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 15강(22,23장) 독자도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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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15 강
말씀 | 창세기 22,23장
요절 | 창세기 22:12
독자도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를 받고 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마엘 문제도 해결 받고 이삭도 낳고 이제 아무 인생 문제가 없는 가운데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어린 사람에게 어른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믿음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생동안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란 아브라함이 모든 시련을 다 극복하고 그렇게 바라던 아들 이삭을 낳고 평안한 가운데 지내고 있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물질을 주시고 자녀를 주시고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게 하시고 주변의 왕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언약을 맺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라고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이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된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십니다. 시험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에 자족하게 되면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 속에서 믿음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을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주시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형식을 갖추고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사랑하여 그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택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를 극한 환경 속에서 시험을 하십니다. 마치 스마트 폰을 만들 때 강도시험을 하고, 충돌시험을 하고 아주 뜨거운 기온에서, 또는 차가운 기온에서 여러 가지 기능들을 시험하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만 강도 높은 시험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하실수록 크게 시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그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영혼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네 아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비가 아들을 죽이라니! 아브라함의 집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은 많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소와 양과 염소와 금과 은이 있었습니다. 굳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 많은 종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것을 두고 하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까? 이삭은 그에게 뿐만 아니라 사라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삭이 뒤에 순순히 자신을 드리는 것을 볼 때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양보심이 있습니다. 그의 인품이 흠 잡을 데 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 말씀은 쓸 말이 없어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 전에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그때 그는 많은 근심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집에 남은 것은 독자 이삭뿐입니다. 만일 독자 이삭이 죽는다면 그의 집에는 남아 있는 자손이 없습니다. 그를 따라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빛은 꺼지고 그의 이름은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사라도 늙었고 아브라함도 늙었으니 이제 그의 집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의 근원이고 큰 민족이고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하던 그 모든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느니 자신이 죽는 것을 기꺼이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무엇을 훈련하고자 하셨을까요? 12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한 마디의 저항도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정당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까? 지금까지 당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내 사랑하는 자식의 피를 즐기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험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한 내용이 없습니다. 이 시험의 무게를 경감시켜 달라는 기도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이유를 묻거나 타당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단 한 마디의 주저하는 듯한 질문이 없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제까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죽어야만 하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조금 더 오래 데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 할 일을 내일 하라는 전략으로 신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신속하게, 민첩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번제에 쓸 나무를 직접 쪼갰습니다. 하인들을 시켜도 되지만 자신이 직접 나무를 쪼갰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천한 일이 없다, 제사에 쓸 나무를 쪼개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나무를 쪼개면서 자기의 마음이 쪼개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나무를 쪼개다니!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진심을 다해서 받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나귀에게 메우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모리아 산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산 바로 골고다 갈보리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일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이삭을 얻기 위해서 기다렸던 25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삼일에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봤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습니다. 종들을 산 밑에 두고 아들과 단 둘이 산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아들을 잡고자 할 때 종들의 방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었다면 종들을 데리고 가서 내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는데 그들이 말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라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야기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표현했습니다. 번제는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없이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고통 당하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 고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을 목격하셔야만 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시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이삭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동안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 속에 있던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부활 신앙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7-19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이삭의 어깨에 나무를 지울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도 더 큰 짐이 얹혀졌을 것입니다.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지고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아들아?” 이삭이 말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이삭의 순진한 이 질문에 아브라함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말라버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고 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계속 길을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몸과 같던 자신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이제까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성으로 판단할 때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한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법칙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실 수 있는 권세자이십니다.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삭은 장성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자 반항했다면 아브라함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농촌에서 돼지나 닭 한 마리만 잡으려고 해도 난리법석을 피우는데 젊은 이삭이 살고자 했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손을 들어 그 아들을 즉사시키려고 할 때였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하나님은 흡족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그를 죽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 명령에 절대 순종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존경, 최고의 신뢰,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그 마음 첫 자리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막 8:34-36)” 나에게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내가 좋아하고 내 생의 전부라고 하는 것을 놓아야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챙길 것 다 챙기고 가질 것 다 가지면서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것이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입니다. 캠브리지 세븐의 한 사람이었던 C.T. 스터드는 크리켓 선수이고 가장 촉망받는 지성인이었고 그의 가문은 훌륭하였고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무 기둥만 있는 천막으로 된 움막에서 일생을 살았고 그곳에서 뼈를 묻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희생과 헌신은 헌신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하여 감격할 뿐이다.” 시카고의 정요셉 선교사님은 한국에 있을 때 교수 요원으로 장래가 보장되었던 분이지만 미국 선교사로 나아가 일생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다시 우간다에 선교사로 나아가서 일대일을 모범적으로 하셨습니다. 처음에 우간다에 갔을 때는 주일 예배가 30명 정도였는데 정요셉 · 에스더 선교사님의 헌신의 본을 받고 불이 붙어서 지금은 100명이 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한 사람은 역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양을 잡아 자기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잡아서 번제로 드린 어린 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려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어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나의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지만, 그 목적은 나에게 더 큰 복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잔인한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 되기 원하십니다. 영적인 질서가 분명한가 보기 원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도 나를 신뢰하시고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6-18).”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 말씀 속에는 메시아적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씨’는 단수 명사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적인 사탄의 성문을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대적인 사탄의 성문을 부수는 사건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구원역사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사건은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서 에덴동산을 빼앗겼던 것을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되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지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줄기차게 훈련하십니다. 시련을 주시고 연단하십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더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22,23장
요절 | 창세기 22:12
독자도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를 받고 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마엘 문제도 해결 받고 이삭도 낳고 이제 아무 인생 문제가 없는 가운데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어린 사람에게 어른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믿음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생동안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란 아브라함이 모든 시련을 다 극복하고 그렇게 바라던 아들 이삭을 낳고 평안한 가운데 지내고 있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물질을 주시고 자녀를 주시고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게 하시고 주변의 왕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언약을 맺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라고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이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된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십니다. 시험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에 자족하게 되면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 속에서 믿음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을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주시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형식을 갖추고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사랑하여 그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택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를 극한 환경 속에서 시험을 하십니다. 마치 스마트 폰을 만들 때 강도시험을 하고, 충돌시험을 하고 아주 뜨거운 기온에서, 또는 차가운 기온에서 여러 가지 기능들을 시험하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만 강도 높은 시험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하실수록 크게 시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그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영혼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네 아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비가 아들을 죽이라니! 아브라함의 집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은 많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소와 양과 염소와 금과 은이 있었습니다. 굳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 많은 종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것을 두고 하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까? 이삭은 그에게 뿐만 아니라 사라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삭이 뒤에 순순히 자신을 드리는 것을 볼 때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양보심이 있습니다. 그의 인품이 흠 잡을 데 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 말씀은 쓸 말이 없어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 전에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그때 그는 많은 근심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집에 남은 것은 독자 이삭뿐입니다. 만일 독자 이삭이 죽는다면 그의 집에는 남아 있는 자손이 없습니다. 그를 따라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빛은 꺼지고 그의 이름은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사라도 늙었고 아브라함도 늙었으니 이제 그의 집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의 근원이고 큰 민족이고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하던 그 모든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느니 자신이 죽는 것을 기꺼이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무엇을 훈련하고자 하셨을까요? 12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한 마디의 저항도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정당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까? 지금까지 당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내 사랑하는 자식의 피를 즐기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험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한 내용이 없습니다. 이 시험의 무게를 경감시켜 달라는 기도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이유를 묻거나 타당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단 한 마디의 주저하는 듯한 질문이 없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제까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죽어야만 하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조금 더 오래 데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 할 일을 내일 하라는 전략으로 신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신속하게, 민첩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번제에 쓸 나무를 직접 쪼갰습니다. 하인들을 시켜도 되지만 자신이 직접 나무를 쪼갰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천한 일이 없다, 제사에 쓸 나무를 쪼개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나무를 쪼개면서 자기의 마음이 쪼개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나무를 쪼개다니!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진심을 다해서 받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나귀에게 메우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모리아 산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산 바로 골고다 갈보리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일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이삭을 얻기 위해서 기다렸던 25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삼일에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봤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습니다. 종들을 산 밑에 두고 아들과 단 둘이 산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아들을 잡고자 할 때 종들의 방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었다면 종들을 데리고 가서 내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는데 그들이 말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라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야기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표현했습니다. 번제는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없이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고통 당하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 고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을 목격하셔야만 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시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이삭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동안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 속에 있던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부활 신앙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7-19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이삭의 어깨에 나무를 지울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도 더 큰 짐이 얹혀졌을 것입니다.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지고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아들아?” 이삭이 말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이삭의 순진한 이 질문에 아브라함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말라버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고 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계속 길을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몸과 같던 자신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이제까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성으로 판단할 때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한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법칙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실 수 있는 권세자이십니다.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삭은 장성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자 반항했다면 아브라함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농촌에서 돼지나 닭 한 마리만 잡으려고 해도 난리법석을 피우는데 젊은 이삭이 살고자 했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손을 들어 그 아들을 즉사시키려고 할 때였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하나님은 흡족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그를 죽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 명령에 절대 순종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존경, 최고의 신뢰,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그 마음 첫 자리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막 8:34-36)” 나에게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내가 좋아하고 내 생의 전부라고 하는 것을 놓아야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챙길 것 다 챙기고 가질 것 다 가지면서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것이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입니다. 캠브리지 세븐의 한 사람이었던 C.T. 스터드는 크리켓 선수이고 가장 촉망받는 지성인이었고 그의 가문은 훌륭하였고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무 기둥만 있는 천막으로 된 움막에서 일생을 살았고 그곳에서 뼈를 묻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희생과 헌신은 헌신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하여 감격할 뿐이다.” 시카고의 정요셉 선교사님은 한국에 있을 때 교수 요원으로 장래가 보장되었던 분이지만 미국 선교사로 나아가 일생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다시 우간다에 선교사로 나아가서 일대일을 모범적으로 하셨습니다. 처음에 우간다에 갔을 때는 주일 예배가 30명 정도였는데 정요셉 · 에스더 선교사님의 헌신의 본을 받고 불이 붙어서 지금은 100명이 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한 사람은 역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양을 잡아 자기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잡아서 번제로 드린 어린 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려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어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나의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지만, 그 목적은 나에게 더 큰 복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잔인한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 되기 원하십니다. 영적인 질서가 분명한가 보기 원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도 나를 신뢰하시고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6-18).”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 말씀 속에는 메시아적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씨’는 단수 명사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적인 사탄의 성문을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대적인 사탄의 성문을 부수는 사건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구원역사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사건은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서 에덴동산을 빼앗겼던 것을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되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지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줄기차게 훈련하십니다. 시련을 주시고 연단하십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더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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