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7강(6:1-18)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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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7 강
말씀 | 마태복음 6:1-18
요절 | 마태복음 6:6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날은 광고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광고를 통해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갑니다.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광고에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광고를 해도 크게 해야 사람들이 믿습니다. 작게 해서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할 때도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고 금액까지 밝힙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회사를 알아주고 칭찬을 합니다. 또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가 기부를 하면 사람들이 따라서 하기를 기대하고 선전을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런 것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경건 생활의 은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할 때에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에, 구제나 기도나 금식 등 경건한 생활을 할 때에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도록 생색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자기를 높이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데 자기 영광을 드러내면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더디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도 맺히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 내면에 참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구제하는 자가 나팔을 불어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자기 이름을 내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어집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구제를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구제를 해도 사람들은 잊어버리거나 내가 어려울 때 모른 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갚아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15절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은 숨어서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초대 교회가 힘쓴 두 가지가 바로 전도와 구제였습니다. 구제란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주는 모든 활동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구제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은 최고로 가치 있는 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나의 마음을 내어주고 찾아가서 말씀을 주고 구원 받도록 돕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초대 교회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 또는 재정출납을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곱 집사를 세워 동역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눅15:7). 한마디로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길게 미사여구를 써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으로, 깊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의 첫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감사하지도 않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글들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이성을 믿도록 합니다. 오늘날 한국 대학가에서는 무신론 클럽이 활동하면서 복음 전도를 하면 무신론에 대한 글을 읽도록 쪽지를 줍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주일을 지키지 말고 잠이나 실컷 자라고 광고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력과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을 통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삶 가운데서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함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은밀하게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으로 사탄과 흑암의 권세에 있던 영혼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회적으로는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외의 것 즉 꿈이나 점이나 ‘기드온의 양털’로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각자의 생활은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 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캠퍼스 사역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캠퍼스 사역을 잘 이루도록 연구하고 실행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홍익대학과 세계 대학 캠퍼스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일에 온전히 쓰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도 그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심으로서 나타납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 행한 당파 싸움과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제 치하에서 고통하게 하시고 6.25 동란과 남북분단을 통해서 징계하시고 연단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남한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키우시고 축복하셔서 세계에 대해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남북통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북한과 유라시아 쪽으로 확장되는 역사에 써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머리로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주님은 가능하다면 상황이 변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다면 아무리 어려운 길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을 위한 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한 후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은 필요한 양식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타락한 죄인들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을 의존하여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풀어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곡식이 나겠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며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일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우리는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식탁에서 한 조각 빵을 놓고 감사 기도하는 유명한 그림의 모습처럼, 풍족히 주실 때에는 풍족히 채워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하고, 부족할 때에는 부족함을 인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5:18-20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 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나만의 필요가 아니라 북한의 굶주리는 형제들, 가난한 이웃들의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린 캠퍼스의 학생들을 위해서 영적인 양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가난한 사람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최일도 목사님은 일생 노숙자들에게 밥을 먹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북한에 매년 사랑의 식량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목욕을 했지만 매일 발을 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깨어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회개함이 없는 사람은 죄사함에 대한 기도도 당연히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죄로 더럽혀지고 영적으로 무디어지며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죄를 늘 깨닫고 회개하며 죄사함을 구할 때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우리를 유혹하고자 약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갖 악과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가 악과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12). 자신에 대해서 자만할 때 오히려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도 자기를 믿고 큰소리치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방심할 때 한순간에 교묘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들이 명예 권력의 유혹에 빠지고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인가를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지켜주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 구해주시도록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할 때 먼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12,14,15절에서 거듭하여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행태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용서해달라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죄를 지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한다면 먼저 나도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도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금식에 대한 자세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을 보였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금식을 함으로 눈이 움푹 들어가고 힘이 없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은밀한 중에 나를 지켜보십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지라도, 은밀한 중에 내가 드리는 기도, 눈물, 금식, 헌신을 하나님은 다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지금 갚아주실 수도 있고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은밀한 가운데 구제도 하고 여러 모양의 선을 행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악도 다 드러나고 은밀한 중에 행한 선도 다 드러납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악이 나타나면 악취가 풍깁니다. 그 악영향이란 참으로 크게 퍼져나갑니다. 반대로 은밀한 중에 행한 선이 드러날 때 그 향기가 온 천지를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인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경건한 삶입니다. 경건한 삶은 은밀한 가운데 행해질 때 그 향기를 발합니다. 광고가 판치는 문화 속에서 은밀한 삶을 산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선전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은밀하게 경건한 생활을 함으로 복음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은 도시 속의 수도원과 같습니다. UBF 목자들은 겉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세에 수도원이 타락해 가던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듯이 우리 모임이 이 사회에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6:1-18
요절 | 마태복음 6:6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날은 광고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광고를 통해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갑니다.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광고에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광고를 해도 크게 해야 사람들이 믿습니다. 작게 해서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할 때도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고 금액까지 밝힙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회사를 알아주고 칭찬을 합니다. 또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가 기부를 하면 사람들이 따라서 하기를 기대하고 선전을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런 것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경건 생활의 은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할 때에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에, 구제나 기도나 금식 등 경건한 생활을 할 때에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도록 생색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자기를 높이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데 자기 영광을 드러내면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더디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도 맺히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 내면에 참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구제하는 자가 나팔을 불어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자기 이름을 내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어집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구제를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구제를 해도 사람들은 잊어버리거나 내가 어려울 때 모른 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갚아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15절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은 숨어서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초대 교회가 힘쓴 두 가지가 바로 전도와 구제였습니다. 구제란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주는 모든 활동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구제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은 최고로 가치 있는 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나의 마음을 내어주고 찾아가서 말씀을 주고 구원 받도록 돕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초대 교회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 또는 재정출납을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곱 집사를 세워 동역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눅15:7). 한마디로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길게 미사여구를 써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으로, 깊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의 첫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감사하지도 않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글들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이성을 믿도록 합니다. 오늘날 한국 대학가에서는 무신론 클럽이 활동하면서 복음 전도를 하면 무신론에 대한 글을 읽도록 쪽지를 줍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주일을 지키지 말고 잠이나 실컷 자라고 광고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력과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을 통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삶 가운데서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함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은밀하게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으로 사탄과 흑암의 권세에 있던 영혼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회적으로는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외의 것 즉 꿈이나 점이나 ‘기드온의 양털’로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각자의 생활은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 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캠퍼스 사역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캠퍼스 사역을 잘 이루도록 연구하고 실행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홍익대학과 세계 대학 캠퍼스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일에 온전히 쓰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도 그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심으로서 나타납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 행한 당파 싸움과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제 치하에서 고통하게 하시고 6.25 동란과 남북분단을 통해서 징계하시고 연단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남한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키우시고 축복하셔서 세계에 대해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남북통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북한과 유라시아 쪽으로 확장되는 역사에 써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머리로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주님은 가능하다면 상황이 변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다면 아무리 어려운 길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을 위한 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한 후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은 필요한 양식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타락한 죄인들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을 의존하여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풀어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곡식이 나겠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며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일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우리는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식탁에서 한 조각 빵을 놓고 감사 기도하는 유명한 그림의 모습처럼, 풍족히 주실 때에는 풍족히 채워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하고, 부족할 때에는 부족함을 인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5:18-20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 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나만의 필요가 아니라 북한의 굶주리는 형제들, 가난한 이웃들의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린 캠퍼스의 학생들을 위해서 영적인 양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가난한 사람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최일도 목사님은 일생 노숙자들에게 밥을 먹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북한에 매년 사랑의 식량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목욕을 했지만 매일 발을 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깨어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회개함이 없는 사람은 죄사함에 대한 기도도 당연히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죄로 더럽혀지고 영적으로 무디어지며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죄를 늘 깨닫고 회개하며 죄사함을 구할 때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우리를 유혹하고자 약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갖 악과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가 악과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12). 자신에 대해서 자만할 때 오히려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도 자기를 믿고 큰소리치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방심할 때 한순간에 교묘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들이 명예 권력의 유혹에 빠지고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인가를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지켜주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 구해주시도록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할 때 먼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12,14,15절에서 거듭하여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행태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용서해달라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죄를 지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한다면 먼저 나도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도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금식에 대한 자세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을 보였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금식을 함으로 눈이 움푹 들어가고 힘이 없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은밀한 중에 나를 지켜보십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지라도, 은밀한 중에 내가 드리는 기도, 눈물, 금식, 헌신을 하나님은 다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지금 갚아주실 수도 있고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은밀한 가운데 구제도 하고 여러 모양의 선을 행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악도 다 드러나고 은밀한 중에 행한 선도 다 드러납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악이 나타나면 악취가 풍깁니다. 그 악영향이란 참으로 크게 퍼져나갑니다. 반대로 은밀한 중에 행한 선이 드러날 때 그 향기가 온 천지를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인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경건한 삶입니다. 경건한 삶은 은밀한 가운데 행해질 때 그 향기를 발합니다. 광고가 판치는 문화 속에서 은밀한 삶을 산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선전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은밀하게 경건한 생활을 함으로 복음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은 도시 속의 수도원과 같습니다. UBF 목자들은 겉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세에 수도원이 타락해 가던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듯이 우리 모임이 이 사회에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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