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3년 창세기 21강(31-33장)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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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 21 강
말씀 | 창세기 31-33장
요절 | 창세기 32:28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벧엘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과 형 에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야곱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장엄한 패배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변한 것입니다. 그는 형 에서에게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제까지와 다른 차원에서 즉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끈질기게 하는 가운데 이런 변화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어. 나쁜 놈.”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보니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작은 일에도 꼬투리를 잡고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야곱은 처갓집에 사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자기의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라헬과 레아가 자기들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고대 앗수르 법에 보면 신부 지참금은 본인에게 지불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레아와 라헬을 결혼을 시키면서 야곱이 결혼 지참금으로 지급하는 14년 치 월급을 딸들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취했습니다. 딸들은 이런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야곱은 아내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용기를 냈습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그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습니다. 그들이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이를 라반이 알아차렸습니다.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만나서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였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고 탐문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합니다.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그는 지난 20년간 라반이 행한 일들에 대해서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자기의 품삯은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다고 고소해합니다.
라반은 할 말이 없자 어거지를 쓰며 타협을 시작합니다.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그들은 돌 기둥을 세우고 증거를 삼았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내 딸을 박대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무더기를 증거로 서로 넘어와서 해하지 말자고 합니다. 야곱은 그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함께 떡을 먹고 작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라반에게서 야곱을 철저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길을 가던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두 무리를 동원하여 야곱 일행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인사하였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그가 400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피하리라는 반타작 작전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안심이 안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 그는 자기가 일생 쌓아온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택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뇌물 공세를 펼치고자 한 것입니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었습니다. 이것은 총 550마리로서 시가로 약 9억 원이나 되는 엄청난 물량입니다. 그것을 세 떼로 나누고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여 시간차 뇌물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물을 앞에 보내어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자신을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팥죽을 주었는데 이제는 가축 선물을 주어 자기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건너게 하고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그 밤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인 죄로 인해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존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제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상속자라는 명분도, 아내들도, 자식들도, 재물도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는 절대 고독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 탐욕, 속이는 죄가 그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로 돌아가기까지 지켜주신다고 언약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였습니다. 두려움은 죄의 형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과 형에서 사이의 파괴된 관계만 바라볼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물로도 안 되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도 안 되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 문제 앞에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고래 힘줄처럼 끈질기게 그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야곱은 관절이 골절이 되었는데도 그를 놓치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합니다.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왜 갑자기 이름을 묻습니까? 이는 야곱이 이제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질문입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움켜잡는 자, 사기꾼, 술수를 부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라반에게는 속임을 당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장자권도 얻고, 네 아내와 열 한 아들과 많은 물질을 움켜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의 옛 사람을 대표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과 술수로 많은 복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른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소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불행하다는 생각도 커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습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하기보다 소박하게 살고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쓸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야곱이 진정 원하는 복을 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름은 그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끝까지 달라붙어 다투어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 다투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끝까지 달라붙어 다투었기’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착된 사이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고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깊이 쓰고 거기서 오는 생명력과 은혜와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투쟁을 하면서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지난 주 선교보고에서 엘까미노 센터의 목자들은 매주 소감을 7-9페이지를 쓰고 금요일에 발표하면 새벽 1시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그들은 매주 목자 한 사람당 20팀 일대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깊이 있는 소감을 쓰는 나누는 것이 개인의 변화와 엘까미노 센터 부흥의 비결이었습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처음에는 야곱이 이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힘이 없어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단번에 업어치기를 하실 수도 있고, 되치기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감당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는 목적은 그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기를 발견하고 그와 씨름하고 있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끝까지 자기 힘과 의지로 버티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얍!’ 하면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십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일격을 당한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은 몸 전체를 지탱하는 관절이요 힘을 받쳐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버팅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은 그의 강한 인간성을 상징합니다. 이제까지 야곱의 삶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그의 허벅지 관절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결국 형 에서 문제 앞에서, 죽음 앞에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발견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완고한 고집과 죄성, 인간성을 상징하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집니다.
이때서야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복을 구합니다. 자신의 간교한 힘이나 의지로 소유할 수 있는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복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 복은 항상 빼앗는 것이요 버는 것이요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일격을 당해 쓰러지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완벽한 패배’인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죽고 무력해진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을 뼈저리게 온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패배가 장엄하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약과 신약 교회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진정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에서에게 나타나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무섭게 경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이 복의 근원으로 변화되어야 거룩한 백성들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이 가족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인간 갈등을 느낄 때 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나의 태도가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야 합니다. 회개가 잘 되지 않으면 금식도 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자기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자 자신과 씨름을 해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분이 과연 누구신가? 왜 나와 씨름을 해 주는가? 자신의 내면 문제가 그와의 씨름을 통해서 해결 받고 나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더욱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말씀에 대해 알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원은 이전까지 야곱이 가지고 있던 소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명예를 얻고 싶은 소원, 아내를 얻고 싶어 하는 소원, 부를 얻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원이 생긴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우리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강력한 소원이 있을 때 성취를 경험하게 되고 치료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죽지 않은 것이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야곱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평강이 넘쳐났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해가 돋았다는 표현은 야곱의 마음에 어두움이 걷히고 밝은 빛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문학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형을 대면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야곱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야곱은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맨 앞에는 자신이 서고 그 다음에는 두 여종과 아이들, 그 다음에는 레아와 그의 아이들, 맨 뒤에 라헬과 요셉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맨 앞에서 형 에서에게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절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신하가 왕에게 인사하는 예법입니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 싸우는 자가 아니라 화목케 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한 마음을 갖고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되자 에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서도 변화되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맞추고 서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도 차례로 인사를 시켰습니다. 에서가 그에게 있는 것이 족하니 예물은 네게 두라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강권하여 예물을 주었습니다. 10b절을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가 되자 마귀와 같았던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보였습니다. 이성계가 그의 스승이었던 무학 대사를 골려주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이 꼭 돼지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 대사는 부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고 응수하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변화가 되자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환하게 보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홀로 있는 야곱, 고독한 야곱을 얍복 나루터에서 만나 주시고 함께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두려워하는 형 에서를 변화시키기보다 먼저 야곱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움켜쥐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끝까지 다투어 싸우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영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남은 인생을 더 의미있게 귀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31-33장
요절 | 창세기 32:28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벧엘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과 형 에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야곱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장엄한 패배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변한 것입니다. 그는 형 에서에게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제까지와 다른 차원에서 즉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끈질기게 하는 가운데 이런 변화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어. 나쁜 놈.”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보니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작은 일에도 꼬투리를 잡고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야곱은 처갓집에 사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자기의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라헬과 레아가 자기들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고대 앗수르 법에 보면 신부 지참금은 본인에게 지불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레아와 라헬을 결혼을 시키면서 야곱이 결혼 지참금으로 지급하는 14년 치 월급을 딸들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취했습니다. 딸들은 이런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야곱은 아내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용기를 냈습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그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습니다. 그들이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이를 라반이 알아차렸습니다.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만나서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였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고 탐문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합니다.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그는 지난 20년간 라반이 행한 일들에 대해서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자기의 품삯은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다고 고소해합니다.
라반은 할 말이 없자 어거지를 쓰며 타협을 시작합니다.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그들은 돌 기둥을 세우고 증거를 삼았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내 딸을 박대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무더기를 증거로 서로 넘어와서 해하지 말자고 합니다. 야곱은 그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함께 떡을 먹고 작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라반에게서 야곱을 철저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길을 가던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두 무리를 동원하여 야곱 일행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인사하였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그가 400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피하리라는 반타작 작전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안심이 안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 그는 자기가 일생 쌓아온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택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뇌물 공세를 펼치고자 한 것입니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었습니다. 이것은 총 550마리로서 시가로 약 9억 원이나 되는 엄청난 물량입니다. 그것을 세 떼로 나누고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여 시간차 뇌물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물을 앞에 보내어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자신을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팥죽을 주었는데 이제는 가축 선물을 주어 자기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건너게 하고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그 밤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인 죄로 인해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존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제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상속자라는 명분도, 아내들도, 자식들도, 재물도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는 절대 고독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 탐욕, 속이는 죄가 그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로 돌아가기까지 지켜주신다고 언약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였습니다. 두려움은 죄의 형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과 형에서 사이의 파괴된 관계만 바라볼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물로도 안 되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도 안 되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 문제 앞에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고래 힘줄처럼 끈질기게 그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야곱은 관절이 골절이 되었는데도 그를 놓치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합니다.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왜 갑자기 이름을 묻습니까? 이는 야곱이 이제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질문입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움켜잡는 자, 사기꾼, 술수를 부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라반에게는 속임을 당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장자권도 얻고, 네 아내와 열 한 아들과 많은 물질을 움켜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의 옛 사람을 대표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과 술수로 많은 복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른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소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불행하다는 생각도 커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습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하기보다 소박하게 살고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쓸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야곱이 진정 원하는 복을 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름은 그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끝까지 달라붙어 다투어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 다투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끝까지 달라붙어 다투었기’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착된 사이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고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깊이 쓰고 거기서 오는 생명력과 은혜와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투쟁을 하면서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지난 주 선교보고에서 엘까미노 센터의 목자들은 매주 소감을 7-9페이지를 쓰고 금요일에 발표하면 새벽 1시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그들은 매주 목자 한 사람당 20팀 일대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깊이 있는 소감을 쓰는 나누는 것이 개인의 변화와 엘까미노 센터 부흥의 비결이었습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처음에는 야곱이 이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힘이 없어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단번에 업어치기를 하실 수도 있고, 되치기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감당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는 목적은 그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기를 발견하고 그와 씨름하고 있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끝까지 자기 힘과 의지로 버티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얍!’ 하면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십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일격을 당한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은 몸 전체를 지탱하는 관절이요 힘을 받쳐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버팅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은 그의 강한 인간성을 상징합니다. 이제까지 야곱의 삶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그의 허벅지 관절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결국 형 에서 문제 앞에서, 죽음 앞에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발견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완고한 고집과 죄성, 인간성을 상징하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집니다.
이때서야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복을 구합니다. 자신의 간교한 힘이나 의지로 소유할 수 있는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복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 복은 항상 빼앗는 것이요 버는 것이요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일격을 당해 쓰러지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완벽한 패배’인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죽고 무력해진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을 뼈저리게 온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패배가 장엄하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약과 신약 교회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진정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김은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에서에게 나타나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무섭게 경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이 복의 근원으로 변화되어야 거룩한 백성들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이 가족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인간 갈등을 느낄 때 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나의 태도가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야 합니다. 회개가 잘 되지 않으면 금식도 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자기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자 자신과 씨름을 해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분이 과연 누구신가? 왜 나와 씨름을 해 주는가? 자신의 내면 문제가 그와의 씨름을 통해서 해결 받고 나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더욱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말씀에 대해 알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원은 이전까지 야곱이 가지고 있던 소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명예를 얻고 싶은 소원, 아내를 얻고 싶어 하는 소원, 부를 얻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원이 생긴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우리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강력한 소원이 있을 때 성취를 경험하게 되고 치료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죽지 않은 것이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야곱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평강이 넘쳐났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해가 돋았다는 표현은 야곱의 마음에 어두움이 걷히고 밝은 빛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문학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형을 대면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야곱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야곱은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맨 앞에는 자신이 서고 그 다음에는 두 여종과 아이들, 그 다음에는 레아와 그의 아이들, 맨 뒤에 라헬과 요셉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맨 앞에서 형 에서에게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절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신하가 왕에게 인사하는 예법입니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 싸우는 자가 아니라 화목케 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한 마음을 갖고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되자 에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서도 변화되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맞추고 서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도 차례로 인사를 시켰습니다. 에서가 그에게 있는 것이 족하니 예물은 네게 두라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강권하여 예물을 주었습니다. 10b절을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가 되자 마귀와 같았던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보였습니다. 이성계가 그의 스승이었던 무학 대사를 골려주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이 꼭 돼지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 대사는 부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고 응수하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변화가 되자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환하게 보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홀로 있는 야곱, 고독한 야곱을 얍복 나루터에서 만나 주시고 함께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두려워하는 형 에서를 변화시키기보다 먼저 야곱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움켜쥐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끝까지 다투어 싸우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영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남은 인생을 더 의미있게 귀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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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다운로드 | DATE : 2013-10-13 14: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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