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특강 히브리서 특강 제2강(히브리서 11:23-40) 선택하는 믿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776회 작성일 13-03-04 08:26

본문

2013년 히브리서 특강 제 2 강
선택하는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3-40
요절: 히브리서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믿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중요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과거 유명한 광고문구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운명을 갈라놓습니다. 오늘 본문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 같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중요한 때에 오직 믿음으로 선택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믿음의 조상들의 선택하는 믿음을 우리도 배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믿음으로 모세를 살리기로 한 부모(23)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되기까지 모세는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습니까?
모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이스라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나일강 하수로 던져질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눈물을 머금고 아들들이 나일강 하수에 던져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목숨은 부모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살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모세를 살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2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모세의 부모는 세상 다른 부모와 달랐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모세를 보고 보통아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비범한 아이임을 직감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라는 말은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로 하여금 아이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범한 아이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깊으신 섭리 가운데 그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를 부모 맘대로 할 수 없음을 알고 3개월간 숨어서 키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운명이라 생각하고 모세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 으로 모세를 살 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깊으신 뜻 가운데 이 세상에 보낸 귀한 존재들입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이들이 먼저 자기의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아이들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청지기 자세를 갖고 세상적인 부모들이 키우는 출세지향적인 아이가 아니라 이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가 일생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알도록 섬겨야 합니다. 이들이 거룩한 백성이요 성경 선생으로서 자기 시대를 섬길 수 있는 영적인 리더로 자라도록 영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모세와 같은 이 시대의 거목으로 키우시고 쓰실 것입니다.
 
2.믿음으로 고난을 선택한 모세(24~30)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바로의 공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중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서 한 나라의 왕자로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모세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고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모세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선민의식이 싹트고 있었고 성인이 되자 그는 모종의 선택적 결단을 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하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선민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돌아가 고난의 길을 갈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 선택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모세는 어떤 점에서 많은 고민이 되었을까요?  먼저 그는 바로 공주의 사랑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던 습관을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섬김을 받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특권층으로 생활을 한 것이 몸에 베었습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왕족으로서 누릴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그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선민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준 공주의 사랑과 정을 생각할 때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이 되어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생각하면 너무 초라해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계속해서 노예백성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또 그길로 가면 고난의 길이 될 것이 뻔합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남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한편으로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 백성을 살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이며 과연 후회할 자신이 없는가? 생각할 때 쉽지 않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살면서 그 권세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사에 보탬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무엇을 선택할 때는 근거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근거가 없으면 나중에 선택한 것, 선택한 길에 대해서 후회하게 됩니다. 모세의 선택의 기준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입니다.
당시 강대국의 차기 대권주자로 모세는 출세 길이 보장되었습니다.  모세는 비범했기 때문에 바로와 공주 역시 차기 왕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월만 흐르면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모세는 장성하여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잠시 죄악의 낙을 즐기는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로 계속 남는 것이 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그의 기준은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이 있기에 그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살만한 세상입니다. 계속 발전되어 가는 모든 기기들, 눈부신 경제 발전, 고급 레져 생활 등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달콤하고 유익한 삶에 우리도 모르게 동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남들과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싶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고, 좋은 아파트, 좋은 차를 사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생활 자체가 죄악이라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다보면 하나님을 잊게 되고 이 세상이 주는 가치관에 오염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되기 쉽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될 수 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없이 편하게 사는 생활을 죄악의 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정체성을 잃는 순간 우리는 세속적이 되고 죄악의 낙을 즐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슨 맛으로 살아갔을까요? 우리는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을 할 때, 연주자는 연주를 할 때, 연기자는 연기를 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할 때 기쁘고 행복합니까? 여러분은 어떨 때가 가장 행복합니까?
말씀을 들을 때 행복합니다. 전도해서 양을 얻을 때 행복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상을 타고 남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행복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생활 할 때보다 더 즐겁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이 잘 될 때 기도의 응답이 왔을 때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그 순간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삶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가운데 거하는 삶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너무 귀한 신분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바로의 공주의 정까지도 끊었습니다. 좋은 인간적인 정을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모세가 바로의 공주에게 자신이 선택한 것을 이야기했을 때 공주는 얼마나 충격에 빠졌을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아마 공주는 모세에게 ‘너의 소원을 다 들어 줄테니 제발 내 곁에 있어주어라’ 간곡히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과감하게 ‘죄송합니다’ 거절했습니다. 그녀와의 인연을 매정하게 끊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결단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은 믿음이 눈으로 볼 때 죄악의 낙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소중한 결단, 소중한 선택을 할 때는 과거와의 인연, 과거의 가치관등을 과감하게 끊어야 합니다. 내가 추구했던 삶,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을 과감히 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대 왕 같은 제사장직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두 번째 모세는 상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맘만 먹으면 가장 멋진 자매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모든 금은보화를 다 가질 수도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상은 이 세상의 그 모든 금은보화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영광스런 상임을 모세는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라보았다는 말씀은 미래완료형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모든 기간 동안 늘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험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바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적 열등감에 빠져 살맛이 안 납니다. 그러나 늘 상 주심을 바라볼 때 비록 고난을 받고 살더라도 모세와 같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속적인 가치관을 갖고 살면 모세와 같은 입장에 서 있을 때, 즉 잘 나갈 때, 지금까지 잘 살고 있을 때,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것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현실은 상대적인 빈곤이 심각한 사회적인 이슈입니다. 경쟁적으로 남보다 더 풍요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모세와 같이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예’입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자비량선교사입니다. 한국에서 얼마든지 잘 먹고 편하게 목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외교관, 검사, 교수, 대기업임원, 등 잘 나가는 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안한 삶,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선교사의 삶을 선택하여 세계 각처에 나아가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생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질이 어려워서 고생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양이 없어서 마음고생을 하는 분, 여러 가지로 고난을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박지성 목자님은 목자로 살고자 결단하는 것을 잠시 미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드디어 목자선서를 하고 믿음으로 목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은경 자매님도 최근에 지금까지 살던 편한 생활을 접고 믿음으로 장막생활을 결단하고 목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또 이온유 목자님은 집안이 어려운데도 믿음으로 풀타임 목자의 삶을 새롭게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종들의 믿음의 선택을 놀랍도록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꼭 그렇게 해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도 어려우면 꼭 이렇게 목자생활을 해야 하는가?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일반 교회와 같이 평범하게 자유롭게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즐기면 안 되는가?  쓰기 싫은 소감, 팀 모임, 전도 등 부담스런 일들이 때론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고자 선택한 것은 모세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세상의 안일과 쾌락을 좇는 삶보다 기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편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고난의 길인 UBF 목자로 사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 편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편하게 살고 싶고 세상의 재미도 누리며 살고자 했다면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세상의 죄악의 낙을 잠시 즐기고자 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새롭게 모세와 같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목자의 길을 끝까지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회개와 기도를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27~29절은 애굽을 도망갈 때, 출애굽 할 때 모세의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서 모세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바로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애굽을 떠난 믿음입니다. 그는 바로가 두려워서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록 어쩔 수 없이 도망자와 같이 애굽을 떠났지만 다시 올 것을 믿었습니다. 실패자가 아니라 그는 잠시 애굽을 떠나 있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앞두고 있을 때 그는 장자재앙이 있을 것을 알고 믿음으로 유월절 의식을 행했습니다. 믿음으로 했다는 것은 유월절 양의 피를 뿌리며 장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애굽의 모든 장자만 죽이고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장자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29절은 출애굽을 할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출애굽을 하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모세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60만 대군을 이끌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믿음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홍해를 육지같이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홍해는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은 열심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한번 건너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애굽 군인들이 시험하다가 다 빠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은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른 사람이 믿음으로 한다고 해서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신뢰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과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어야 홍해를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처럼 홍해를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바로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으면 길은 얼마든지 생기고 새로운 방법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홍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홍해는 무엇입니까? 건강의 홍해, 물질의 홍해, 취업의 홍해, 전도의 홍해, 관계성 회복의 홍해,  등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홍해를 우리가 믿음으로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적인 머리를 써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홍해를 건너기를 워치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건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홍해가 가로 놓여있을지라도 육지 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앞에 지금 현재 놓여있는 크고 작은 홍해를 믿음으로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살다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정복해야할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웬만한 공격으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을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는 무기를 정비하고 허술한 곳이 어디지? 성을 지키는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해서 철저히 전술전략을 짜서 공략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게 성을  매일 같이 도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방향대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리라 믿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믿음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7일 동안 반복적으로 돌았을 때 일순간에 성이 무너졌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가 철옹성 같은 홍대를 생각할 때, 철옹성 같은 완악한 양들을 생각할 때 상대적으로 움츠려지고 때론 인간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양들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제자양성은 해도 잘 안 된다는 불신이 우리 안에 있는 철옹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때 철옹성 같은 양들의 마음이 오픈되고, 제자양성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번 전국 평신도목자 세미나에서 4명의 목자님들의 제자 양성 성공 사례 발표가 있었습니다. 서울대 한 양은 영재고등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공부를 할 때는 목자님의 표현으로 영재가 아니라 둔재라고 했습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말도 전혀 안하고 질문에 예, 아니오, 만 대답하는 형제였습니다.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믿음으로 인내하고 변화될 소망을 갖고 꾸준히 말씀으로 섬길 때 그 형제님이 변하여 목자로 성장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수양회에서 소감을 썼는데 지금까지 그 형제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역사를 새 학기에 체험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센터도 양들이 변하여 목자가 되는 소망을 새롭게 붙들어야겠습니다.

3.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한 라합(31)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숨은 일등공신은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은 천한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하였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적국인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패배하다면 제일 먼저 자신은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서 있었습니다. 조국 편에 설 것인가? 그래서 정탐꾼을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서서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받을 것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설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말씀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는 결정적인 때에 오직 믿음으로 올바를 선택을 한 것입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선택한 결과 그는 멸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4.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많은 증인들(32~40)
32,33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 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고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본문에 기록된 사사들과 선지자들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약했지만 그들의 믿음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35절 이하에 나오는 어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좀 다른 믿음을 가졌습니다. 앞에서는 믿음으로 승리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 이후에는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36,37절은 믿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혹독한 핍박을 당하고 살았음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믿음으로 살지만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할 수도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39,40절은 히브리서 11장의 결론부분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람들은 1절부터 언급한 믿음의 선배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구약의 선진들이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살게 하시고, 신약의 우리들은 오신 메시야를 바라보고 삶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로 합하여 온전함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결국 구약의 선진들의 믿음은 우리가 있음으로써 온전함을 이루게 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그들의 고생이 의미 있게 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결론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때 믿음으로 선택을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세상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본문에 열거한 모세를 비롯한 많은 믿음의 거장들과 같은 위대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한 죄악의 낙을 사모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고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걸아 가는 위대한 믿음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44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678 창세기 이엘리야 562 06-09
677 창세기 이엘리야 553 06-02
676 창세기 이엘리야 541 05-26
675 창세기 이엘리야 618 05-19
674 창세기 이엘리야 632 05-12
673 창세기 이엘리야 674 05-05
672 창세기 이엘리야 590 04-28
671 창세기 이엘리야 688 04-21
670 창세기 이엘리야 633 04-14
669 고린도서 이엘리야 741 04-07
668 창세기 이엘리야 621 03-31
667 창세기 이엘리야 641 03-24
666 창세기 이엘리야 690 03-17
665 로마서 이엘리야 803 03-10
열람중 특강 섬김이 777 03-0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