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3년 성탄 1강(1: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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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성탄 제 1 강
말씀 | 요한복음 1:1-14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14년 성탄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가정과 온 누리에 가득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은 참으로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의미있는 연말을 보내야겠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6만 5천여 관중이 모인 가운데 400미터 결승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선수 데렉 레드먼드는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단연 선두로 나섰습니다. 그는 전심전력해서 달렸습니다. 결승선 175미터를 남기고 데렉은 뭔가 뻥 터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뒷다리 관절 부근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총에 맞은 듯 절름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는 왼발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무릎 관절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의료진이 급히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스탠드 상단에서 그 광경을 본 아버지 짐 레드먼드가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트랙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짐은 트랙에 들어설 아무 명분도 자격도 없었지만 오직 아들에게 가서 아들을 도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올림픽 메달이 영영 날아갔다는 것을 깨달은 데렉 레드먼드는 눈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왔지만 데렉은 “안 돼요. 난 결승선을 통과할 겁니다. 들것에 누워서는 결승선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라며 거부했습니다. 데렉이 절룩거리며 트랙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경기를 마쳤고 미국 선수 시티브 루이스가 우승을 차지한 뒤였습니다. 사람들은 ‘데렉이 저러다 말겠지. 결승선까지는 가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주저 않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쪽 다리로 계속 껑충껑충 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뚝거리며 끝까지 갈 작정이었습니다. 관중들은 하나둘 일어서서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환호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데렉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환호성에 답하는 몸짓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영혼을 위해 결승선을 향해 갈 뿐이었습니다. 고통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관중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더 크게 박수를 치며 점점 더 열광적으로 응원했습니다.
이윽고 그의 아버지 짐이 스탠드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통제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보안 요원을 피하면서 아들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보안 요원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저 아인 내 아들이오. 난 아들을 도와야 해요!” 짐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드디어 결승선 120미터를 남겨둔 순간 짐이 데렉에게 다가가 그를 얼싸안았습니다. “아들아, 아버지 여기 있다! 어떻게 하고 싶니?” “끝까지 갈 거예요.” “그래, 같이 가자.” 짐이 아들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6만 5천 관중이 박수치며 환호하는 가운데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습니다. 결승선 앞에서 짐이 어깨동무를 풀었습니다. 데렉은 혼자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짐이 데렉을 두 팔 벌려 껴안았고, 둘 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탠드에 있던 관중도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세계의 모든 시청자들도 함께 울었습니다.(파더십에서 인용)」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결정적인 순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참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꿀과 같이 달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힘이 생기고 만족을 얻습니다.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배 속에 흐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참된 만족을 누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또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방황하게 됩니다. 사는 것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의미있게 살 수 없습니다.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다가 때가 되면 죽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없으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대의 가치가 됩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는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가치를 생각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에 힘을 쓰지 않습니다. 좀 고생스럽더라고 영원히 남을 일, 의미 있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무지 때문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어두움. 죄와 정죄감으로 인한 어두움, 열등감, 운명주의 상처들로 인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취직이 안 되고 미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중 1위이며 평균의 3배라고 합니다. 2위가 헝가리인데 헝가리에 비해 두 배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가정 파괴를 경험하고 절망한 사람들, 기러기 아빠들 중에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 취직 경쟁에 밀려서 소망이 없을 때 그런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말씀의 빛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강해도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고, 불의가 의를 이기지 못합니다. 거짓이 진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빛이신 예수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보혈과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되사 각자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 우리의 어두운 생각,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 비춰주사 기쁨과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공의대로 한다면 냄새나는 죄인들을 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요 자기 비하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계적인 분이 되시고,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볼 수 없는 존재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 죄는 없으시지만 죄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로서의 신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성을 덧입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in the days of our Lord)로 갈라놓는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성육신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높으신 보좌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을 다루고 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자신들과 함께 거하신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으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비우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처럼 자신을 하나님과 등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불러 함께 하셨습니다. 가난으로 고통하던 그가 세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만족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모든 장부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태 복음서를 남겼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을 떠나 생존하기도 버거운 나라에 들어가서 선교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나이지리아에서 온 듀크 형제는 왜 한국에서는 전기가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기가 늘 공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기본생활이 되지 않는 그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사님들로 인해서 그들이 생명을 얻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어두움에서 나와 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성육신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대학생들이 구원을 받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학교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아저씨, 아줌마로 생각하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화를 해도 공감대가 잘 형성되지 않습니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학생들과 함께 하려면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안성센터의 박마리아 사모님은 60대인데도 캠퍼스에 올라가서 전도를 하고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공부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분은 학생들과 세대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하고도 쉽게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세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을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본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존재로만 계신다면 우리는 그를 본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셔서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나아가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새벽 기도를 함으로 날마다 도움이 필요한 양들을 섬길 힘과 지혜를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대화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피는 적혈구와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는 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고 병균이 침투하면 싸워서 박살을 냅니다.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집니다. 아직까지 피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피는 신비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대가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사하는 길은 깨끗한 피로 화목제물, 희생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인생의 질고를 지고 가는 우리와 함께 짐을 지시고 우리를 부축해 주시고 우리를 그 나라에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도 아닙니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천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마음껏 공부하며 세상에서 성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말로 아버지를 잘 만난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입니까?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는 세상의 부자 자녀들이 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과 권세를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먹을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이시겠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말씀 | 요한복음 1:1-14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14년 성탄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가정과 온 누리에 가득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은 참으로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의미있는 연말을 보내야겠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6만 5천여 관중이 모인 가운데 400미터 결승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선수 데렉 레드먼드는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단연 선두로 나섰습니다. 그는 전심전력해서 달렸습니다. 결승선 175미터를 남기고 데렉은 뭔가 뻥 터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뒷다리 관절 부근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총에 맞은 듯 절름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는 왼발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무릎 관절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의료진이 급히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스탠드 상단에서 그 광경을 본 아버지 짐 레드먼드가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트랙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짐은 트랙에 들어설 아무 명분도 자격도 없었지만 오직 아들에게 가서 아들을 도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올림픽 메달이 영영 날아갔다는 것을 깨달은 데렉 레드먼드는 눈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왔지만 데렉은 “안 돼요. 난 결승선을 통과할 겁니다. 들것에 누워서는 결승선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라며 거부했습니다. 데렉이 절룩거리며 트랙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경기를 마쳤고 미국 선수 시티브 루이스가 우승을 차지한 뒤였습니다. 사람들은 ‘데렉이 저러다 말겠지. 결승선까지는 가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주저 않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쪽 다리로 계속 껑충껑충 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뚝거리며 끝까지 갈 작정이었습니다. 관중들은 하나둘 일어서서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환호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데렉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환호성에 답하는 몸짓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영혼을 위해 결승선을 향해 갈 뿐이었습니다. 고통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관중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더 크게 박수를 치며 점점 더 열광적으로 응원했습니다.
이윽고 그의 아버지 짐이 스탠드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통제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보안 요원을 피하면서 아들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보안 요원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저 아인 내 아들이오. 난 아들을 도와야 해요!” 짐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드디어 결승선 120미터를 남겨둔 순간 짐이 데렉에게 다가가 그를 얼싸안았습니다. “아들아, 아버지 여기 있다! 어떻게 하고 싶니?” “끝까지 갈 거예요.” “그래, 같이 가자.” 짐이 아들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6만 5천 관중이 박수치며 환호하는 가운데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습니다. 결승선 앞에서 짐이 어깨동무를 풀었습니다. 데렉은 혼자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짐이 데렉을 두 팔 벌려 껴안았고, 둘 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탠드에 있던 관중도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세계의 모든 시청자들도 함께 울었습니다.(파더십에서 인용)」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결정적인 순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참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꿀과 같이 달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힘이 생기고 만족을 얻습니다.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배 속에 흐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참된 만족을 누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또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방황하게 됩니다. 사는 것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의미있게 살 수 없습니다.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다가 때가 되면 죽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없으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대의 가치가 됩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는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가치를 생각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에 힘을 쓰지 않습니다. 좀 고생스럽더라고 영원히 남을 일, 의미 있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무지 때문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어두움. 죄와 정죄감으로 인한 어두움, 열등감, 운명주의 상처들로 인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취직이 안 되고 미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중 1위이며 평균의 3배라고 합니다. 2위가 헝가리인데 헝가리에 비해 두 배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가정 파괴를 경험하고 절망한 사람들, 기러기 아빠들 중에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 취직 경쟁에 밀려서 소망이 없을 때 그런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말씀의 빛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강해도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고, 불의가 의를 이기지 못합니다. 거짓이 진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빛이신 예수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보혈과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되사 각자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 우리의 어두운 생각,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 비춰주사 기쁨과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공의대로 한다면 냄새나는 죄인들을 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요 자기 비하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계적인 분이 되시고,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볼 수 없는 존재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 죄는 없으시지만 죄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로서의 신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성을 덧입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in the days of our Lord)로 갈라놓는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성육신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높으신 보좌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을 다루고 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자신들과 함께 거하신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으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비우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처럼 자신을 하나님과 등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불러 함께 하셨습니다. 가난으로 고통하던 그가 세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만족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모든 장부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태 복음서를 남겼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을 떠나 생존하기도 버거운 나라에 들어가서 선교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나이지리아에서 온 듀크 형제는 왜 한국에서는 전기가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기가 늘 공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기본생활이 되지 않는 그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사님들로 인해서 그들이 생명을 얻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어두움에서 나와 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성육신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대학생들이 구원을 받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학교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아저씨, 아줌마로 생각하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화를 해도 공감대가 잘 형성되지 않습니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학생들과 함께 하려면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안성센터의 박마리아 사모님은 60대인데도 캠퍼스에 올라가서 전도를 하고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공부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분은 학생들과 세대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하고도 쉽게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세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을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본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존재로만 계신다면 우리는 그를 본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셔서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나아가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새벽 기도를 함으로 날마다 도움이 필요한 양들을 섬길 힘과 지혜를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대화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피는 적혈구와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는 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고 병균이 침투하면 싸워서 박살을 냅니다.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집니다. 아직까지 피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피는 신비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대가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사하는 길은 깨끗한 피로 화목제물, 희생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인생의 질고를 지고 가는 우리와 함께 짐을 지시고 우리를 부축해 주시고 우리를 그 나라에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도 아닙니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천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마음껏 공부하며 세상에서 성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말로 아버지를 잘 만난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입니까?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는 세상의 부자 자녀들이 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과 권세를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먹을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이시겠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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