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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4년 예알3강(요4:1-14) 솟아나는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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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63회 작성일 14-02-2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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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예알 3 강 
말씀 | 요한복음 4:1-14
요절 | 요한복음 4:14

솟아나는 샘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지난 주 거듭남에 관한 진리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믿는 사람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목마름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기 위해서 생수를 주십니다. 그 생수는 성령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성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지금 시간은 정오로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아침 일찍이나 저녁에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나와서 수다를 떱니다. “안양에 시집 간 필화는 깨가 쏟아진다며, 나도 빨리 시집이나 갔으면 좋으련만.” “얘얘, 내일 신입생 입학식에 2천 명이 온다지 않니. 벌써부터 새내기들을 만나려니 기대가 되네.” 등등 온갖 정보를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혼자서 뙤약볕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홀로 온 여인은 보기만 해도 고독하고 외로워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겸손하게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 여자와 말문을 트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자의 대답은 쌀쌀맞았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라 인이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자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조금은 자신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물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 여자에게 대답하셨습니다. 13,1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는 말씀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이 세상에 와서 주려는 생수가 완전한 만족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절대로, 결코, 절대로 목마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또는 세상이 계속하는 한 그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기적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이며,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며 새롭게 창조되는 경험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 속에 두시며, 그 결과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목마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불완전했다는 뜻이고 완전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무언가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완벽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스스로 낙담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나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목마름과 더 원함의 차이입니다. 목마르다는 표현은 매우 깊은 필요를 암시합니다. 깊은 불만족, 고갈, 공허를 암시합니다. 또한 아픔을 뜻합니다. 목마름은 “물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북하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이라고 정의합니다. 목마름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의 아픔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다시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절대 공허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처참한 고통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만족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어떤 굴곡도 만나지 않으며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 생수를 더 바라는 사람은 이미 생수를 가진 사람뿐입니다. 그는 이미 생수를 가졌기에 더 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은 성장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으면 성장이 가능합니다. 당연히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한다는 사실과 성장을 바라는 마음은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 생명을 받으면 절대 다시 공허해지거나 절망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죽음의 요소들을 씻어내고 생명을 왕성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공허하지 않으며 언제나 더 큰 충만을 바랍니다. 때로 공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공허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우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서 다른 우물을 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경솔함, 게으름, 불성실 또는 각종 죄를 짓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샘물이 흙탕물이 되고 많은 오물과 나무토막과 돌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샘이 이제 끝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샘물이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멈추지도 않습니다. 그 모든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우리는 최악에 빠진 상황에서, 깊은 타락에 빠진 그리스도인이라도 샘을 청소하고 입구를 막은 진흙과 돌과 오물을 걷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깊은 타락에 빠졌을 때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자신이 가엽고 불쌍하게 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참된 만족과 기쁨과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소치 동계 올림픽의 쇼트트랙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이 자신의 실수든지 다른 선수가 밀어서든지 넘어지고 미끄러져 튕겨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도 매일 열네 시간씩 훈련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의 실수로, 또는 방해자로 인해서 넘어지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힘들겠습니까? 금메달을 향한 꿈의 도전이 한 순간에 끝나버리는 것 같은 좌절감에 빠질 수도 있고 방해한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승희 선수는 500m에서 영국 선수에 의해서 넘어졌고, 다시 넘어졌습니다. 그 선수에게 넘어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오직 결승선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박승희 선수는 결국 500m에서 동메달, 3000m 계주와 1000m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넘어지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열심을 주십니다. 열정을 주십니다. 주님을 닮고자 하는 열심,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십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복음을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이 샘은 생명과 활력과 능력이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이유는 그 속의 생명이 행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자신보다 앞선 행동, 자신 속에 있는 생명의 행동이 낳은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서 그 분의 뜻과 바람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솟아내는 샘물은 살아 있는 샘, 즉 활천(活川)입니다. 저의 호는 능천(能川)입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이 능력을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 능력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복음 역사를 섬기라는 소망 가운데 이런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의의 샘, 덕의 샘, 사랑의 샘, 믿음의 샘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합니다. 내면으로부터 갈망과 부름과 몰아침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승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에 우리 안에 일어나는 어떤 움직임, 어떤 자극, 어떤 부름, 어떤 몰아부침, 우리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어떤 갈망을 느낍니다.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글을 읽으며 다른 일에 몰두할 때, 우리 속에서 갑자기 그 무엇이 그 누군가 우리를 움직여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는 그의 수하에서 그의 권세 하에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때로 타락하여 세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옛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매력적이고 재미있어 보이고 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이 능력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두 세력이 우리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세력 사이에서 갈등을 느낍니다. 괴롭습니다. 성가십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6-1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죄를 짓고자 할 때 양심도 우리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이는 양심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능력이 우리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완전함을 갈망하시고, 질투하기까지 갈망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갈망이 있습니다. 육체가 세상 편이고 마귀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투쟁을 해야 합니다. 아직 우리의 몸이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맞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일생 동안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에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으십니다. 그리고 죄를 계속해서 짓지 않도록 역사하십니다. 신자는 때로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죄의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악에 머무르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순종하거나 저항하거나,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거나 소멸하거나, 적극적으로 따르거나 불순종하는 편을 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자를 택하면 참으로 비참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돌아가면 집 나간 탕자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이런 삶을 기뻐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떤 술고래는 어느 날 갑자기  술 맛이 떨어지고 골초가 담배를 끊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의 길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크기가 다양합니다. 역사하시는 방법도 바람처럼 사람마다 다릅니다. 절대로 하나같지 않습니다. 세상에 똑 같은 꽃은 없습니다. 눈도 그 결정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똑 같아 보일지 몰라도 잘 보면 절대 똑 같지가 않습니다. 세상에 똑 같은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마다 능력의 크기도 다 제 각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 지체는 다 필요합니다. 함께 한 몸을 이루고 다 각각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입니다.

  사도들은 재판을 받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이것이 능력입니다. 왜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그들이 전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몇 주 전에는 제 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는 당국자들이 두려웠고 체포될까 무서워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막으려고 해 봐야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절대 멈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라(고전 9:16)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골1:29).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준비합니다. 활동하고 전도 여행을 합니다. 바울은 힘을 다 합니다. 이것은 바울 속에 능력이 있고 불이 있어서 그를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도 똑 같은 고백을 합니다. 예레미야 20:9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핍박하고 매국노라고 말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려 해도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생수를 내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하자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회개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바른 예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여인에게 “내가 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 마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파하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마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자 동네 사람들과도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마리아의 목자가 됩니다. 그녀의 삶에 하나님의 평강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현재 목마름이 있다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다른 웅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지성인들의 지성에, 감성의 목마름을 능히 채워줍니다. 샘솟듯이 올라오는 아이디어와 풍성한 감성으로 예술가들의 마음에 참된 만족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샘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물을 퍼서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수의 강을 이루도록 힘을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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