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6강(5:17-48)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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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6강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중요한 존재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소망이 얼마나 높고 큰지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수님의 소망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과 열정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20절은 본문의 서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서 일반적인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형식만을 중요시하고 내면적인 것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 결과보다는 동기를 더 중요시하셨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21절 말씀부터 구체적인 삶의 윤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첫째, 살인하지 말라(21-26).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살인에 대한 명령은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살인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레24:17,출21:12,민35:16,17).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인의 행동은 마음의 분노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부터 다루십니다. 우리 내면의 동기를 중요시 하십니다. 또한 실제로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어릴 때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이나 상처로 인해 평생 고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요즈음 중고등학생들의 욕 문화에 대해서 여러 매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욕의 수준이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화에 욕이 따라다니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학생들의 정신과 영혼은 파괴되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부로 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욕의 이면에 있는 악한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3:6,8절은 말씀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재갈 먹일 수 있으면 온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혀를 재갈 먹이려면 마음에 일어나는 시기, 증오, 분노, 앙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을 피하는 실제적인 행동 지침을 주십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특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가진 채로 나아오는 자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형제와 화목한 다음에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갈 때에 급히 화해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들, 동역자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화를 내고 막말을 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사과하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여 화목을 이룰 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또 거친 말을 들을 때 상대방이 왜 저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고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한 자세입니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화는 화를 낳습니다. 우리는 먼저 형제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고 화해의 길을 터야 합니다. 사람과 관계가 막히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간음하지 말라(27-30).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류를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성 생활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두 인격의 연합과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간음은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음욕’은 부정한 관계에 대한 욕망입니다. 예수님은 간음이 음욕을 품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으로 간음죄를 지음과 동시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율법의 참된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음욕으로 인해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개념은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음란물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인터넷에는 선정적인 영상이 넘쳐납니다. 성을 상업화시켜서 눈을 자극하고 클릭수를 높이고자 합니다. 이렇게 안목의 정욕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이런 정욕과 음란의 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과 손은 간음죄의 통로요 도구입니다. 눈과 손은 우리 백체 중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죄에 쓰인다면 차라리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단호하게 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만큼 음란의 죄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세력에 빠질 때 우리의 영혼은 무기력해지고 파괴되어 갑니다. 우리가 음란한 시대에 우리의 눈을 죄에서 지켜야겠습니다. 시편119:37절에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셋째, 이혼하지 말라(31-32). 31, 32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신명기 24장 1,2절에 결혼 후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 가지 해석이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성적 부정으로 해석했고, 힐렐 파는 음식을 태우거나 심지어 남편 시선을 다른 여자에게 돌리게 한 경우도 아내의 수치되는 일이라고 광범위하게 해석했습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은 당연히 힐렐 파의 해석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의 문서를 보면 이혼에 대한 증거가 가장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만큼 이혼이 흔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번이나 이혼을 했던 것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인 관행에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이렇게 엄격한 태도를 가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심입니다. 또 가정의 소중함을 지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혼의 합리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계명(33-37). 구약에서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당시 맹세를 남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을 땅에 떨어뜨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분노하신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맹세를 남발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요 욕심과 조급함, 자기과시와 허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맹세하기를 삼가고 겸손하고 진실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진지한 자세로 간단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보복에 대한 계명(38-42). 38-42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보복에 대한 율법은 지나친 보복 행위를 제한하기 위한 규정이었습니다. 구약은 한 대 맞았으면 한 대만 때리라고 함으로 악을 억제하고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악을 악으로 갚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비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섯째, 네 원수를 사랑하라(43-48).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웃’이라는 말은 동족을, ‘원수’는 이방인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은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악의 순환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일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죄인도 원수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고 사랑하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베드로전서 2:23,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악인들을 심판하고 철저히 보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욕을 당할지언정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이 고난을 당할지언정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저주스런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예수님의 넓은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벌써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들을 두루두루 넓게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나를 미워하고 못 살게 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과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될 때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사람도 영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루오의 작품 중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라는 판화작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린 작품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는 도끼날에 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을 묻혀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못을 박으면 박을수록 더 진한 용서와 사랑의 향기를 풍겨줍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때 그의 딸이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라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딸 동희에게 말했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학생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아야 한다.” 이렇게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양아들된 그는 본래 좌파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도서관에 쌓여 있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책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오묘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목사로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 원수에 대한 증오를 산산조각 내는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4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본받아 심지어 원수조차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삶의 표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 남편, 자녀들, 친구들, 동역자들을 사랑하고자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풍성하게 경험할 때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엄청난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이 요구됩니다. 나와 공동체가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원수의 죄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죄를 회개하기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이 있을 때 진리를 가르치고 행하며 범죄를 예방하고 의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함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중요한 존재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소망이 얼마나 높고 큰지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수님의 소망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과 열정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20절은 본문의 서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서 일반적인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형식만을 중요시하고 내면적인 것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 결과보다는 동기를 더 중요시하셨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21절 말씀부터 구체적인 삶의 윤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첫째, 살인하지 말라(21-26).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살인에 대한 명령은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살인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레24:17,출21:12,민35:16,17).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인의 행동은 마음의 분노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부터 다루십니다. 우리 내면의 동기를 중요시 하십니다. 또한 실제로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어릴 때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이나 상처로 인해 평생 고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요즈음 중고등학생들의 욕 문화에 대해서 여러 매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욕의 수준이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화에 욕이 따라다니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학생들의 정신과 영혼은 파괴되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부로 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욕의 이면에 있는 악한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3:6,8절은 말씀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재갈 먹일 수 있으면 온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혀를 재갈 먹이려면 마음에 일어나는 시기, 증오, 분노, 앙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을 피하는 실제적인 행동 지침을 주십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특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가진 채로 나아오는 자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형제와 화목한 다음에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갈 때에 급히 화해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들, 동역자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화를 내고 막말을 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사과하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여 화목을 이룰 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또 거친 말을 들을 때 상대방이 왜 저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고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한 자세입니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화는 화를 낳습니다. 우리는 먼저 형제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고 화해의 길을 터야 합니다. 사람과 관계가 막히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간음하지 말라(27-30).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류를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성 생활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두 인격의 연합과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간음은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음욕’은 부정한 관계에 대한 욕망입니다. 예수님은 간음이 음욕을 품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으로 간음죄를 지음과 동시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율법의 참된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음욕으로 인해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개념은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음란물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인터넷에는 선정적인 영상이 넘쳐납니다. 성을 상업화시켜서 눈을 자극하고 클릭수를 높이고자 합니다. 이렇게 안목의 정욕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이런 정욕과 음란의 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과 손은 간음죄의 통로요 도구입니다. 눈과 손은 우리 백체 중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죄에 쓰인다면 차라리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단호하게 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만큼 음란의 죄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세력에 빠질 때 우리의 영혼은 무기력해지고 파괴되어 갑니다. 우리가 음란한 시대에 우리의 눈을 죄에서 지켜야겠습니다. 시편119:37절에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셋째, 이혼하지 말라(31-32). 31, 32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신명기 24장 1,2절에 결혼 후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 가지 해석이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성적 부정으로 해석했고, 힐렐 파는 음식을 태우거나 심지어 남편 시선을 다른 여자에게 돌리게 한 경우도 아내의 수치되는 일이라고 광범위하게 해석했습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은 당연히 힐렐 파의 해석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의 문서를 보면 이혼에 대한 증거가 가장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만큼 이혼이 흔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번이나 이혼을 했던 것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인 관행에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이렇게 엄격한 태도를 가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심입니다. 또 가정의 소중함을 지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혼의 합리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계명(33-37). 구약에서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당시 맹세를 남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을 땅에 떨어뜨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분노하신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맹세를 남발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요 욕심과 조급함, 자기과시와 허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맹세하기를 삼가고 겸손하고 진실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진지한 자세로 간단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보복에 대한 계명(38-42). 38-42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보복에 대한 율법은 지나친 보복 행위를 제한하기 위한 규정이었습니다. 구약은 한 대 맞았으면 한 대만 때리라고 함으로 악을 억제하고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악을 악으로 갚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비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섯째, 네 원수를 사랑하라(43-48).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웃’이라는 말은 동족을, ‘원수’는 이방인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은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악의 순환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일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죄인도 원수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고 사랑하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베드로전서 2:23,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악인들을 심판하고 철저히 보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욕을 당할지언정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이 고난을 당할지언정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저주스런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예수님의 넓은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벌써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들을 두루두루 넓게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나를 미워하고 못 살게 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과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될 때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사람도 영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루오의 작품 중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라는 판화작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린 작품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는 도끼날에 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을 묻혀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못을 박으면 박을수록 더 진한 용서와 사랑의 향기를 풍겨줍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때 그의 딸이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라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딸 동희에게 말했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학생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아야 한다.” 이렇게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양아들된 그는 본래 좌파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도서관에 쌓여 있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책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오묘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목사로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 원수에 대한 증오를 산산조각 내는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4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본받아 심지어 원수조차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삶의 표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 남편, 자녀들, 친구들, 동역자들을 사랑하고자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풍성하게 경험할 때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엄청난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이 요구됩니다. 나와 공동체가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원수의 죄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죄를 회개하기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이 있을 때 진리를 가르치고 행하며 범죄를 예방하고 의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함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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