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4년 예알1강(요2:1-11)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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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예수알기 제 1 강
말씀 | 요한복음 2:1-11
요절 | 요한복음 2:11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우리는 삼 주간에 걸쳐서 예수 알기 특강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요 일생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도 초보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고 새롭게 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그 다음 주에는 우리 안에 생명수를 얻는 길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가진 삶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생수가 흘러넘칠 때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에스겔서 47장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초청을 받아 간 곳이 혼인 잔치였습니다. 누구의 결혼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은 신비롭게 밤에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잔치 집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축하하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시를 낭독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향기롭고 달콤한 포도주와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었습니다. 이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3a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포도주는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시104:15, 전10:9)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세상 일에 지친 손님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고 힘과 위로, 무엇보다도 풍성한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했습니다. 손님들은 포도주를 마음껏 마시면서 주인의 풍성함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필수품인 포도주가 동이 나버렸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섬기는 종들이 먼저 당황하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주인으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주인은 올 손님 수를 예상하여 준비했는데, 신랑 신부의 인기가 너무 좋아 손님이 많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셔버렸습니다. 주인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 성도를 신부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혼인 잔치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포도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은 무엇에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필요를 인식합니다. 그러나 진짜 필요, 근본적인 필요, 중심의 진정한 필요는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자신을 생각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방법은 내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돈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활동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몸으로 활동해야 살아 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마디로 행동주의입니다. 생각을 하고 책을 읽고 기도에 헌신하고 연구하는 것은 일로 여기지 않는 행동주의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에 자신의 활동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조금 다른 형태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우리 삶에 안식처, 조용한 장소, 언제든지 머물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습니까? 온갖 활동을 하다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 평안과 고요를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에 가면 궁극적인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어서 언제든지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바쁘고 번잡한 시대, 일과 오락에 끌려가는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힘들면 게임으로 도피하고 문제를 잠시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궁극적인 안식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평안과 확신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 속에서 자신이 정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흔들리지 않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합니다. 세상 것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의 필요를 절대로 채우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물질이 필요한데 아무리 많은 물질도 우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음악도 우리의 귀를 다 채우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미술작품들도 우리의 시각을 다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세상의 향락 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만족을 거기서 얻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잠시 고민을 잊으며 행복을 느낍니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혼자 남습니다. 다시 자신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다시 목마릅니다. 가족의 사랑을 의지하지만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자기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그는 성공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모든 가축과 양떼와 아내와 자식들을 다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창 32:24). 왜 그렇습니까? 지금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인간은 우주보다 큽니다. 인간은 산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고, 피조물이 생산하는 모든 것보다 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그래서 세상은 인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분과의 교제만이 영혼의 만족을 줍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자기 자신과 자기 본성과 자기 존재를 정확히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은 처음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정확히 알면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도 절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필연입니다. 인간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죄문제를 해결 받고 그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아십니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에게는 성령의 새 술,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행 2:13).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새 포도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를 예수님께로 들고 나갔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예수님께 해결을 부탁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a,3).” 여러분 필요를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마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이 상황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마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나아가 있는 사실 그대로 아뢰십시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해결책이 없습니다(막9:29).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있고 그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는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은 마리아는 잔칫집 하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주권을 마음 깊이 인정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방향을 받기 전 자기 나름대로 어떤 행동이나 계획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는 전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대로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와 하인들을 통해서 일하셨고 포도주를 돌 항아리에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에 쓸 물을 채워두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돌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 항아리를 다 채우려면 대략 세 드럼통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전혀 엉뚱한 명령입니다. 없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인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포도주를 만들려면 물보다 포도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종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종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이 겉으로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불신하면 그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실 때도 침과 흙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은 포도주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고 힘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물을 길어올 수는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종들에게 '너희는 지금부터 각 동네로 흩어져서 믿음으로 포도주를 구해 오라' 하셨더라면 그것은 종들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그 일은 종들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자라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포도주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엉뚱하게 물을 긷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주 문제는 옆으로 제쳐 두고 물을 길으라고 방향을 주셨고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포도주 문제에 얽매인 사람이나 성질 급한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열이 받쳐서 예수님과 하인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는 판에 무슨 물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혼인 잔치에서 일어나는 이 광경을 보면 예수님과 종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종들이 보기에도 물을 긷는 것은 포도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이런 종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필요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항아리에 물을 다 채우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그러자 하인들은 이번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으며, 연회장은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갑자기 신랑을 부르더니 극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와는 전혀 상관없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취하게 되면 맛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연회장은 취한 상태에서도 그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기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최상급 포도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다 최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집의 흥은 더욱 고조되었고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항아리의 물은 그냥 물로 그쳤을 것이요 포도주 모자란 문제는 그냥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말씀의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물의 양만큼 포도주의 양도 정해졌습니다. 만일 종들이 항아리에 반쯤만 물을 채웠더라면 포도주도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이 물을 여섯 항아리 가득 채웠기 때문에 포도주도 그만큼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자들이 믿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나 사상이나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할 수 있는 분은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제자들은 참으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변하고 도덕이 변하고 지성이 변하고 영적으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도로 , 영적지도자로, 거룩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두려움 많던 베드로가 얼마나 담대하고 확신에 넘치며 자유함을 누리며 복음을 전합니까! 복음에는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의 양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1000조원의 가계 빚, 600만 명의 비정규직, 100만 명의 청년 백수, 결혼 비용 때문에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가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절벽 사회에서 시한폭탄이 터질 것 같은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볼멘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힘을 쓸 때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그렇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모자란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필요했던 포도주를 풍성히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기쁨을 풍성케 하십니다. 사랑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궁핍을 느끼고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사랑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울은 간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채워주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 삶에 기쁨과 축복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율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금욕적인 삶이 아니라 경건한 삶이며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종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세상을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삶입니다. 혼인잔치의 기쁨은 결코 육체적이고 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축복하신 거룩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혼인잔치와 같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 집에 오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곳에 일어난 곤경과 당황스러움을 보시고 따뜻한 사랑과 능력으로 돌보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장래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을 모르지만 그날 하루 하루를 예수님의 힘으로만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질도 아니요 세상의 쾌락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세상 것들은 나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일생 영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홀연히 변하여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새 포도주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2:1-11
요절 | 요한복음 2:11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우리는 삼 주간에 걸쳐서 예수 알기 특강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요 일생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도 초보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고 새롭게 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그 다음 주에는 우리 안에 생명수를 얻는 길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가진 삶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생수가 흘러넘칠 때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에스겔서 47장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초청을 받아 간 곳이 혼인 잔치였습니다. 누구의 결혼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은 신비롭게 밤에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잔치 집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축하하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시를 낭독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향기롭고 달콤한 포도주와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었습니다. 이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3a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포도주는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시104:15, 전10:9)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세상 일에 지친 손님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고 힘과 위로, 무엇보다도 풍성한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했습니다. 손님들은 포도주를 마음껏 마시면서 주인의 풍성함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필수품인 포도주가 동이 나버렸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섬기는 종들이 먼저 당황하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주인으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주인은 올 손님 수를 예상하여 준비했는데, 신랑 신부의 인기가 너무 좋아 손님이 많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셔버렸습니다. 주인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 성도를 신부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혼인 잔치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포도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은 무엇에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필요를 인식합니다. 그러나 진짜 필요, 근본적인 필요, 중심의 진정한 필요는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자신을 생각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방법은 내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돈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활동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몸으로 활동해야 살아 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마디로 행동주의입니다. 생각을 하고 책을 읽고 기도에 헌신하고 연구하는 것은 일로 여기지 않는 행동주의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에 자신의 활동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조금 다른 형태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우리 삶에 안식처, 조용한 장소, 언제든지 머물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습니까? 온갖 활동을 하다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 평안과 고요를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에 가면 궁극적인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어서 언제든지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바쁘고 번잡한 시대, 일과 오락에 끌려가는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힘들면 게임으로 도피하고 문제를 잠시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궁극적인 안식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평안과 확신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 속에서 자신이 정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흔들리지 않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합니다. 세상 것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의 필요를 절대로 채우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물질이 필요한데 아무리 많은 물질도 우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음악도 우리의 귀를 다 채우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미술작품들도 우리의 시각을 다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세상의 향락 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만족을 거기서 얻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잠시 고민을 잊으며 행복을 느낍니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혼자 남습니다. 다시 자신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다시 목마릅니다. 가족의 사랑을 의지하지만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자기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그는 성공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모든 가축과 양떼와 아내와 자식들을 다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창 32:24). 왜 그렇습니까? 지금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인간은 우주보다 큽니다. 인간은 산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고, 피조물이 생산하는 모든 것보다 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그래서 세상은 인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분과의 교제만이 영혼의 만족을 줍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자기 자신과 자기 본성과 자기 존재를 정확히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은 처음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정확히 알면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도 절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필연입니다. 인간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죄문제를 해결 받고 그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아십니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에게는 성령의 새 술,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행 2:13).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새 포도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를 예수님께로 들고 나갔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예수님께 해결을 부탁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a,3).” 여러분 필요를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마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이 상황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마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나아가 있는 사실 그대로 아뢰십시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해결책이 없습니다(막9:29).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있고 그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는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은 마리아는 잔칫집 하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주권을 마음 깊이 인정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방향을 받기 전 자기 나름대로 어떤 행동이나 계획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는 전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대로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와 하인들을 통해서 일하셨고 포도주를 돌 항아리에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에 쓸 물을 채워두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돌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 항아리를 다 채우려면 대략 세 드럼통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전혀 엉뚱한 명령입니다. 없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인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포도주를 만들려면 물보다 포도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종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종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이 겉으로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불신하면 그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실 때도 침과 흙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은 포도주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고 힘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물을 길어올 수는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종들에게 '너희는 지금부터 각 동네로 흩어져서 믿음으로 포도주를 구해 오라' 하셨더라면 그것은 종들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그 일은 종들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자라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포도주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엉뚱하게 물을 긷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주 문제는 옆으로 제쳐 두고 물을 길으라고 방향을 주셨고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포도주 문제에 얽매인 사람이나 성질 급한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열이 받쳐서 예수님과 하인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는 판에 무슨 물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혼인 잔치에서 일어나는 이 광경을 보면 예수님과 종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종들이 보기에도 물을 긷는 것은 포도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이런 종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필요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항아리에 물을 다 채우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그러자 하인들은 이번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으며, 연회장은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갑자기 신랑을 부르더니 극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와는 전혀 상관없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취하게 되면 맛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연회장은 취한 상태에서도 그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기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최상급 포도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다 최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집의 흥은 더욱 고조되었고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항아리의 물은 그냥 물로 그쳤을 것이요 포도주 모자란 문제는 그냥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말씀의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물의 양만큼 포도주의 양도 정해졌습니다. 만일 종들이 항아리에 반쯤만 물을 채웠더라면 포도주도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이 물을 여섯 항아리 가득 채웠기 때문에 포도주도 그만큼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자들이 믿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나 사상이나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할 수 있는 분은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제자들은 참으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변하고 도덕이 변하고 지성이 변하고 영적으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도로 , 영적지도자로, 거룩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두려움 많던 베드로가 얼마나 담대하고 확신에 넘치며 자유함을 누리며 복음을 전합니까! 복음에는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의 양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1000조원의 가계 빚, 600만 명의 비정규직, 100만 명의 청년 백수, 결혼 비용 때문에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가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절벽 사회에서 시한폭탄이 터질 것 같은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볼멘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힘을 쓸 때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그렇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모자란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필요했던 포도주를 풍성히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기쁨을 풍성케 하십니다. 사랑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궁핍을 느끼고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사랑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울은 간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채워주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 삶에 기쁨과 축복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율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금욕적인 삶이 아니라 경건한 삶이며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종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세상을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삶입니다. 혼인잔치의 기쁨은 결코 육체적이고 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축복하신 거룩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혼인잔치와 같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 집에 오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곳에 일어난 곤경과 당황스러움을 보시고 따뜻한 사랑과 능력으로 돌보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장래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을 모르지만 그날 하루 하루를 예수님의 힘으로만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질도 아니요 세상의 쾌락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세상 것들은 나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일생 영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홀연히 변하여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새 포도주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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