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3년 마니산 수양회(히4장-오범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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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수양회 저녁 강의
말씀 / 히 4:12-16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허물진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속죄하시고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자격없는 죄인이 주님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가오니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시고 주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만을 대언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즘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전두환 전대통령입니다. 그의 비자금 문제가 그가 퇴임하고도 25년이 지났는데 샅샅이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전대통령의 집구조 뿐만아니라, 아들들의 비밀계좌, 미술품을 숨긴 장소, 은밀하게 위장된 비밀금고까지 왠만한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며 연일 언론이 중계방송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전대통령의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들추어내어 창피와 망신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어떤 분은 통쾌하다고도 하고, 어떤 분은 불쌍하다고도 말합니다. 저는 저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저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검찰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 분께 담대히 나아가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담대히 나아가며, 모든 분들이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좌우에 날선 검은 로마 군인들이 백병전에 사용하던 예리한 단도를 가리킵니다. 그 검의 이중날은 방패 사이로 보이는 적의 몸과 팔다리를 단번에 찌르고 짜르는데 최상의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평소에도 날카롭게 검날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검은 스치기만 해도 살 속을 파고 들어 오는데, 베이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말씀을 왜 날선 검으로 비유하는 것일까요? 날선 검은 몸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한칼에 팔 다리, 심지어 몸통을 자르기도 합니다. 예리한 수술용 칼은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잘못된 부위를 드러냅니다. 뱃 속 깊은 곳에 있는 종양도 찾아 들어가 도려 냅니다. 최근에는 감마 나이프라는 새로운 칼이 생겨서 뇌 속에 있는 종양도 제거합니다. 검이 갈수록 예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은 아무리 예리할지라도 마음의 생각까지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혼과 영의 병든 곳을 도려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그 속에 더러움, 병, 곪은 상처, 썩은 모습을 밝혀냅니다.
한 형제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어머니 미장원에서 성인 잡지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친구들이 가져 온 안좋은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이런 비디오를 탐닉했습니다. 이로 인해 골수에 정욕이 박혔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자매를 똑바로 쳐다 보지 못했습니다. 자매가 지나가면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도 정말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수에서는 또 한편의 성인 비디오가 만들어져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시도 깨끗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있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온갖 더럽고 추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나는 세포세포에 정욕이 찌들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관절과 골수와 혼에 정욕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영혼도 정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그의 문제와 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병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청소년이 겪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그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 말씀 앞에 섰습니다. 말씀은 그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말씀이 관절과 골수, 곧 세포 세포 속에 찌들어 있는 죄를 보게 했습니다. 혼과 영에 박혀 있는 정욕까지 환하게 드러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말씀이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감추고, 아무리 비밀장막으로 둘러쳐도 말씀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밝히 들어냅니다.
심지어 마음의 생각과 뜻도 판단합니다. 혹시 악한 생각을 품었으면 그것이 악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잘못된 뜻을 세웠으면 잘못을 알려 줍니다.
이 형제는 말씀 앞에서 자신이 매우 위험한 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는 지나가는 자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그냥 예뻐서 쳐다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해 보니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간음을 하려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악독한 살인사건을 보면, 주모자가 대부분 성도착증 환자들입니다. 시작은 정욕입니다. 동영상을 보고, 즐기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성 충동을 이기지 못해 부녀자를 납치하고,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죽입니다. 이런 강간치사범들의 신상을 모아서 평균을 만들었는데 어떤 유형일 것 같습니까? 흉칙한 얼굴의 노숙자의 모습일까요? 경찰청에서 발표했는데, 30대였답니다. 대졸이었답니다. 직장인이었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점잖은 30대 회사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속에 어떤 마음과 계획을 품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검도 이들이 속을 밝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처럼 비춰주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말씀 앞에 서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괴롭고 부끄럽습니다. 죄가 많을수록 더 두렵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형제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인생 소감을 쓰면서는 자신의 더럽고 악한 모습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심지어 엄마까지 간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소감을 쓰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말씀 공부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자기가 큰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두려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관절과 골수와 혼과 영에 찌들어 있는 정욕을 치료하는 것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명하고 중요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말씀을 떠났다면 아마 한국에 성범죄자가 한명 더 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서는 것이 괴로웠을지라도 그가 말씀 앞에 섰기 때문에 그는 정욕 문제를 해결 받았고, 지금은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말씀 앞에 서는 것은 고통입니다.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것은 괴롭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할 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목자가 되고, 나이도 지긋이 들었는데 아직도 죄에 헤매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양들 앞에서 회개하려니 창피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한심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이런 고통, 괴로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면 다 해결되지만 그것을 감추고 살면, 나중에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전대통령 같이 온 국민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이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더 많이 가슴을 쳐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고,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울 사도는 말씀, 곧 율법 앞에서 마음의 탐심을 깊이 발견합니다. 항상 탐심에 져서 끌려 다니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탐심을 이기고 싶은데, 온전히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탐심에 져서 비참하게 되는 자신으로 인해 절망과 죽음의 탄식을 내 뱉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바울도 이렇게 자기 모습에 탄식하는데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말씀 앞에서 이러한 발견, 이러한 탄식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로 진리, 생명의 길을 가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밝히 보게 하는 것은 수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것을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수치스럽지 않게 하려 함이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속을 드러내고 있지만, 장차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앞에서 내 모든 행위와 삶을 낱낱이 판단 받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결산하십니다. 나의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들추어보십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감추더라도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가 드러나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통해 방주에 들어온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멸하셨습니다. 지금은 괴로우면 말씀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를 떠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지금도 앞에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검이 놓여 있고, 장차 또 예리한 그 검 앞에 서게 됩니다.
이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정한다고 부정되지 않고,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현재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말씀의 검 앞에 서야 합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에 사정없이 찔려야 합니다. 관절과 골수가 파 헤쳐져야 합니다. 혼과 영이 쪼개져야 합니다. 마음의 계획과 뜻이 밝히 드러나야 합니다. 아프고 슬퍼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풍병자로 살았습니다. 매일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누워있었습니다. 딱히 잠이 안 올때도 누워 온갖 공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 허리디스크까지 생겼습니다. 제게 가장 큰 위안거리는 정욕뿐이었습니다. 겉은 멀쩡하고 착하게 생겼지만, 저는 정욕에 깊이 병들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누워서, 음란한 상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젊은 날을 허송세월했습니다. 이런 내가 지독히 싫으면서도 불쌍하여 매일 눈물로 이불을 적셨습니다. 이런 저를 예수님은 목자님을 통해 먼저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말씀은 제가 위로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차츰 말씀 앞에서 저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중풍병과 정욕에 병든 내 속 모습을 보고 싶지 않고, 또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다 드러났습니다. 자취방에서 옆방 대학생 누나를 몰래 훔쳐보면서 정욕을 즐겼던 내 과거는 무덤에 가져 가려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 모습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패기 넘치는 당당한 젊은이가 아니라 소망없는 병자여서 괴로웠습니다. 이래저래 괴로워서 계속 잤습니다. 형제 장막방 한쪽에서 겨울 잠을 자는 곰처럼 잠을 잤습니다. 저는 잠자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말씀 앞에서 제가 깊이 절망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소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말씀 앞에서 괴로워했기 때문에 지금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왜 유익할까요? 예리한 말씀의 검에 찔리는 것이 왜 좋을까요?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난 사람은 그러하기에 믿는 도리를 굳게 잡게 됩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the faith we profess)란 말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즉 우리의 신앙 고백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를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속죄의 제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계획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이든지 다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분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났고 영접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죄인임이 드러날 수록 나를 구원하신 은혜도 함께 드러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낱낱이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유익합니다. 믿는 도리를 더욱 굳게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나의 구주임이 확실해지고,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나가는 것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부끄러워도 피해서는 안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려고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더욱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엄밀하게 보면, 나이 먹을수록 죄가 더 많아집니다. 하루를 더 살면 더러움이 더 쌓입니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나이 먹을수록 뒷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앞장 서 나가서 믿는 도리를 더 굳게 잡아야 합니다.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에 사무친 더러움이 드러날 때, 절망하기보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붙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죄인이 와서 붙든다고 떼어 놓으십니까? 또 와서 붙든다고 책망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5절은 우리가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 말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강하면, 능히 죄를 이길 것입니다. 강하면 패배자로 예수님께 오지 않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올 것입니다. 예수님 바지 가랑이를 굳게 붙잡지 않고, 자립적으로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약해서 넘어집니다. 연약해서 또 넘어집니다. 또 넘어집니다.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예수님을 붙들고만 있습니다. 이제 좀 놓고 자립적으로 살면 좋겠는데, 놓고 있을만한 때가 없습니다. 놓을만 하면 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이리 연약할까?” 한숨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은혜를 얻습니다. 마치 연약한 아이가 엄마외에 다른 사람에게 가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보십니까? 동정하십니다. 동정한다는 말은 ‘동일하게 아파한다,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연약함의 세계에 동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말밥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마대자루같은 거친 보자기에 쌓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공생애 기간에는 머리 베고 잘 집도 없이 사셨습니다. 폭풍우가 쳐서 배가 뒤집어지게 되었는데도 주무실 정도로 인생의 피곤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매번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과 같이 사납고 험한 사람에게 시달리셨습니다. 배가 고파 무화과 나무 밑에서, 열매 익을 때도 아닌데, 무화과 한 개라도 찾아낼까 두리번 거리셨습니다. 굶으신 상태에서도 사단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명예와 권세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운명도 아시고, 슬픔도 아시고, 고달프고 피곤한 인생도 아시고, 사단에게 받는 유혹과 시험이 어떤 것인지도 아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죄 없이 조롱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한계도 잘 아십니다. 자신이 몸소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르는 인간의 연약함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를 감싸주시고 능히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리 연약해도 주님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두번 세번 네번 연약함이 드러나도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주님께 갈 수 있습니다. 마음 놓고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병들면 병든 모습을, 약하면 약한 모습을, 더러우면 더러운 모습을, 죄악되면 죄악된 모습을 다 주님께 보여 드리고, 주님께 내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해서 죄에 넘어지는 것을 잘 아십니다. 죄에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육신이 약해서 넘어져 괴로워하는 마음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병든 환자는 의사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살피고, 검사하고, 수술하고, 치료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았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한 두 주 후에 병원에 가고, 몇 개월 후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합니다. 아플 때마다 도움을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 의사이신 주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마다 더러워지고, 죄에 넘어지고, 병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다시 치료 받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 제사장이시며, 선한 목자이시며, 영적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진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입니다. 은혜 베푸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주님은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럽든지 주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면 다 해결을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넘치도록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라는 말은 ‘필요한 때, 적절한 때, 맞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우리는 좋아합니다. 대학입시에 합격해달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응답받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내가 원하는 때에 단번에 모두 이루어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은혜를 주십니다. 여름에는 푸른 신록의 은혜를 주십니다.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는 은혜를 주십니다. 겨울에는 쉬면서 열매를 먹는 은혜를 주십니다. 때를 따라 은혜가 다릅니다. 때에 맞는 은혜를 주십니다. 겨울에 꽃피는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때로 겨울은 겨울로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는 기구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거기에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만 2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양치는 때를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간 이삭을 기다리며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사단은 시험을 합니다. 불신을 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기간이 허송세월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이요,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다른 은혜를 주셔서 총리가 되게 하시고, 출애굽하는데 지도자로 쓰셨고, 이삭을 주셔서 열국의 아비로서 소망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면 주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모양이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나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대에 가고자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제 키가 커트라인에서 1cm가 모자랐습니다. 저는 1cm의 키를 채워기 위해 「키 재는 기계」를 찾아 김포공항까지 갔습니다. 똑바로 서면 자동으로 센서가 내려와서 머리를 탁 치고 가는 기계였습니다. 저는 발뒤꿈치를 살짝 올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가니, 옛날 학교 양호실에서나 보았던 구식 기구가 놓여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어진듯 했는데, 가만히 보니 키를 재는 병사들이 고참이라서 귀찮은 듯 설렁설렁 재고 있었습니다. 다시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설렁설렁 발뒷꿈치를 살짝 들고 넘어가면 될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 앞에 다섯명 정도를 남겨두고 키를 재는 병사가 갑자기 신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은 FM이었습니다. 제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려고 했을 때, “발 붙입니다. 뒤꿈치 내립니다.” 거듭 소리쳤습니다. 제 발가락에 힘이 빠지고 뒤꿈치는 내려왔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커트라인에 1 센치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많은 지원자들 앞에서 팬티만 입고 공개적으로 탈락했습니다. 저는 장교로 입대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소위 계급장이 아닌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산다’는 인제에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장교로 군에 가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병원비 빚으로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돈 만원이 없어서 어머니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돈을 꾸러다닌다는 편지를 받을 때면, 당장 울타리를 넘어 탈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에도 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시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육군에는 사병도 1년이상 복무하면 장교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지원자격이 생겼을 때는 이미 시험이 끝난 후였습니다.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저는 제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상병이 되어 자격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해에만 장교시험이 한 번 더 있게 만드셨습니다. 한 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습니다. 또 각 부대별로 후보자들을 모집하다보니 지원자가 적었고, 제 키를 재는 우리 부대 군의관은 얼굴도 못봤습니다. 키와 몸무게는 제가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신체검사에 통과했습니다. 저는 단계 단계 시험을 치르며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꼈고, 감사가 충만하였습니다. 한번은 면접관이 노래를 한곡 불러보라고 지시했는데, 복음성가를 불렀습니다. 이후로도 매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마침내 장교로 임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제가 처음부터 장교로 임관했다면 군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제가 군생활을 1년정도 해보고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을 때, 그 스케줄에 맞추어 시험시기를 조정하셨고 합격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1년 된 것도 있고, 몇 년이 된 것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때, 그 방법대로 주십시요. 다만 제게 인내를 갖고 그 때까지 기다리게 해주십시오.」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주셨을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으셔도 감사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변함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얻는 것은 그 결과물이 무엇이든 떡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돌이지만 사실은 떡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항상 주시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분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마음이 여렸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소리칠 때마다 마음이 쪼그러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게를 가져와!” 하는 소리를 “시계를 가져와!”로 들어서 엉뚱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이를 답답하게 여긴 아버지는 손을 많이 대셨습니다. 이렇게 주눅이 들다보니 매사에 소심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를 하며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지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라는 외로움으로 매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한 사춘기가 찾아와 성을 알게 되고 정욕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릿속은 날마다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하였고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길고긴 3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 학생회도 가입하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달 용돈을 술 값으로 다 쓰고, 매일 굶다시피 했습니다. 쓰린배를 부여잡고 수업을 빼먹고 3일동안 누워만 있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가져온 쌀에 쌀벌레가 생기면 에프킬러를 뿌려 죽인 후 대충 씻어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제게 하나님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목자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눈뜨고도 코베간다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환한 웃음으로 밥도 사주시고, 제 안부를 물어주시는 목자님이 정말 좋았습니다. 교회에 탁구치는 것 말고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수양회에서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수양회 전까지 저는 건드리면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습니다. 여름수양회 초청을 받고, 1끼 밥값을 수양회비로 낸 것이 서글퍼, 학교 운동장 축구골대에 기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새롭게 보였고, 온 세상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차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차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힘든 신문배달을 하여 학비를 벌고 사병은 물론 장교훈련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병과 군생활을 모두 경험하므로 대대 최우수 소대장으로 인정도 받고 대대참모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지금의 좋은 직장을 주셨고,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아이들도 허락해주셨습니다. 정말 원하는 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센타가 인하대를 개척하기 위해 인천으로 옮겨가며, 제게는 출퇴근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8년 동안 서울 강동과 인천을 오갔습니다. 이직을 하려했지만, 면접을 볼 때마다 이직사유에서 걸렸습니다. 회사 내에 불화가 있다고 하면 참을성이나 인성이 부적합하고, 거리가 멀다고 하면 “이사를 하세요!” 라는 면접관들의 권면만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만둘려고 하는데, 회사에서는 승진하고 팀장 대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작년부터 체력이 딸려 회사 앞에 작은 방을 구하고 주말부부를 시작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왜 이리 인생이 기구한지 슬퍼졌습니다. 이사를 할 형편도, 이직을 할 수도 없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 때에, 저는 하나님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현실이 괴로워 티브이와 운동, 과거의 구습으로 돌아가 음란한 동영상을 보면서 풀었습니다. 이제는 힘빠질 나이도 됐는데 여전히 정욕에 시달리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때마침 회사가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그래 이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하며 사명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 바에야 이렇게라도 뭔가 변화를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님들의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회사는 예기치 않게 이전계획이 보류되었습니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몰라 마음속은 극히 예민해지고 분노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며 나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나의 형편과 곤경을 모두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우리 주님, 나의 추하고 더러운 죄까지도 주님의 보혈로 사해주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겉으로는 믿음좋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내의 표현대로 자기의지가 고래심줄 같아서 징하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증업무를 하는 회사의 특성상, 보증사고가 나서 잠못자고 날밤세울 일이 생겨도 잘 해결되겠지! 하며 깊은 잠과 함께 패스해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6절 말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가 출퇴근이라는 어려움만 바라봐서 그렇지 하나님이 직장 일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주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회사 일을 하며 전국의 모든 지역을 다니고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거래처 옆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도 가보았습니다.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합천 해인사, 해남/장흥의 월출산, 진도, 마산, 함양, 산청, 울산, 영덕, 울진, 경상도 전 지역과 전라도, 충청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보증업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상사들이 회피하여 일찍 팀장이 되었습니다. 위험부담은 있지만 월급도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배울 것이 있고, 제게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연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여러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저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주님 앞으로 더 자주 나가고, 저의 어려움을 가지고도 주님 앞에 나아가 동정을 받고 긍휼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 위로하시는 은혜를 풍성히 받아 가기를 바라십니다. 제게 있어서 연약함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됨을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매일매일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입은 사람은 낮게 하시고, 범죄한 이는 용서받게 하시고,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새 힘을 얻게 하시고, 잘못된 길로 들어간 이는 돌아서게 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바짝 다가서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히 4:12-16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허물진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속죄하시고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자격없는 죄인이 주님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가오니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시고 주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만을 대언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즘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전두환 전대통령입니다. 그의 비자금 문제가 그가 퇴임하고도 25년이 지났는데 샅샅이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전대통령의 집구조 뿐만아니라, 아들들의 비밀계좌, 미술품을 숨긴 장소, 은밀하게 위장된 비밀금고까지 왠만한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며 연일 언론이 중계방송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전대통령의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들추어내어 창피와 망신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어떤 분은 통쾌하다고도 하고, 어떤 분은 불쌍하다고도 말합니다. 저는 저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저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검찰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 분께 담대히 나아가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담대히 나아가며, 모든 분들이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좌우에 날선 검은 로마 군인들이 백병전에 사용하던 예리한 단도를 가리킵니다. 그 검의 이중날은 방패 사이로 보이는 적의 몸과 팔다리를 단번에 찌르고 짜르는데 최상의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평소에도 날카롭게 검날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검은 스치기만 해도 살 속을 파고 들어 오는데, 베이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말씀을 왜 날선 검으로 비유하는 것일까요? 날선 검은 몸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한칼에 팔 다리, 심지어 몸통을 자르기도 합니다. 예리한 수술용 칼은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잘못된 부위를 드러냅니다. 뱃 속 깊은 곳에 있는 종양도 찾아 들어가 도려 냅니다. 최근에는 감마 나이프라는 새로운 칼이 생겨서 뇌 속에 있는 종양도 제거합니다. 검이 갈수록 예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은 아무리 예리할지라도 마음의 생각까지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혼과 영의 병든 곳을 도려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그 속에 더러움, 병, 곪은 상처, 썩은 모습을 밝혀냅니다.
한 형제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어머니 미장원에서 성인 잡지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친구들이 가져 온 안좋은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이런 비디오를 탐닉했습니다. 이로 인해 골수에 정욕이 박혔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자매를 똑바로 쳐다 보지 못했습니다. 자매가 지나가면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도 정말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수에서는 또 한편의 성인 비디오가 만들어져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시도 깨끗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있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온갖 더럽고 추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나는 세포세포에 정욕이 찌들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관절과 골수와 혼에 정욕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영혼도 정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그의 문제와 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병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청소년이 겪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그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 말씀 앞에 섰습니다. 말씀은 그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말씀이 관절과 골수, 곧 세포 세포 속에 찌들어 있는 죄를 보게 했습니다. 혼과 영에 박혀 있는 정욕까지 환하게 드러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말씀이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감추고, 아무리 비밀장막으로 둘러쳐도 말씀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밝히 들어냅니다.
심지어 마음의 생각과 뜻도 판단합니다. 혹시 악한 생각을 품었으면 그것이 악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잘못된 뜻을 세웠으면 잘못을 알려 줍니다.
이 형제는 말씀 앞에서 자신이 매우 위험한 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는 지나가는 자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그냥 예뻐서 쳐다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해 보니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간음을 하려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악독한 살인사건을 보면, 주모자가 대부분 성도착증 환자들입니다. 시작은 정욕입니다. 동영상을 보고, 즐기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성 충동을 이기지 못해 부녀자를 납치하고,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죽입니다. 이런 강간치사범들의 신상을 모아서 평균을 만들었는데 어떤 유형일 것 같습니까? 흉칙한 얼굴의 노숙자의 모습일까요? 경찰청에서 발표했는데, 30대였답니다. 대졸이었답니다. 직장인이었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점잖은 30대 회사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속에 어떤 마음과 계획을 품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검도 이들이 속을 밝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처럼 비춰주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말씀 앞에 서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괴롭고 부끄럽습니다. 죄가 많을수록 더 두렵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형제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인생 소감을 쓰면서는 자신의 더럽고 악한 모습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심지어 엄마까지 간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소감을 쓰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말씀 공부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자기가 큰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두려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관절과 골수와 혼과 영에 찌들어 있는 정욕을 치료하는 것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명하고 중요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말씀을 떠났다면 아마 한국에 성범죄자가 한명 더 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서는 것이 괴로웠을지라도 그가 말씀 앞에 섰기 때문에 그는 정욕 문제를 해결 받았고, 지금은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말씀 앞에 서는 것은 고통입니다.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것은 괴롭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할 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목자가 되고, 나이도 지긋이 들었는데 아직도 죄에 헤매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양들 앞에서 회개하려니 창피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한심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이런 고통, 괴로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면 다 해결되지만 그것을 감추고 살면, 나중에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전대통령 같이 온 국민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이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더 많이 가슴을 쳐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고,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울 사도는 말씀, 곧 율법 앞에서 마음의 탐심을 깊이 발견합니다. 항상 탐심에 져서 끌려 다니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탐심을 이기고 싶은데, 온전히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탐심에 져서 비참하게 되는 자신으로 인해 절망과 죽음의 탄식을 내 뱉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바울도 이렇게 자기 모습에 탄식하는데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말씀 앞에서 이러한 발견, 이러한 탄식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로 진리, 생명의 길을 가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밝히 보게 하는 것은 수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것을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수치스럽지 않게 하려 함이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속을 드러내고 있지만, 장차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앞에서 내 모든 행위와 삶을 낱낱이 판단 받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결산하십니다. 나의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들추어보십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감추더라도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가 드러나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통해 방주에 들어온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멸하셨습니다. 지금은 괴로우면 말씀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를 떠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지금도 앞에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검이 놓여 있고, 장차 또 예리한 그 검 앞에 서게 됩니다.
이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정한다고 부정되지 않고,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현재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 말씀의 검 앞에 서야 합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에 사정없이 찔려야 합니다. 관절과 골수가 파 헤쳐져야 합니다. 혼과 영이 쪼개져야 합니다. 마음의 계획과 뜻이 밝히 드러나야 합니다. 아프고 슬퍼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풍병자로 살았습니다. 매일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누워있었습니다. 딱히 잠이 안 올때도 누워 온갖 공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 허리디스크까지 생겼습니다. 제게 가장 큰 위안거리는 정욕뿐이었습니다. 겉은 멀쩡하고 착하게 생겼지만, 저는 정욕에 깊이 병들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누워서, 음란한 상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젊은 날을 허송세월했습니다. 이런 내가 지독히 싫으면서도 불쌍하여 매일 눈물로 이불을 적셨습니다. 이런 저를 예수님은 목자님을 통해 먼저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말씀은 제가 위로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차츰 말씀 앞에서 저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중풍병과 정욕에 병든 내 속 모습을 보고 싶지 않고, 또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다 드러났습니다. 자취방에서 옆방 대학생 누나를 몰래 훔쳐보면서 정욕을 즐겼던 내 과거는 무덤에 가져 가려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 모습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패기 넘치는 당당한 젊은이가 아니라 소망없는 병자여서 괴로웠습니다. 이래저래 괴로워서 계속 잤습니다. 형제 장막방 한쪽에서 겨울 잠을 자는 곰처럼 잠을 잤습니다. 저는 잠자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말씀 앞에서 제가 깊이 절망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소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말씀 앞에서 괴로워했기 때문에 지금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왜 유익할까요? 예리한 말씀의 검에 찔리는 것이 왜 좋을까요?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말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난 사람은 그러하기에 믿는 도리를 굳게 잡게 됩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the faith we profess)란 말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즉 우리의 신앙 고백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를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속죄의 제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계획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이든지 다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분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났고 영접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죄인임이 드러날 수록 나를 구원하신 은혜도 함께 드러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낱낱이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유익합니다. 믿는 도리를 더욱 굳게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나의 구주임이 확실해지고,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나가는 것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부끄러워도 피해서는 안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려고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더욱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엄밀하게 보면, 나이 먹을수록 죄가 더 많아집니다. 하루를 더 살면 더러움이 더 쌓입니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나이 먹을수록 뒷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앞장 서 나가서 믿는 도리를 더 굳게 잡아야 합니다.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에 사무친 더러움이 드러날 때, 절망하기보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붙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죄인이 와서 붙든다고 떼어 놓으십니까? 또 와서 붙든다고 책망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5절은 우리가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 말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강하면, 능히 죄를 이길 것입니다. 강하면 패배자로 예수님께 오지 않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올 것입니다. 예수님 바지 가랑이를 굳게 붙잡지 않고, 자립적으로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약해서 넘어집니다. 연약해서 또 넘어집니다. 또 넘어집니다.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예수님을 붙들고만 있습니다. 이제 좀 놓고 자립적으로 살면 좋겠는데, 놓고 있을만한 때가 없습니다. 놓을만 하면 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이리 연약할까?” 한숨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은혜를 얻습니다. 마치 연약한 아이가 엄마외에 다른 사람에게 가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보십니까? 동정하십니다. 동정한다는 말은 ‘동일하게 아파한다,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연약함의 세계에 동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말밥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마대자루같은 거친 보자기에 쌓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공생애 기간에는 머리 베고 잘 집도 없이 사셨습니다. 폭풍우가 쳐서 배가 뒤집어지게 되었는데도 주무실 정도로 인생의 피곤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매번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과 같이 사납고 험한 사람에게 시달리셨습니다. 배가 고파 무화과 나무 밑에서, 열매 익을 때도 아닌데, 무화과 한 개라도 찾아낼까 두리번 거리셨습니다. 굶으신 상태에서도 사단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명예와 권세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운명도 아시고, 슬픔도 아시고, 고달프고 피곤한 인생도 아시고, 사단에게 받는 유혹과 시험이 어떤 것인지도 아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죄 없이 조롱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한계도 잘 아십니다. 자신이 몸소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르는 인간의 연약함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를 감싸주시고 능히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리 연약해도 주님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두번 세번 네번 연약함이 드러나도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주님께 갈 수 있습니다. 마음 놓고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병들면 병든 모습을, 약하면 약한 모습을, 더러우면 더러운 모습을, 죄악되면 죄악된 모습을 다 주님께 보여 드리고, 주님께 내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해서 죄에 넘어지는 것을 잘 아십니다. 죄에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육신이 약해서 넘어져 괴로워하는 마음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병든 환자는 의사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살피고, 검사하고, 수술하고, 치료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았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한 두 주 후에 병원에 가고, 몇 개월 후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합니다. 아플 때마다 도움을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 의사이신 주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마다 더러워지고, 죄에 넘어지고, 병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다시 치료 받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 제사장이시며, 선한 목자이시며, 영적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진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입니다. 은혜 베푸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주님은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럽든지 주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면 다 해결을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넘치도록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라는 말은 ‘필요한 때, 적절한 때, 맞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우리는 좋아합니다. 대학입시에 합격해달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응답받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내가 원하는 때에 단번에 모두 이루어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은혜를 주십니다. 여름에는 푸른 신록의 은혜를 주십니다.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는 은혜를 주십니다. 겨울에는 쉬면서 열매를 먹는 은혜를 주십니다. 때를 따라 은혜가 다릅니다. 때에 맞는 은혜를 주십니다. 겨울에 꽃피는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때로 겨울은 겨울로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는 기구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거기에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만 2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양치는 때를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간 이삭을 기다리며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사단은 시험을 합니다. 불신을 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기간이 허송세월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이요,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다른 은혜를 주셔서 총리가 되게 하시고, 출애굽하는데 지도자로 쓰셨고, 이삭을 주셔서 열국의 아비로서 소망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면 주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모양이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나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대에 가고자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제 키가 커트라인에서 1cm가 모자랐습니다. 저는 1cm의 키를 채워기 위해 「키 재는 기계」를 찾아 김포공항까지 갔습니다. 똑바로 서면 자동으로 센서가 내려와서 머리를 탁 치고 가는 기계였습니다. 저는 발뒤꿈치를 살짝 올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가니, 옛날 학교 양호실에서나 보았던 구식 기구가 놓여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어진듯 했는데, 가만히 보니 키를 재는 병사들이 고참이라서 귀찮은 듯 설렁설렁 재고 있었습니다. 다시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설렁설렁 발뒷꿈치를 살짝 들고 넘어가면 될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 앞에 다섯명 정도를 남겨두고 키를 재는 병사가 갑자기 신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은 FM이었습니다. 제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려고 했을 때, “발 붙입니다. 뒤꿈치 내립니다.” 거듭 소리쳤습니다. 제 발가락에 힘이 빠지고 뒤꿈치는 내려왔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커트라인에 1 센치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많은 지원자들 앞에서 팬티만 입고 공개적으로 탈락했습니다. 저는 장교로 입대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소위 계급장이 아닌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산다’는 인제에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장교로 군에 가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병원비 빚으로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돈 만원이 없어서 어머니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돈을 꾸러다닌다는 편지를 받을 때면, 당장 울타리를 넘어 탈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에도 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시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육군에는 사병도 1년이상 복무하면 장교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지원자격이 생겼을 때는 이미 시험이 끝난 후였습니다.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저는 제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상병이 되어 자격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해에만 장교시험이 한 번 더 있게 만드셨습니다. 한 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습니다. 또 각 부대별로 후보자들을 모집하다보니 지원자가 적었고, 제 키를 재는 우리 부대 군의관은 얼굴도 못봤습니다. 키와 몸무게는 제가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신체검사에 통과했습니다. 저는 단계 단계 시험을 치르며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꼈고, 감사가 충만하였습니다. 한번은 면접관이 노래를 한곡 불러보라고 지시했는데, 복음성가를 불렀습니다. 이후로도 매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마침내 장교로 임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제가 처음부터 장교로 임관했다면 군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제가 군생활을 1년정도 해보고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을 때, 그 스케줄에 맞추어 시험시기를 조정하셨고 합격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1년 된 것도 있고, 몇 년이 된 것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때, 그 방법대로 주십시요. 다만 제게 인내를 갖고 그 때까지 기다리게 해주십시오.」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주셨을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으셔도 감사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변함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얻는 것은 그 결과물이 무엇이든 떡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돌이지만 사실은 떡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항상 주시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분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마음이 여렸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소리칠 때마다 마음이 쪼그러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게를 가져와!” 하는 소리를 “시계를 가져와!”로 들어서 엉뚱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이를 답답하게 여긴 아버지는 손을 많이 대셨습니다. 이렇게 주눅이 들다보니 매사에 소심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를 하며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지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라는 외로움으로 매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한 사춘기가 찾아와 성을 알게 되고 정욕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릿속은 날마다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하였고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길고긴 3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 학생회도 가입하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달 용돈을 술 값으로 다 쓰고, 매일 굶다시피 했습니다. 쓰린배를 부여잡고 수업을 빼먹고 3일동안 누워만 있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가져온 쌀에 쌀벌레가 생기면 에프킬러를 뿌려 죽인 후 대충 씻어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제게 하나님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목자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눈뜨고도 코베간다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환한 웃음으로 밥도 사주시고, 제 안부를 물어주시는 목자님이 정말 좋았습니다. 교회에 탁구치는 것 말고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수양회에서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수양회 전까지 저는 건드리면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습니다. 여름수양회 초청을 받고, 1끼 밥값을 수양회비로 낸 것이 서글퍼, 학교 운동장 축구골대에 기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새롭게 보였고, 온 세상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차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차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힘든 신문배달을 하여 학비를 벌고 사병은 물론 장교훈련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병과 군생활을 모두 경험하므로 대대 최우수 소대장으로 인정도 받고 대대참모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지금의 좋은 직장을 주셨고,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아이들도 허락해주셨습니다. 정말 원하는 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센타가 인하대를 개척하기 위해 인천으로 옮겨가며, 제게는 출퇴근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8년 동안 서울 강동과 인천을 오갔습니다. 이직을 하려했지만, 면접을 볼 때마다 이직사유에서 걸렸습니다. 회사 내에 불화가 있다고 하면 참을성이나 인성이 부적합하고, 거리가 멀다고 하면 “이사를 하세요!” 라는 면접관들의 권면만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만둘려고 하는데, 회사에서는 승진하고 팀장 대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작년부터 체력이 딸려 회사 앞에 작은 방을 구하고 주말부부를 시작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왜 이리 인생이 기구한지 슬퍼졌습니다. 이사를 할 형편도, 이직을 할 수도 없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 때에, 저는 하나님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현실이 괴로워 티브이와 운동, 과거의 구습으로 돌아가 음란한 동영상을 보면서 풀었습니다. 이제는 힘빠질 나이도 됐는데 여전히 정욕에 시달리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때마침 회사가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그래 이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하며 사명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 바에야 이렇게라도 뭔가 변화를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님들의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회사는 예기치 않게 이전계획이 보류되었습니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몰라 마음속은 극히 예민해지고 분노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며 나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나의 형편과 곤경을 모두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우리 주님, 나의 추하고 더러운 죄까지도 주님의 보혈로 사해주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겉으로는 믿음좋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내의 표현대로 자기의지가 고래심줄 같아서 징하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증업무를 하는 회사의 특성상, 보증사고가 나서 잠못자고 날밤세울 일이 생겨도 잘 해결되겠지! 하며 깊은 잠과 함께 패스해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6절 말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가 출퇴근이라는 어려움만 바라봐서 그렇지 하나님이 직장 일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주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회사 일을 하며 전국의 모든 지역을 다니고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거래처 옆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도 가보았습니다.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합천 해인사, 해남/장흥의 월출산, 진도, 마산, 함양, 산청, 울산, 영덕, 울진, 경상도 전 지역과 전라도, 충청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보증업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상사들이 회피하여 일찍 팀장이 되었습니다. 위험부담은 있지만 월급도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배울 것이 있고, 제게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연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여러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저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주님 앞으로 더 자주 나가고, 저의 어려움을 가지고도 주님 앞에 나아가 동정을 받고 긍휼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 위로하시는 은혜를 풍성히 받아 가기를 바라십니다. 제게 있어서 연약함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됨을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매일매일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입은 사람은 낮게 하시고, 범죄한 이는 용서받게 하시고,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새 힘을 얻게 하시고, 잘못된 길로 들어간 이는 돌아서게 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바짝 다가서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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