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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3년 창세기 2강(1:26-2:3)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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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41회 작성일 13-03-24 13:28

본문

2013년 창세기 제 2 강 
말씀 | 창세기 1:26-2:3
요절 | 창세기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살아야 할 분명한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삶은 정말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런 근원적인 질문들 앞에 고민하며 창세기 공부를 하면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청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도 턱을 괴고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릎을 치면서 일어서는 날 놀라운 변화가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우리가 창세기 말씀과 함께 이런 고민을 하는 가운데 진리의 빛이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26,27) :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떤 특별한 뜻을 두셨습니까?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와 달리 사람을 만들 때는 깊이 의논을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의논을 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으니 얼마나 위대한 걸작품이 나왔겠습니까? 우주와 지구는 탄소, 산소, 수소, 질소 등 다양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에 가장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 생물체들이 살고 있고, 그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복잡하고 완벽한 생명체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담긴 염기 쌍을 순서대로 배열해서 아데닌(A),티민(T),구아닌(G),시토신(C)이라는 약자로 인쇄할 경우 1000쪽 짜리 책 1000권에 해당되는 양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이 일백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몸 전체의 DNA를 연결하면 지구에서 태양까지 10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에 우리는 그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묘막측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6,27)” 하나님은 사람을 마지막에 창조하시면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이라 함은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정신적, 영적 자질입니다. 고대에 강력한 왕들은 자신의 통치권을 나타내기 위해서 친히 다스릴 수 없는 제국의 속주들에 자신의 형상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물로서 땅에 두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통치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인간도 왕적인 존재로서 존귀와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생명에 특별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리게 하셨습니다(창9:6). 시편 8:4,5절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웠다는 말은 최상의 피조물, 최고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창조의 왕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4b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고후 4:6).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러운 죄가 사함을 받고 그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일 수 있습니다(고후 3:18).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목적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롬8:29).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엡4:24). 우리는 지금도 창조주의 형상을 좇아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약하여 깨어지고 낡고 부패하기 쉬운 존재로서 허물을 보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는 부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4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참으로 존귀하여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을 살리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성령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여섯째 날 동물과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에 동물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매우 신비롭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타락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두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레오 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491년~1498년까지 7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에 새롭게 지어지는 수도원을 장식할 벽화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의 규모도 엄청난데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이라는 소재도 무거웠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작품의 완벽성을 위해 그림 속 예수의 모델이 되어줄 실제 얼굴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빈치는 ‘예수가 있었다면 이런 얼굴이었을 것이다’라는 느낌이 드는 선하고 인자한 인상의 청년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1492년 1년이라는 긴 시간만에 예수의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후로 6년 동안 나머지 11명의 제자의 모습을 그려 넣은 다빈치는 예수와 함께 작품의 핵심 인물인 가룟 유다의 실제 모델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나섭니다. 이를 전해들은 로마 시장은 다빈치에게 가룟 유다는 악인의 상징이니 길거리에서 찾기보다 감옥에서 찾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제안합니다. 이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로마감옥을 방문하게 되고 사형을 앞둔 험악한 인상의 죄수를 가룟 유다의 모델로 점찍습니다. 악인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인상의 죄수를 통해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그림을 완성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죄수에게 이제는 그림을 완성했으니 감옥에 돌아가도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작업 기간 중에 별말이 없던 죄수는 감옥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다빈치를 보며 조롱하듯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냐 며 말이죠. 다빈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노라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는 6년 전 자신이 바로 당신이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선택했던 모델이었다고 소리쳤습니다. 선하고 인자한 인상으로 예수의 모델로 발탁되었던 청년이 불과 6년만에 방탕한 생활과 악한 범죄로 인해 험상궂은 얼굴로 변모했던 것입니다. 다빈치는 그의 외침에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예수를 더 이상 작품 속에 그려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흙과 같은 우리를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지만 인간은 한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시간의 제한을 받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만 인간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지만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이지만 역할이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기 때문에 세상은 좋고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그는 가정에서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즉 우리가 참된 공동체를 이루어갈 때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공동체이십니다.

  둘째, 사명을 가진 존재(28-30) :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명입니다. 사람은 사명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명이 없으면 사람답게 살기 어렵습니다. 사명감에 불타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명은 십자가가 아니라 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가 곧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만족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가 얼마나 공허하고 좌절에 찬 인생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이 됩니다. 육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불만족을 느끼고 쾌락이 채워져도 깊은 공허를 느낍니다. 그러나 고생스럽지만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기쁨이 충만합니다. 만족이 있습니다. 삶에 힘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많이 낳고 양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지구는 500억 명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도 많이 낳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을 많이 낳고 길러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제자 양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0:18-20).”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제자양성 역사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헌신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캠퍼스에 올라 열심히 전도하시는 목자님들, 매주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님들, 센터 구석구석을 청소로 동역하시는 목자님들, 주일마다 정성껏 식사서빙을 하시는 사모님들, 뒤에서 열심히 기도로 동역하시는 목자님들, 찬양으로 섬기시는 목자님들 모두 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그 사명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40년 궁중에서 교육을 받고, 40년 광야 훈련을 받고, 40년 동안 출애굽한 백성을 광야에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키우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섬겼습니다. 바울도 선교사명을 감당하며 일생을 드렸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열정적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찮은 일에 인생을 걸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자연을 개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며 당파싸움을 일삼고 있을 때 이 말씀에 순종한 서구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극복하고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증기 기관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어 현대 과학문명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패배주의, 운명주의와 같은 정신의 세계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운명은 없습니다.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씀을 영접할 때 우리는 개척 정신, 모험정신, 도전 정신을 가지고 신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정복하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안주하는 것은 우리의 큰 적입니다. 안주하면 망하고 개척하면 삽니다. 또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 세상을 창조의 섭리대로 잘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 후에 사람과 짐승에게 각각 먹을거리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어 그 열매를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씨를 가진 채소와 열매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씨는 작지만 풍성한 결실을 냅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인간이 먹는 것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다양한 먹을거리를 주셨습니다. 과일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먹으면 힘이 나고 살맛이 납니다. 그래서 잘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먹는 문제는 자연히 해결됩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31) :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의 기능과 아름다움과 조화가 매우 뛰어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자연 은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야 창조의 세계에 대해서도 눈이 뜨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씀은 특히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을 보시고 평가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걸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내면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기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할지에 더욱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내면을 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장 버리지 않고 오래 참으시며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선하시고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런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존재 가치를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떠한가가 아니라, 또 내가 나를 보기에 어떠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는 만큼 인생에 대해 기대하고 가꾸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 자신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2:1-3)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다 만드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쉼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이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쉼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 날을 특별하게 복되게 구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쉼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안식을 취함으로 영육간에 충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출애굽 이후에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구속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주일에 구원의 감격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쉼과 생명을 깊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존재가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함으로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연약한 소자 하나라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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