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로마서 2013년 로마서 16강(13장) 빛의 갑옷을 입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02회 작성일 13-03-10 13:53

본문

2013년 로마서 제 16 강
말씀 | 로마서 13:1-14
요절 | 로마서 13:12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늘 말씀은 신자의 사회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윤리의 기초는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양심에 따른 순종이고, 이웃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섬겨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으로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분에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권세에 대해 신자가 취해야 할 태도(1-7) : 1,2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위에 있는 권세란 국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공무원들을 가리킵니다. 이 권세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복종입니다. 이렇게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가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심판을 자취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면서 독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세금 논쟁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막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결국은 로마법의 적용을 받은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시면서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요 19:10-11). 모든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이 된 것도 정치,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를 찍지 않았더라도 투표 결과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으므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우리 신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권세에 대한 복종은 맹목적인 것일까요? 권세자가 불의를 행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세자가 우상숭배를 하도록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불의한 헤롯 왕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금신상에 절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받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거절했습니다(단3장). 그들은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관리들의 모함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법을 만들어 공표한 다리오 왕의 명령을 다니엘은 들었지만 거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단6장). 그리고 사자 굴에 던져 졌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공회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전두환 대통령 때에 일부 목회자는 권세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했지만 일부는 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조찬기도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회심하도록 도운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이분들의 노력을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맞고 그른지 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권세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4절에서 사도 바울은 권세를 받아 다스리는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의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또한 선을 장려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 칭찬을 받게 될 것인데 권세자 앞에서도 담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악을 행하게 되면 경찰을 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잡아갈까봐 겁이 납니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들도 무조건 잡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고 긍휼이 있습니다. 권세자들은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과 같이 법을 집행하는 것이 임무이지만 선을 행하도록 돕는 것이 더 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입니다(5).

  또한 우리가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을 씁니다. 우리가 전기를 쓰고, 수돗물을 쓰고, 안전하게 생활을 하고, 도로를 이용하는 것 등등 국가에서 받는 혜택에 대해서 세금을 잘 내야 합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국가가 더욱 선한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금을 잘 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합법을 가장하여 절세를 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조세를 걷는 사람들은 이들의 돈을 추적하느라 고생을 많이 합니다. 한 치과 의사 목자님은 법대로 세금을 냈다고 동료 치과 의사들에게 혼났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니 그들의 불법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목회자들의 세금납부에 대해서 논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UBF 스탭 목자들은 일찍부터 갑근세를 내고 있습니다. 선교 여행을 하다 보니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비자를 내 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법대로 하는 것이 어렵고 늦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지혜롭고 빠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공의가 행해지는 나라가 영향력이 있는 나라가 되고 그런 나라가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은 대체적으로 일등 국민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을 통해서 국가는 온 국민에게 혜택을 골고루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내는 것은 우리의 신앙 양심을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세금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세금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귀한 축복입니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수입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세금을 많이 낸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고 공익에 더 많이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으로, 정직하게 세금을 잘 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은 율법의 완성(8-10)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말하다 갑자기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국가와의 관계가 공식적이라면, 이웃과의 관계는 사적이고 비공식적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법이 강조되면 그 나라는 냉정하고 차갑습니다. 미국은 변호사가 그렇게 많습니다. 그 사회는 모든 것을 법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차갑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 바탕에 깔려 있으면 삶이 평화롭고 풍요롭게 됩니다.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됩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한 의무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 부정으로서 적극적인 긍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사랑의 빚이 남아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받으면 꼭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면 그 의로운 마음 때문에 사랑을 받기가 부담스럽게 됩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주지 않고 또 받지도 않고자 합니다. 네 떡 네가 먹고 내 떡 내가 먹고 말자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관계가 맺히지 않습니다. 서로 고독하고 소외된 삶을 살게 됩니다. 참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잘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풉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마음도 풍요롭고 구김살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받아서 먹을 때 내면에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은혜를 잘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잘 받을 때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여러 모양의 시험이 와도 마음이 은혜 속에서 강해진 사람은 이를 잘 견디며 감당해냅니다. 또한 우리는 형제 사이에도 사랑을 잘 받고 사랑을 잘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에 은혜가 넘치면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더 나누어 주고 싶어집니다. 또 나누어 줄 때 마음에 만족과 행복이 넘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의 빚을 질 때 이 세상은 살맛이 나는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금전적으로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내가 급할 때 아무 돈도 빌리지 말고, 대출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실 신용카드도 일종의 빚이 아닌가요? 출애굽기 22:25절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만약 어떤 빚도 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돈을 꾸어 주는 상황을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5: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면 이런 말씀들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빚도 남아 있는 채로 두지 말라” “빚으로 남겨두지 말라”(NIV의 번역: Let no debt remain outstanding) 즉 모든 빚은 반드시 다 갚아 미결제 상태로 남겨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과도한 빚은 파산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어떤 빚도 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필요해서 진 빚이라면 반드시 갚으라는 것입니다.
 
  8b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8,39). 십계명의 사람에 대한 계명을 보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그의 아내를 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서 상처주고, 고통을 주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약5:20).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8절에서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했고,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사랑에 기초해 있으면 사회 정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사회적인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민족 사회가 된 이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잘 영접하고 이들이 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공헌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사랑하기가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기 힘든 때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고 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축복기도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 추구하는 가치가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기 힘든 때조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겸손하고 여유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급물살에 휩쓸려 갈 때 소와 말이 함께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소가 살아남을까요? 말이 살아남을까요? 말은 급하기 때문에 빨리 휘젓다가 지쳐서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소는 자기를 물에 맡기고 여유롭게 떠내려갑니다. 힘이 비축되어 있기 때문에 소가 살아남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경쟁하고 빨리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좀 소와 같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대화를 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11-14) : 지금은 어떤 시기입니까?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의 기간을 성경은 말세라고 부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지금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알 때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방향이 생깁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이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위치한 종말의 때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랑하기 힘든 때조차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 갑니다. 우리가 어둠이 깊어가는 시대에 서로를 돌아보며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의 전쟁 위협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들어 영적 무감각 상태에 있지 말고 깨어나야 합니다. 예수님도 종말의 자세로 깨어 있으라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12). 밤은 어둠이고 죄악입니다. 한 밤이 되면 유흥가, 환락가는 살아납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조용해집니다. 지금은 태양이 떠오를 때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인데 빛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옷은 잠옷이 아니라 빛의 갑옷입니다. 빛의 갑옷은 빛으로 무장한 갑옷을 말합니다. 갑옷은 전쟁할 때 사람을 적으로부터 보호합니다. 빛의 갑옷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영적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엡6:13).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은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등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둠의 일인 동시에 영적인 무기력에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어둠의 일을 이미 벗어 버렸고, 빛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앞에서는 빛의 갑옷이라고 했다가 1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옷일까요? 근본적으로 같은 옷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옷’이란 신분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분에 맞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 삶은 빛을 냅니다.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3:27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면 우리는 어둠의 열매를 맺지 않고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충성과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겸손과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죄를 그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이런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하고자 힘쓸 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를 인정하고 순복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모든 행동의 밑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으면 우리는 세계에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고, 복음으로 세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44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678 창세기 이엘리야 562 06-09
677 창세기 이엘리야 553 06-02
676 창세기 이엘리야 541 05-26
675 창세기 이엘리야 618 05-19
674 창세기 이엘리야 632 05-12
673 창세기 이엘리야 674 05-05
672 창세기 이엘리야 590 04-28
671 창세기 이엘리야 688 04-21
670 창세기 이엘리야 633 04-14
669 고린도서 이엘리야 741 04-07
668 창세기 이엘리야 621 03-31
667 창세기 이엘리야 641 03-24
666 창세기 이엘리야 690 03-17
열람중 로마서 이엘리야 803 03-10
664 특강 섬김이 776 03-0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