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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3년 창세기25강(42-45장) 나를 보낸 이는 하나님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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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08회 작성일 13-11-1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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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25 강 
말씀 | 창세기 42:1-45:28
요절 | 창세기 45:8

나를 보낸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고자 했던 형들,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형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품고 섬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는 요셉의 주권신앙, 섭리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요셉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과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형들을 회개로 이끄는 사랑을 하는 요셉 :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듣고 아들들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은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재난이 아이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습니다.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창고를 열고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이는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꿈에서 보았던 장면입니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 땅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정탐꾼 누명을 씌웠습니다. 과거에는 형들이 자신을 함정에 던졌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형들을 함정에 몰아넣습니다. 형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함정에 던졌지만 요셉은 형들을 돕기 위해서 함정에 던져 넣습니다. 요셉은 하나는 없어졌다는 말을 근거로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다 갇히어 있고 하나를 보내어 아우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삼일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형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 요셉이 겪었던 괴로운, 그 괴로움이 그대로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르우벤은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현재의 어려움을 과거 요셉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은 죄의식으로 고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문제는 세월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죄의식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게 하고 마음에 평강을 앗아갑니다.

  우리가 이런 과거의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행하던 죄악들을,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자행한 죄악들, 원치 않게 상황에 끌려 지은 죄악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은 죄악들을 고난을 통하여 성령께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가 이때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라도 죄 없다 해 주시고 평강과 자유함을 주십니다.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시는 죄악들을 통회하며 자복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기를 기도합니다.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듣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형들이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들에 대한 사랑이 그로 눈물짓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남은 형제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요셉은 정에 치우치지 않고 의에 기초해서 형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다윗이나 엘리는 자신들의 자녀들을 인간적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버릇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역의 칼을 들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망령되이 행하다가 전쟁에 나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을 도울 때에 그의 죄를 덮어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또한 죄를 깊이 회개하도록 돕고 훈련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형제의 죄가 나와 관계될 때 내가 덮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핵심을 비껴가기 쉽습니다. 훈련하는 악역을 피하는 이유는 자기 사랑입니다. 때로는 이를 극복하고 훈련하는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따스하지만 때로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형들의 관계회복이 중요하지만 먼저 형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형들이 자기 발견하고 회개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돕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도울 수 없는 그 아들들을 요셉을 통해서 연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감옥에 남게 했습니다. 이는 그가 형제들을 선동해서 요셉을 박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르우벤이 자기를 구하고자 했다는 것을 이미 들었습니다. 시므온은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또 르우벤 다음으로 연장자였습니다. 요셉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곡물을 주고 돈은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길 양식을 주어 보냈습니다.

  아들들이 돌아왔을 때 야곱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이제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 자식 놈들이 다 자신을 해롭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르우벤이 시므온과 베냐민을 아버지께 데려오지 아니하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지만 야곱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자 이제 애굽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아우를 데려가지 않으면 자신을 볼 수 없고 양식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베냐민을 위하여 담보가 되겠다고 합니다. 만일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지겠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원래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생과 아버지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화되었습니다. 

  유다는 야곱에게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을 것이라고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 사람에게 줄 예물을 준비합니다.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졌던 돈의 갑절을 가지고 갑니다. 또 아우 베냐민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43:14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 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이 또 한 번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그토록 사랑하던 라헬을 아내들 중 제일 먼저 잃었습니다. 자식들 중 끔찍이 아끼던 요셉을 잃었습니다. 그는 좀 심하게 말해서 다른 자식들은 다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베냐민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마지막으로 움켜쥐고자 했던 베냐민마저 잃게 될 위험에 놓였습니다. 야곱의 집착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기중심성이 깨어지도록 훈련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처럼 야곱도 이제 사랑하는 베냐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붙들고 집착하는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움켜쥐고 있는 나의 자존심, 나의 자녀, 물질, 명예, 역사 등등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요셉은 다시 온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시므온을 그들에게 이끌어내고 점심을 함께 먹을 준비를 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동생 베냐민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동생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에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였습니다. 형제들의 상을 따로 차리고 나이에 따라 앉혔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상히 여겼습니다. 어찌 하여 이렇게 정확하게 자기들의 나이에 따라서 자리를 배치하는지 놀랐습니다. 그들은 맛있고 즐겁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내면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놀랄만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것은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도록 그 집 청지기에게 명한 것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더 멀리 가기 전에 청지기가 쫓아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서 이런 일은 자신들이 결단코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사해 봐서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주인의 종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예전 같았으면 형들이 어떤 자세로 나왔을까요? 베냐민을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며 “베냐민 너 왜 이 은잔을 훔쳐가지고 우리를 이 곤경에 빠뜨리느냐”며 구박을 했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째려보면서 “재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커서 저렇게 못쓰게 되었어”라고 판단과 정죄의 말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셉 앞에 엎드린 그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유다가 대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는 베냐민 때문에 우리가 왜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하는가 라며 베냐민을 미워하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이 문제를 보았습니다. 이 문제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겸손히 징계를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잔이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지요, 우리도 할 만큼 했으니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마음을 울리는 연설을 합니다.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그의 말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과거에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며 무정하고 무자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며느리의 아픔, 동생의 아픔,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구구절절이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칩니다. 유다는 동생을 위해 자기 생명을 담보하고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고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왜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아마 자신도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도 사랑하는 첫째, 둘째 아들들을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자기 발견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거짓말하고 동생 요셉에게 못할 짓을 하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을 알고 이제는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아픔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유다의 변화는 그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회개한 의인을 하나님은 놀랍게 축복하시고 그 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유다의 간청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베냐민을 구속하고자 하는 대속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온전히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자유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요셉. 요셉의 훈련을 통해서 형들이 조금씩 내면에 회개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훈련관으로 세우셔서 형들이 조금씩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제 훈련의 결과를 보게 된 요셉은 자기를 감출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를 나타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렸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던지 바로의 궁중에 다 들렸습니다. 통역을 세워 애굽 말을 하던 총리가 갑자기 자기들이 쓰는 언어로 “형님들, 저 요셉이예요, 요셉!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시다구요?” 했을 때 형들은 그 앞에서 너무 놀라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가까이 가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에요.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구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세요. 한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들들보다 먼저 보내셨어요.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지만 아직 오년 더 남았어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어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구요.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구요.”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냐고 한탄하고 사람을 미워하며 불행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일 속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의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형들에 의해서, 또는 보디발 여사에 의해서, 바로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뜻 가운데서 인도하고 계시다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요셉이 자신의 생애를 운명으로 보았다면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만큼 기구한 운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운명에 맡기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또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 감옥 이것은 최악의 환경입니다. 또 애굽 총리 생활은 최상의 환경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은 최악의 환경 가운데서도 그가 슬픔에 빠지지 않고 굳세게 했습니다. 최고의 환경 가운데서도 교만하여지지 않고 그 직분을 잘 감당케 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그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환경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은 그를 성숙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자기를 판 형들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과 그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약속을 해 놓고 잘 되자 은혜를 잊어버렸어도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인생들에게 있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신 뜻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세월 동안 종살이, 옥살이를 통해 믿음의 연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왕자다운 품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 앞에서도 아부하지 않았고 권세로 인해 교만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은 어려운 가운데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옥중에서 관원들에게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왕에게도 꿈의 해석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의 이러한 증거로 말미암아 교만한 바로도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자가 없다며 요셉을 총리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요셉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운명주의에 빠졌다면 그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폐인, 천하의 악인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믿고 연단을 받은 요셉은 진실되고 아름다우며 거짓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우심으로 그를 통해 만민의 굶주림에서 구원하는데 쓰셨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재가를 받아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애굽으로 초청하고 나귀 20마리 분량의 각종 선물을 보냈습니다. 야곱은 기쁨으로 애굽에 내려가 요셉을 보고자 했습니다.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모든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센 땅으로 인도하여 큰 민족으로 키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그 뜻을 이루는데 쓰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홍대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고 만민 구원을 이루는데 우리를 써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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