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20강(15:1-20) 마음을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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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20 강
말씀 | 마태복음 15:1-20
요절 | 마태복음 15:19,20
마음을 깨끗하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재능이 있습니다. 홍대 캠퍼스 구석에 좀 섬뜩한 인물상이 놓여있습니다. 배를 열어 내장을 보이고 머리가 똥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사람의 머리 속이 똥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머리를 또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제자들이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더럽혀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손을 씻는 것은 위생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정결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한데 그것이 지나쳐서 너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구체적인 규례들을 세세하게 만들다보니 그것으로 사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모순이요 죄악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부모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법이 나왔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데 먼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영적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인간의 이기심이 그런 전통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르반이라고 선언해 놓고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고르반의 전통을 악용하여 부모 공경의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만든 전통이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당시 이렇게 고르반이라고 선언한 것들 중 일부를 제사장들이 뇌물로 받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참으로 가증한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전통이나 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 권위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신앙과 삶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기초로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질타를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의 말은 그럴싸해도 마음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죽고 입만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으려면 깊이 생각하고 적용을 해야 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좋은 마음 밭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손을 씻었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무당이 고사를 지낸 음식을 받는다면 먹기가 께름칙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에 대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자신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여 먹지 않았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세에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3)”고 했습니다. 고박완서 작가의 글에서 보았는데 하루는 옆집에서 이사를 와서 고사를 지내고 떡을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런데 한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고사를 지낸 떡이라 하여 받지 않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에 두 집안이 평생 원수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받고 먹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12)” 걸림이 된다는 말은 실족케 하다, 성나게 하다, 불쾌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났으니 핍박하고 복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그들의 교권을 생각하면 두려움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생각은 예수님이 좀 돌려서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돌 직구를 날리시는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직언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제자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그 길을 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교리는 견고하지만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전통이나 규례는 다 뽑힐 것입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맹인과 같은 지도자가 맹인과 같은 백성들을 인도하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자신도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백성들도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다 같이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듣고 깨달은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점에서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는 어린 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쉬운 비유의 말씀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겸손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함으로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아직까지도 깨달음이 없느냐?”고 실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먹은 음식은 위장과 소장 대장을 거치면서 양분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배출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했습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입니다. 악한 생각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악한 생각입니다. 악한 생각은 다음 6가지 죄악의 근본이 됩니다. 즉 살인(6계명), 간음(7계명), 음란(간음과 같은 의미), 도둑질(8계명), 거짓증언(9계명) 등은 모두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비방은 사람에 대해서는 험담, 욕설, 중상모략 등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신성모독적인 언사를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더럽고 추한 죄악들입니다. 이런 더러운 죄악들이 부패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밖으로 나올 때 사람은 거룩함을 잃고 더러워집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무엇을 깨끗해야 합니까? 손을 씻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손만 씻으면 깨끗하다고 생각했듯이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깨끗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죄가 씻어집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와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의 깨끗한 피가 우리의 더러운 피를 정결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할 때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그의 사랑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함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 속에 성령을 보내사 역동적으로 내주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인격 속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평강와 기쁨과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길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어도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해 지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질 때 행동과 삶이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8).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일 3: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했던 요셉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그의 상전 보디발 조차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불신자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되면 마음의 동기와 행동이 일치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말과 행실이 진실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시편 119:9절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이 깨끗한 곳에 물고기들이 번성하듯이 우리의 삶이 깨끗할 때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돌고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부자가 되고 인생의 쾌락을 즐기고 자기 성취를 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거짓된 복음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거짓 사상들과 선생들이 많습니다. 한 목자님은 500년 전에 종교개혁을 해야 했던 상황과 지금 한국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혼란한 시대에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고 깨끗한 삶을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깨끗해질 때 주위를 맑게 하는 일들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놀라운 구속의 은혜가 새롭게 우리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5:1-20
요절 | 마태복음 15:19,20
마음을 깨끗하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재능이 있습니다. 홍대 캠퍼스 구석에 좀 섬뜩한 인물상이 놓여있습니다. 배를 열어 내장을 보이고 머리가 똥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사람의 머리 속이 똥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머리를 또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제자들이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더럽혀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손을 씻는 것은 위생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정결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한데 그것이 지나쳐서 너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구체적인 규례들을 세세하게 만들다보니 그것으로 사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모순이요 죄악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부모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법이 나왔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데 먼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영적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인간의 이기심이 그런 전통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르반이라고 선언해 놓고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고르반의 전통을 악용하여 부모 공경의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만든 전통이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당시 이렇게 고르반이라고 선언한 것들 중 일부를 제사장들이 뇌물로 받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참으로 가증한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전통이나 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 권위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신앙과 삶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기초로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질타를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의 말은 그럴싸해도 마음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죽고 입만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으려면 깊이 생각하고 적용을 해야 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좋은 마음 밭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손을 씻었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무당이 고사를 지낸 음식을 받는다면 먹기가 께름칙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에 대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자신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여 먹지 않았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세에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3)”고 했습니다. 고박완서 작가의 글에서 보았는데 하루는 옆집에서 이사를 와서 고사를 지내고 떡을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런데 한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고사를 지낸 떡이라 하여 받지 않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에 두 집안이 평생 원수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받고 먹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12)” 걸림이 된다는 말은 실족케 하다, 성나게 하다, 불쾌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났으니 핍박하고 복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그들의 교권을 생각하면 두려움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생각은 예수님이 좀 돌려서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돌 직구를 날리시는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직언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제자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그 길을 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교리는 견고하지만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전통이나 규례는 다 뽑힐 것입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맹인과 같은 지도자가 맹인과 같은 백성들을 인도하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자신도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백성들도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다 같이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듣고 깨달은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점에서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는 어린 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쉬운 비유의 말씀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겸손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함으로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아직까지도 깨달음이 없느냐?”고 실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먹은 음식은 위장과 소장 대장을 거치면서 양분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배출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했습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입니다. 악한 생각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악한 생각입니다. 악한 생각은 다음 6가지 죄악의 근본이 됩니다. 즉 살인(6계명), 간음(7계명), 음란(간음과 같은 의미), 도둑질(8계명), 거짓증언(9계명) 등은 모두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비방은 사람에 대해서는 험담, 욕설, 중상모략 등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신성모독적인 언사를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더럽고 추한 죄악들입니다. 이런 더러운 죄악들이 부패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밖으로 나올 때 사람은 거룩함을 잃고 더러워집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무엇을 깨끗해야 합니까? 손을 씻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손만 씻으면 깨끗하다고 생각했듯이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깨끗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죄가 씻어집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와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의 깨끗한 피가 우리의 더러운 피를 정결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할 때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그의 사랑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함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 속에 성령을 보내사 역동적으로 내주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인격 속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평강와 기쁨과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길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어도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해 지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질 때 행동과 삶이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8).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일 3: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했던 요셉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그의 상전 보디발 조차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불신자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되면 마음의 동기와 행동이 일치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말과 행실이 진실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시편 119:9절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이 깨끗한 곳에 물고기들이 번성하듯이 우리의 삶이 깨끗할 때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돌고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부자가 되고 인생의 쾌락을 즐기고 자기 성취를 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거짓된 복음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거짓 사상들과 선생들이 많습니다. 한 목자님은 500년 전에 종교개혁을 해야 했던 상황과 지금 한국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혼란한 시대에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고 깨끗한 삶을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깨끗해질 때 주위를 맑게 하는 일들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놀라운 구속의 은혜가 새롭게 우리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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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4-07-20 13: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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