 원시 복음의 말씀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과 여자의 후손은 원수가 됩니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은 사탄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상하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박살내어 죽이고 승리할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발꿈치를 상하는 아픔을 당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53:3-5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찌르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죄 범한 우리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16-19절은 공의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엄정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임한 형벌이 어떠합니까? 우선 임신하여 출산하는 고통이 크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자는 자신의 행복이 남자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남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일생은 남편에게 다스림 받으며 남편에 따라 울고 웃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남자와 여자가 변화되어야 아름답고 동등한 부부관계가 회복됩니다.
남자는 어떤 형벌을 받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농사짓는 것을 방해하였고 평생 씨 뿌리고 경작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무엇입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바로 죽음입니다. 무서운 사형선고에 따라 인간은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절망적입니까? 아무리 노력을 하고 일가를 이루어도 우리의 수고가 무로 돌아갈 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늘 우리 심령에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 이름을 하와라 불렀습니다. 하와란 생명이란 뜻입니다. 아담은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여자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났고 땀을 흘려야 하지만 이 여자 안에는 생명의 약속이 있고 이 여자가 낳을 후손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고 징계를 받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벌거벗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이시고 그것으로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랑하시며 어떻게 해서라도 수치와 허물을 감추어 주시고 우리를 다시 만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서 쫓아내시지만 이들을 보호하여 지켜주기 위해서 짐승을 죽여 가죽 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이 짐승의 죽음은 앞으로 계속 죽을 짐승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심으로써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화목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셨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생명나무로부터 격리되어 영생의 가능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차 언젠가는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떡이십니다(요6:35).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11:25).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고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게 됩니다(요5:24).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생명나무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에 보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내 안에 있으면 형제를 용서할 수 있고, 사랑이 생기고,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함으로 날마다 이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를 찾고 찾고 또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현재 나의 실존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성을 맺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de55711adf09045ee0ee1a1a5a711583.hwp (0byte)
11회 다운로드 | DATE : 2013-04-14 15:23:5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