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 22강(34-36장) 벧엘로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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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22강
말씀 | 창세기 34:1-36:43
요절 | 창세기 35:3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난 후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숙곳에서 8년을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양치기에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는 안일에 빠지고 세속화 되어갔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우상을 숭배하고 혼합신앙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디나의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디나의 두 오빠가 세겜 족속을 학살하여 주변 부족들에게 보복을 받을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방향을 주십니다. 우리도 나의 벧엘로 올라가서 거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올라가야 할 벧엘은 어디입니까?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8년을 머물던 야곱의 가정에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은 디나를 며느리로 삼기 위해서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요청한 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만일 세겜 족속이 할례를 행하여 우리 같이 되면 통혼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영적 위기였습니다. 또 디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겜은 그의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고 성읍 사람들도 그를 귀히 여겼기 때문에 모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한 지 제 삼일에 그들이 아파할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에 가서 노략하였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집단 학살극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곱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어 멸망에 처할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 최대 위기였습니다. 자식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식들로 인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5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에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겜 주변 족속들을 피하여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첫 사랑을 맺은 곳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의 훈련을 받고 돌아왔지만 숙곳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머문지 벌써 8년이 넘었습니다. 숙곳은 양치기에 좋은 목축지가 있었고 문화도 발달해서 살기에 편했습니다. 야곱은 세속에 물들었습니다. 야곱에게 인생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투쟁할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는 안일해졌습니다. 적당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잃어버리고 신앙 목표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벧엘에 올라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범죄한 아들들에 대해서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영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퇴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취직만 시켜주시면, 대학만 합격케 해주시면, 논문만 패스케 해주시면, 결혼만 시켜주시면, 이 인생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뭐든지 하겠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뤄진 요즘에는 야곱처럼 세겜성에서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만족적인 생활인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구원의 은혜에 기초하여 지금의 시련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비를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배자의 정결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운 그릇을 사용할 수 없듯이 내면이 더러우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섬기는 이방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만을 전부로 여기며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우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뒷전입니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서 올인하다 보니 일대일도 하지 않고, 소감도 쓰지 않습니다. 돈이 우상인 경우도 많습니다. 얍복강에서 존재가 변화되었지만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은 자기사랑이 우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끔찍이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 자기의 입맛, 자기의 외모, 자기 성취가 인생 최대 목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곱이 34:30절에서 자기를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게, 나로, 나는, 나를, 나와 내 집” 그가 세겜에 살면서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야곱 족속들이 많습니다. 4인가구보다 홀로 사는 1인 가구의 소비 여력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나를 위한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우상들을 버리고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야곱이 전에는 영적인 힘이 없어서 이방 문화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돕지 못했는데 이제는 분명히 돕고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 힘이 생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서 근본적인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세겜 족속들의 공격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은 벧엘로 올라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에 있을 때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는데 8년 동안 숙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족들과 그 공동체는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귀고리는 악세서리로서의 귀고리가 아니라 신상이나 주문을 부조한 일종의 간이용 우상으로 고대인들은 이것을 부착함으로써 악귀를 몰아내고 행운을 소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미련 없이 그런 삶과의 결별함을 의미합니다. 신상과 귀고리를 묻으며 이제까지 양다리를 걸치며 현실과 타협하던 세겜의 삶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야곱은 그 백성들에게 의복을 바꾸어 입도록 했습니다. 세겜 성의 음란하고 정욕적인 문화에 물들어 입던 옷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릴 수 있는 가슴이 깊이 파이거나 노출이 심한 옷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정숙한 옷을 입도록 했습니다. 의복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나 가치관이 잘 나타납니다.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은 세상 죄에 물든 생활 습관을 버리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더럽고 냄새나는 삶을 벗고 첫 사랑 때의 순수함을 입는 영적 회복, 신앙 각성입니다. 그들은 내적 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희생이 수반되었습니다. 희생없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방 신상과 그에 속한 귀금속들을 아낌없이 벗어서 땅에 묻었습니다.
야곱이 훌륭한 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절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살고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헤메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깊이 깨닫고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쓰신 점이 바로 믿음으로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지켜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있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명히 회개하고 결단할 때 우리를 핍박할 것 같은 주변의 부모님들, 직장상사들, 동료들이 의외로 잠잠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을 받으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형의 낯을 피할 때 만나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야곱의 형편이 이전 벧엘에서와 비슷합니다. 세겜 사람들 속여 죽이고 주변 족속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입니다. 야곱은 늘 속이고 도망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하고, 라반을 속이고 도망하고, 세겜을 죽이고 도망칩니다. 속이고 도망하는 그의 마음이 어떨까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추격당해 잡히지 않을까? 보복당해 망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이런 야곱을 정죄하지 않고 찾아와 만나 주고 위로와 소망의 약속을 주신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죄를 짓고 쫓기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죄인을 찾아와 만나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벧엘에서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는 초보단계의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엘벧엘의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항상 문제는 자신이 일으키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는 벧엘에서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신앙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만 나의 삶이 한꺼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지만 예전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 중풍병자 근성, 사마리아 여인의 근성, 이기적인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좋았다가 퇴보했다가를 반복하면서 나선형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신앙을 보면 아주 인간적입니다. 우리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애정이 갑니다. 요셉 같은 사람은 성인군자라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같은 수준의 보통 신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겜에 정착한 야곱에게 복을 주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지 8년이 지났지만 벧엘 서원을 지키지 않은 기간은 엄밀히 말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십니다. 야곱에게 귀한 점은 결정적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생각이 강하고 사람과 다투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렁이 같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디나 사건 속에서도 야곱이 이스라엘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존재가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야곱도 자신과 자식들에게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말씀해 주시고 그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 이전에 아브라함도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적당히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생육하며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그에게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가 열 두 아들을 낳았지만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왕들이 그의 후손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앞으로 일어날 민족적인 사명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야곱의 좁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넓혀 주십니다.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 야곱은 실제로 바로 왕을 상대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왕들을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민족을 세울 기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좁고 이기적인 야곱에게 역사적인 의미를 심습니다. 역사교육을 시키십니다. 야곱은 처음 벧엘에서 이 말씀을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단지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만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신앙 경륜이 쌓이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을 받아들이고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시고 그 후손들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처음에 주신 축복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가 벧엘로 돌아왔을 때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것으로 보시고 다시 축복해 주십니다. 야곱은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14,15). 30년 전 벧엘 서원은 ‘자신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이라는 단서가 달린 서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언약의 계승자로 삼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벧엘이라 부른 것은 30년 전 벧엘 신앙을 회복한 것입니다.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보며 하나님의 집을 소망하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첫 사랑의 언약을 잊고 혼탁한 세상에 동화되어가던 야곱을 찾아와 벧엘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야곱은 몇 차례 하나님을 만난 체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끈질긴 인간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시련을 통해 죄악된 본성을 깨뜨리고 택하신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씨름해 주셨습니다. 벧엘에서 만나주시고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난 첫 사랑을 회복하고 구속 역사에 써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붙은 욕심 때문에 세겜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잘 변화되지 않는 자신, 양 치는데 실패한 자신을 붙잡고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고 영적 안일과 적당주의를 회개합니다. 우리 공동체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홍대를 개척하고자 믿음으로 이곳에 왔던 그 때의 개척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처음 만난 주님께 나아가서 묵은 때를 벗고 신앙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가족 전체, 자녀들도 벧엘의 신앙을 갖도록 도와야겠습니다.
말씀 | 창세기 34:1-36:43
요절 | 창세기 35:3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난 후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숙곳에서 8년을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양치기에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는 안일에 빠지고 세속화 되어갔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우상을 숭배하고 혼합신앙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디나의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디나의 두 오빠가 세겜 족속을 학살하여 주변 부족들에게 보복을 받을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방향을 주십니다. 우리도 나의 벧엘로 올라가서 거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올라가야 할 벧엘은 어디입니까?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8년을 머물던 야곱의 가정에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은 디나를 며느리로 삼기 위해서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요청한 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만일 세겜 족속이 할례를 행하여 우리 같이 되면 통혼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영적 위기였습니다. 또 디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겜은 그의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고 성읍 사람들도 그를 귀히 여겼기 때문에 모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한 지 제 삼일에 그들이 아파할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에 가서 노략하였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집단 학살극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곱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어 멸망에 처할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 최대 위기였습니다. 자식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식들로 인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5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에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겜 주변 족속들을 피하여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첫 사랑을 맺은 곳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의 훈련을 받고 돌아왔지만 숙곳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머문지 벌써 8년이 넘었습니다. 숙곳은 양치기에 좋은 목축지가 있었고 문화도 발달해서 살기에 편했습니다. 야곱은 세속에 물들었습니다. 야곱에게 인생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투쟁할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는 안일해졌습니다. 적당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잃어버리고 신앙 목표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벧엘에 올라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범죄한 아들들에 대해서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영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퇴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취직만 시켜주시면, 대학만 합격케 해주시면, 논문만 패스케 해주시면, 결혼만 시켜주시면, 이 인생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뭐든지 하겠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뤄진 요즘에는 야곱처럼 세겜성에서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만족적인 생활인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구원의 은혜에 기초하여 지금의 시련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비를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배자의 정결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운 그릇을 사용할 수 없듯이 내면이 더러우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섬기는 이방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만을 전부로 여기며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우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뒷전입니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서 올인하다 보니 일대일도 하지 않고, 소감도 쓰지 않습니다. 돈이 우상인 경우도 많습니다. 얍복강에서 존재가 변화되었지만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은 자기사랑이 우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끔찍이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 자기의 입맛, 자기의 외모, 자기 성취가 인생 최대 목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곱이 34:30절에서 자기를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게, 나로, 나는, 나를, 나와 내 집” 그가 세겜에 살면서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야곱 족속들이 많습니다. 4인가구보다 홀로 사는 1인 가구의 소비 여력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나를 위한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우상들을 버리고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야곱이 전에는 영적인 힘이 없어서 이방 문화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돕지 못했는데 이제는 분명히 돕고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 힘이 생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서 근본적인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세겜 족속들의 공격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은 벧엘로 올라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에 있을 때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는데 8년 동안 숙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족들과 그 공동체는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귀고리는 악세서리로서의 귀고리가 아니라 신상이나 주문을 부조한 일종의 간이용 우상으로 고대인들은 이것을 부착함으로써 악귀를 몰아내고 행운을 소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미련 없이 그런 삶과의 결별함을 의미합니다. 신상과 귀고리를 묻으며 이제까지 양다리를 걸치며 현실과 타협하던 세겜의 삶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야곱은 그 백성들에게 의복을 바꾸어 입도록 했습니다. 세겜 성의 음란하고 정욕적인 문화에 물들어 입던 옷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릴 수 있는 가슴이 깊이 파이거나 노출이 심한 옷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정숙한 옷을 입도록 했습니다. 의복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나 가치관이 잘 나타납니다.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은 세상 죄에 물든 생활 습관을 버리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더럽고 냄새나는 삶을 벗고 첫 사랑 때의 순수함을 입는 영적 회복, 신앙 각성입니다. 그들은 내적 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희생이 수반되었습니다. 희생없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방 신상과 그에 속한 귀금속들을 아낌없이 벗어서 땅에 묻었습니다.
야곱이 훌륭한 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절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살고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헤메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깊이 깨닫고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쓰신 점이 바로 믿음으로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지켜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있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명히 회개하고 결단할 때 우리를 핍박할 것 같은 주변의 부모님들, 직장상사들, 동료들이 의외로 잠잠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을 받으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형의 낯을 피할 때 만나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야곱의 형편이 이전 벧엘에서와 비슷합니다. 세겜 사람들 속여 죽이고 주변 족속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입니다. 야곱은 늘 속이고 도망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하고, 라반을 속이고 도망하고, 세겜을 죽이고 도망칩니다. 속이고 도망하는 그의 마음이 어떨까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추격당해 잡히지 않을까? 보복당해 망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이런 야곱을 정죄하지 않고 찾아와 만나 주고 위로와 소망의 약속을 주신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죄를 짓고 쫓기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죄인을 찾아와 만나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벧엘에서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는 초보단계의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엘벧엘의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항상 문제는 자신이 일으키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는 벧엘에서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신앙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만 나의 삶이 한꺼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지만 예전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 중풍병자 근성, 사마리아 여인의 근성, 이기적인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좋았다가 퇴보했다가를 반복하면서 나선형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신앙을 보면 아주 인간적입니다. 우리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애정이 갑니다. 요셉 같은 사람은 성인군자라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같은 수준의 보통 신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겜에 정착한 야곱에게 복을 주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지 8년이 지났지만 벧엘 서원을 지키지 않은 기간은 엄밀히 말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십니다. 야곱에게 귀한 점은 결정적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생각이 강하고 사람과 다투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렁이 같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디나 사건 속에서도 야곱이 이스라엘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존재가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야곱도 자신과 자식들에게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말씀해 주시고 그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 이전에 아브라함도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적당히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생육하며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그에게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가 열 두 아들을 낳았지만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왕들이 그의 후손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앞으로 일어날 민족적인 사명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야곱의 좁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넓혀 주십니다.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 야곱은 실제로 바로 왕을 상대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왕들을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민족을 세울 기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좁고 이기적인 야곱에게 역사적인 의미를 심습니다. 역사교육을 시키십니다. 야곱은 처음 벧엘에서 이 말씀을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단지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만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신앙 경륜이 쌓이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을 받아들이고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시고 그 후손들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처음에 주신 축복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가 벧엘로 돌아왔을 때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것으로 보시고 다시 축복해 주십니다. 야곱은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14,15). 30년 전 벧엘 서원은 ‘자신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이라는 단서가 달린 서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언약의 계승자로 삼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벧엘이라 부른 것은 30년 전 벧엘 신앙을 회복한 것입니다.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보며 하나님의 집을 소망하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첫 사랑의 언약을 잊고 혼탁한 세상에 동화되어가던 야곱을 찾아와 벧엘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야곱은 몇 차례 하나님을 만난 체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끈질긴 인간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시련을 통해 죄악된 본성을 깨뜨리고 택하신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씨름해 주셨습니다. 벧엘에서 만나주시고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난 첫 사랑을 회복하고 구속 역사에 써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붙은 욕심 때문에 세겜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잘 변화되지 않는 자신, 양 치는데 실패한 자신을 붙잡고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고 영적 안일과 적당주의를 회개합니다. 우리 공동체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홍대를 개척하고자 믿음으로 이곳에 왔던 그 때의 개척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처음 만난 주님께 나아가서 묵은 때를 벗고 신앙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가족 전체, 자녀들도 벧엘의 신앙을 갖도록 도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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