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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4년 예알2강(요3:1-16) 영적세계로의 인도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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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8회 작성일 14-02-16 14:07

본문

2014년 예알공부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3:1-16
요절 | 요한복음 3:3

영적세계로의 인도자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거듭남에 대한 진리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거듭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육적인 탄생이 있듯이 영적인 탄생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남만큼 심오한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단지 우리의 겉모습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중생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며 새롭게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지금 가진 것 이외에 무언가를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힘으로는 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근본부터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남을 ‘새 창조’에 비유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로마서 6:11절에서는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일어나는 변화의 근본적인 성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바울과 같이 증거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사람이 변화되면 육신을 따르던 사람이 영을 따르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던 사람이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지정의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변화된다고 할 때는 지적인 변화만이 아닙니다. 감정과 의지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기가 탄생하면 어린이로 청년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갑니다. 마침내 노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의 과정 곧 성숙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향을 받고 발전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아기일 때에도 이런 본질적인 생명이 있으며 언제나 자신을 드러냅니다. 

  첫째, 거듭나게 되면 지성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 이전과는 다른 지성, 다른 이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거듭나기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장가를 듣는 듯 잠을 자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나면 잠이 깨었습니다. 잔소리가 심한 사람을 영어로 a nagging person이라고 말합니다. 잔소리 좀 그만해! 영어로 하면 Enough of your preaching!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잔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이 전하는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구약과 신약의 기록된 말씀이 주님이 살아서 들려주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송이 꿀을 먹는 것 같이 달게 듣습니다.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사물을 구별할 수 없지만 빛이 비추이게 되면 모든 사물이 구별되어 보이듯이 하나님과 자신,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생깁니다. 로마서 1:21-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렇습니다. 거듭나게 되면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 그 거짓됨과 허무함을 알고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섬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8-10, 12-13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대단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 성령이 없고 새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엡 4:18절에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총명이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는 그들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일과 성령의 일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전체 시각을 지배합니다. 자기 노력으로는 이런 마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생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의 지성과 이해와 시각과 방향에 참으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거듭난 사람의 감성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느낌과 감정도 포함합니다. 이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습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믿는 삶과 진리의 다스림을 받는 삶에는 가슴의 변화, 감동이 따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합니다. 우리는 의무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아니면 열심과 열망과 흥분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세상의 어느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님을 절감하면서 나옵니까? 이것이 우리가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테스트 해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율법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기뻐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무겁게 여겨지지 않습니다(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슴은 찬양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우리의 신앙에 이런 느낌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아무 느낌이나 감정도 없이 그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맞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기독교에는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고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부터 1904년 8월 7일까지 만 5년 7개월 간 한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한성감옥은 지금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약 6개월 간 손목에는 수갑, 다리에는 족쇄, 그리고 목에는 10Kg의 무거운 칼을 쓰고 미결수의 생활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조만간 처형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심각한 종교적 고뇌를 겪었습니다. 그는 애비슨 박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어 성경과 영한사전을 차입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입수된 신약성경을 탐독하던 이승만은 1899년 1-2월 경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선교학교(배재학당)에 다닐 때에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선교학교에서 어느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승만이 거듭나자 동료 죄수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 과거 독립협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양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와 그의 신앙동지들은 생지옥 같은 한성감옥을 ‘복당’(The House of Blessing)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의 영향으로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죄수와 간수의 수는 무려 40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도서관과 옥중학당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옥한 이후에 교회를 세우고 단체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 나라를 건국하고 복음화 시키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셋째,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의지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갈망은 이해와 느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우리는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더 그 가운데 거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주님은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사람, 윤리적이고 금욕적인 사람과 다릅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엄격하고 자신을 훈련하고 순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감사를 표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으면 세상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되도록 세상에서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새 능력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6:14)” 왜 그렇습니까?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옛 사람은 죄와 사탄의 속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5-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의 지체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바뀝니다. 새로운 성향을 갖습니다. 이 성향이 그 사람의 전부를, 지정의를 다스립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지정의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마음이 새로워지고 감정이 새로워지고 이해가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함을 가르치십니다. 이를 위해 민수기 21:4-9에 기록된 사건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자 길이 험하다느니, 음식이 박하다느니 하면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불뱀은 날아다니면서 불평하는 입술을 물었습니다(사30:6). 그때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고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불뱀에 물린 상처에 십자로 찢어 피를 뽑아냈거나 해독제를 발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뱀에 물렸는데 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14,15절을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 같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성령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이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욕하고 원수되었던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또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나의 죄를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자기의 사랑 주머니를 채우고자 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성공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 물질로 그 주머니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자매님들은 형제의 사랑으로, 형제들은 자매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청춘사업에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 넣습니다. 그러다가 돈만 날리고 남는 건 상처뿐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해 주어도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 주머니는 두둑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결핍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좋은 가정을 이루고 나중에 교육을 더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결핍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알 때 더 이상 세상의 일시적이고 한계적인 사랑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나 좀 사랑해 줄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사랑에 목마른 양들의 목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6b절을 봅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멸망은 영원한 형벌을 말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가 지옥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계21:9). 지옥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이 있습니다. 이런 형벌은 실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지옥에서는 죄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이 영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이란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뿐만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교제하며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사람이 못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요, 아무리 육적인 것들을 많이 얻어도 행복할 수 없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깨닫고 위기감을 느끼며,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거듭난 분들은 하나님 나라를 더 풍성히 체험하며, 성장하고,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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