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13년 부활 특강(고전15) 부활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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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부활절 특강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3
부활의 영광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봄기운이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죽어 있던 것 같던 나무들에 새싹이 움트고 있습니다. 부활의 전령사들입니다. 부활의 증거들을 자연 속에서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의 몸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자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 부활의 증인들과 사실(1-19)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따뜻하게 부릅니다. “형제들아!” 그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랑스럽게 부르면서 분명한 복음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먼저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 4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이 왜 복음입니까?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란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로서 분리되다, 끊어지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롬1:21). 인간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창 6:3). 죄의 대가는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사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고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지만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년 동안 성경에 예언되고 이제 성취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증인이 없으면 그 사실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법정에서는 증인 둘만 있어도 효력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은 무려 500여명 이상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되었습니다. 증인들의 변화된 삶은 부활의 증거를 더욱더 확실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수천 명 앞에서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허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의심의 대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변하여 인도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도마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두려움 많던 자가 용기있는 사람으로, 소시민적인 자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역사창조자로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변화된 증인들은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 잔인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모두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찬란한 빛으로 임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회개하고 거듭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누구든지 변화여 담대한 부활의 증인의 삶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팔푼이 같다고 고백합니다. 과거 그는 ‘스스로 큰 자’ 란 뜻에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핍박하고 훼방할 자신을 생각할 때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되게 됩니다(14,15). 부활이 없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빈껍질의 불완전한 복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노력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목자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젊음과 물질과 마음을 드려 감당하는 모든 수고도 헛되고 맙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우리는 결국 거짓증인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은 무능력자로 발견되게 됩니다(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며 죽어가도, 선이 악에게 패배당해도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발견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자시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만약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17)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게 됩니다.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여전히 죄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감을 통해 죄를 발견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소감을 쓰고 눈물로 회개하고 영적 투쟁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신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됩니다(18,19).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하자리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오직 이 땅에 속한 것뿐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불쌍한데 그 중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은 더욱 불쌍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복음 진리에 기초해서 살고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살아오신 안요셉 선교사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10년을 떨어져 살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외교관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풀타임 목자로 헌신했습니다. 장인이 주신 집도 버렸습니다. 양들을 이 시대의 거목들로 키우기 위해서 자신은 거름이나 비료가 되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간증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보다는 깊은 감사와 만족과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고난을 사랑하며 검소하고 청빈한 삶, 순결한 삶을 사랑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그가 이미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기 때문에 번영하고 승리하고 병도 다 나아야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죄와 사탄의 권세를 다스리고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않았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승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열매가 없는 현실을 자신의 믿음 없음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괴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계속되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버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계 인구의 75%는 일생 고난을 벗어나 승리와 번영을 체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승리와 번영만 주장하면 진리의 말씀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헛되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적극적으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서 맡은 바 일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부활의 결과들(20-34) :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 드릴 열매들의 보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이 어떻게 모든 신자들에게 효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결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동일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세력에 지배당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의 대표로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망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사탄의 세력 가운데 있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이 없어지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실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반역의 역사가 그치고 순종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난 후에 아들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함으로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있는 지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십니다. 만물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아담 이래 역사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음의 세력은 그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대항합니다. 이런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서 신자들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로 인해서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날마다 대면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을 보면 그의 고난이 나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골라서 살았습니다. 그가 인생을 즐길 줄 몰라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가 피학대증 환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 산 것이 아닙니다. 부활 이후 천국에서의 삶에는 무한히 더 나은 어떤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한 사역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 이같이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고린도인들 안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로 인해 그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을 것 같은 고난을 받지만 그로 인해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받는 고난이 큰 만큼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도 내일 줄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낙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다고 회의 하면서 믿음을 버렸습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크리스천이었던 영국이 지금은 7%만이 실제적인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이나 댄스 홀로 팔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날 징조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쾌락적이 되고 희생하지 않고자 합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니 세속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나이 든 교인이 현대 회의주의자가 라디오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정통 기독교를 통해 믿었던 것은 거짓된 것은 아닐지라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악한 동무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부활체의 본질(35-50) : 바울은 죽은 자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인지 씨와 꽃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씨를 보면 작고 까만 것이 보잘 것이 없습니다. 정말 무가치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꽃씨를 심으면 땅에 묻혀서 죽습니다. 그리고 씨가 발아하여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옵니다. 잎이 무성해지면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의 축제를 보면 참으로 낙원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것은 작은 알갱이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진리를 자연 속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입니다. 지축을 박차고 달리는 호랑이나 사자 등 짐승에게는 견고한 뼈의 구조와 힘있는 근육을,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속이 빈 가벼운 뼈와 날개를, 물고기에게는 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비늘과 아가미와 유선형의 몸을 주셔서 물속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낮을 주관하는 해의 영광은 밝고 강렬한 형제를 주셨습니다. 밤을 주관하는 달은 은은하고 단아한 형체를 주셨고, 별들은 밤하늘을 주관하도록 총총하고 신비스러운 형제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들에게는 그 장소와 역할에 맞는 형제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몸이 누리게 될 영광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 후의 존재들이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몸은 나이가 들수록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썩고 병들어갑니다. 아토피로 고생하고, 머리털은 빠지고 이빨도 빠지고 눈은 침침해 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백옥같은 피부, 탄력있는 근육, 빛나는 이빨을, 올곳고 튼튼한 뼈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해도 끊임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정욕과 탐욕과 인간 갈등을 하면서 허물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럽습니다.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함으로 가득한 생활을 합니다. 우리의 몸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근본은 흙이라 연약합니다. 기억력도 약하고, 물방울 하나로도 죽을 정도로 약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강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든지 통과하고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이 있어서 고기와 떡도 드셨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합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변화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 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 것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광채를 발하여 옷을 뚫고 그 빛이 나온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쪼이기만해도 이렇게 광채가 났는데 그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넷째, 몸이 부활되는 순간과 결론(51-58) : 그러면 우리 몸이 언제 변화됩니까?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홀연히’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을 가리킵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자유가 선포되고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그 화염검을 거두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기록된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위에 왕 노릇하였으나 이후로 사망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사망을 조롱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승리란 말은 ‘정복하다’, ‘극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에 대해서 완벽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그의 승리에 참여하여 같은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죄와 죽음에 대해서 패배자로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반드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부활 소망을 가짐으로 인내로 승리해야 합니다.
5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꾸준하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주의 일에 더울 힘쓰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힘이 빠지고 믿음이 흔들릴 때는 언제입니까? 조금 수고하고 즉각적인 결과를 얻고자 하거나, 모든 상황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승리주의가 우리를 낙담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는 진정한 수고와 노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숙해 지며 좋아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확고한 헌신으로 주의 일에 달려들어야 합니다. 또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행사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반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힘써야 합니다.
지난 주 시카고에서 온 막비세코비치 목자님은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최고의 보상입니다. 최후의 보상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만이 헛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낙망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 6:29). 주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요 6:38, 39). 주의 일은 건강하고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엡 5:26, 27). 주의 일은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 입니다(마 28:19).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3
부활의 영광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봄기운이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죽어 있던 것 같던 나무들에 새싹이 움트고 있습니다. 부활의 전령사들입니다. 부활의 증거들을 자연 속에서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의 몸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자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 부활의 증인들과 사실(1-19)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따뜻하게 부릅니다. “형제들아!” 그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랑스럽게 부르면서 분명한 복음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먼저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 4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이 왜 복음입니까?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란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로서 분리되다, 끊어지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롬1:21). 인간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창 6:3). 죄의 대가는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사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고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지만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년 동안 성경에 예언되고 이제 성취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증인이 없으면 그 사실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법정에서는 증인 둘만 있어도 효력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은 무려 500여명 이상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되었습니다. 증인들의 변화된 삶은 부활의 증거를 더욱더 확실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수천 명 앞에서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허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의심의 대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변하여 인도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도마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두려움 많던 자가 용기있는 사람으로, 소시민적인 자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역사창조자로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변화된 증인들은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 잔인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모두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찬란한 빛으로 임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회개하고 거듭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누구든지 변화여 담대한 부활의 증인의 삶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팔푼이 같다고 고백합니다. 과거 그는 ‘스스로 큰 자’ 란 뜻에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핍박하고 훼방할 자신을 생각할 때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되게 됩니다(14,15). 부활이 없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빈껍질의 불완전한 복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노력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목자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젊음과 물질과 마음을 드려 감당하는 모든 수고도 헛되고 맙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우리는 결국 거짓증인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은 무능력자로 발견되게 됩니다(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며 죽어가도, 선이 악에게 패배당해도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발견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자시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만약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17)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게 됩니다.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여전히 죄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감을 통해 죄를 발견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소감을 쓰고 눈물로 회개하고 영적 투쟁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신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됩니다(18,19).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하자리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오직 이 땅에 속한 것뿐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불쌍한데 그 중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은 더욱 불쌍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복음 진리에 기초해서 살고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살아오신 안요셉 선교사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10년을 떨어져 살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외교관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풀타임 목자로 헌신했습니다. 장인이 주신 집도 버렸습니다. 양들을 이 시대의 거목들로 키우기 위해서 자신은 거름이나 비료가 되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간증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보다는 깊은 감사와 만족과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고난을 사랑하며 검소하고 청빈한 삶, 순결한 삶을 사랑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그가 이미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기 때문에 번영하고 승리하고 병도 다 나아야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죄와 사탄의 권세를 다스리고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않았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승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열매가 없는 현실을 자신의 믿음 없음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괴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계속되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버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계 인구의 75%는 일생 고난을 벗어나 승리와 번영을 체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승리와 번영만 주장하면 진리의 말씀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헛되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적극적으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서 맡은 바 일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부활의 결과들(20-34) :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 드릴 열매들의 보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이 어떻게 모든 신자들에게 효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결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동일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세력에 지배당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의 대표로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망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사탄의 세력 가운데 있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이 없어지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실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반역의 역사가 그치고 순종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난 후에 아들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함으로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있는 지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십니다. 만물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아담 이래 역사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음의 세력은 그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대항합니다. 이런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서 신자들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로 인해서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날마다 대면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을 보면 그의 고난이 나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골라서 살았습니다. 그가 인생을 즐길 줄 몰라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가 피학대증 환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 산 것이 아닙니다. 부활 이후 천국에서의 삶에는 무한히 더 나은 어떤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한 사역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 이같이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고린도인들 안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로 인해 그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을 것 같은 고난을 받지만 그로 인해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받는 고난이 큰 만큼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도 내일 줄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낙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다고 회의 하면서 믿음을 버렸습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크리스천이었던 영국이 지금은 7%만이 실제적인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이나 댄스 홀로 팔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날 징조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쾌락적이 되고 희생하지 않고자 합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니 세속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나이 든 교인이 현대 회의주의자가 라디오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정통 기독교를 통해 믿었던 것은 거짓된 것은 아닐지라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악한 동무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부활체의 본질(35-50) : 바울은 죽은 자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인지 씨와 꽃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씨를 보면 작고 까만 것이 보잘 것이 없습니다. 정말 무가치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꽃씨를 심으면 땅에 묻혀서 죽습니다. 그리고 씨가 발아하여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옵니다. 잎이 무성해지면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의 축제를 보면 참으로 낙원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것은 작은 알갱이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진리를 자연 속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입니다. 지축을 박차고 달리는 호랑이나 사자 등 짐승에게는 견고한 뼈의 구조와 힘있는 근육을,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속이 빈 가벼운 뼈와 날개를, 물고기에게는 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비늘과 아가미와 유선형의 몸을 주셔서 물속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낮을 주관하는 해의 영광은 밝고 강렬한 형제를 주셨습니다. 밤을 주관하는 달은 은은하고 단아한 형체를 주셨고, 별들은 밤하늘을 주관하도록 총총하고 신비스러운 형제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들에게는 그 장소와 역할에 맞는 형제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몸이 누리게 될 영광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 후의 존재들이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몸은 나이가 들수록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썩고 병들어갑니다. 아토피로 고생하고, 머리털은 빠지고 이빨도 빠지고 눈은 침침해 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백옥같은 피부, 탄력있는 근육, 빛나는 이빨을, 올곳고 튼튼한 뼈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해도 끊임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정욕과 탐욕과 인간 갈등을 하면서 허물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럽습니다.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함으로 가득한 생활을 합니다. 우리의 몸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근본은 흙이라 연약합니다. 기억력도 약하고, 물방울 하나로도 죽을 정도로 약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강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든지 통과하고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이 있어서 고기와 떡도 드셨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합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변화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 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 것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광채를 발하여 옷을 뚫고 그 빛이 나온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쪼이기만해도 이렇게 광채가 났는데 그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넷째, 몸이 부활되는 순간과 결론(51-58) : 그러면 우리 몸이 언제 변화됩니까?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홀연히’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을 가리킵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자유가 선포되고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그 화염검을 거두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기록된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위에 왕 노릇하였으나 이후로 사망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사망을 조롱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승리란 말은 ‘정복하다’, ‘극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에 대해서 완벽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그의 승리에 참여하여 같은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죄와 죽음에 대해서 패배자로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반드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부활 소망을 가짐으로 인내로 승리해야 합니다.
5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꾸준하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주의 일에 더울 힘쓰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힘이 빠지고 믿음이 흔들릴 때는 언제입니까? 조금 수고하고 즉각적인 결과를 얻고자 하거나, 모든 상황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승리주의가 우리를 낙담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는 진정한 수고와 노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숙해 지며 좋아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확고한 헌신으로 주의 일에 달려들어야 합니다. 또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행사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반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힘써야 합니다.
지난 주 시카고에서 온 막비세코비치 목자님은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최고의 보상입니다. 최후의 보상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만이 헛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낙망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 6:29). 주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요 6:38, 39). 주의 일은 건강하고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엡 5:26, 27). 주의 일은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 입니다(마 28:19).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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