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19강(14:1-21)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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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9 강
말씀 | 마태복음 14:1-21
요절 | 마태복음 14:20,21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늘 말씀은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헤롯은 분봉 왕으로서 백성들을 돌보고 먹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일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세례 요한의 목을 벰으로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배고픈 무리들을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이후 제자들이 백성들의 목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지도자로서 무리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시대 상황.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누가 징계하지 않았지만 악을 행하는 자의 영혼에 곤고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그 능력이 예수님 속에서 역사한다고 신하들에게 떨면서 말을 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자 요한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선동죄로 요한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마침내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때 헤로디아는 딸을 시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라고 끔찍한 요구를 했습니다. 왕은 근심하였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헤롯의 생일 잔치였습니다. 그의 잔치는 시뻘건 피의 잔치였습니다. 소름이 끼치는 잔치였습니다. 이런 공포 시대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둘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은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도하러 빈 들로 가셨습니다. 이는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라 요한의 죽음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영접하고 자신도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빈들은 은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시대가 너무나 황량했습니다. 기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불안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에 희망이 사라진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알음알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원했지만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헤롯은 자신과 왕권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접하십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때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배고픈 그들을 먹이고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험악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부담을 안고 가십니다. 그들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백성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영육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꿈을 주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이 약속처럼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때마다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들을 견디며 하루 하루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존해 있다는 자체로 인해서 감사하고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양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도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일자리는 주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마음이 펴지고 믿음이 생기면 취직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믿음이 있는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셋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들의 제안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 저녁을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안인데 무리들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은 돈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자신들이 목자요 지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또 믿음이 없는 태도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핑계가 보이고 믿음이 있으면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환경만 바꾸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빈들에서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와 계시면 어떤 곳도 빈 들이 아닙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불가능한 가운데서 많은 기적을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이적들을 많이 체험했지만 예수님이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 가다가 기진할 것을 아셨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제자들을 그 시대의 목자로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이후에 그들이 시대를 책임지도록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할 것인가? 너희가, 바로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한 번 해 보자. 찾아나 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하게 됩니다. 찾아보지도 않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 그만 두는 것과 찾아보는 것, 시도해 보는 것, 해 보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는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요 심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해 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지가 있을 때 번뜩거리는 지혜가 떠오릅니다. 너무 쉽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 것이니(마 7: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지도자로서 일을 해결해 나가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확실합니다. 책임감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양들의 인생 문제에 관심을 갖고 끝까지 해결해 주려는 책임감이 있을 때 기도하게 됩니다. 양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목자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부담감을 안고 일을 하면서 속사람이 강해지고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없자 무리 중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안드레가 한 어린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고 예수님께 가져와 말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겨우 이것뿐이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한탄조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제자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비참할까요? 예수님께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정도로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예수님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상황을 바라볼 때 무슨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과소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찾지 않으시고 있는 것에서부터 큰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겨우 이것을 가져 왔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텍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온 그것을 인하여 감사하십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 모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사 목자님들, 사모님들, 대학생들, 중고생들, 초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적지만 시간도 있고 물질도 있고 일할 수 있는 건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가정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작아 보이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작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그것을 마중물로 쓰십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작게 여기고 초라하게 여기는 것들, 내 곁에 있는 문제 많은 동역자들, 연약한 양들, 부족한 물질, 부족한 시간, 이것뿐인가? 생각하면 자괴감,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낙심을 이기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템플 그랜든은 자폐증을 가진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녀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통해서 사고하고 생각을 키워나가는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가 말을 하게 되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엄마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예의와 규칙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현재 콜로라도 대학교 축산학과 교수입니다. 북미에서 길러지는 소의 절반 이상이 템플이 설계한 인도적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섬기는 몇몇 사람들을 그에게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가 가진 것들을 큰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들을 친히 먹이시고 키우실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셨습니다. 풀이 죽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서로 눈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도록 시키셨습니다. 그들은 50명씩, 100명씩 그룹을 지어 자리에 앉혔습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환경을 만들었을 때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이는 감사하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기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문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통로입니다. 기도할 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듣고 응답하시면 얼마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참할 뿐입니다. 무리들을 실제로 먹이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감사기도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떡을 떼어 주어도 계속 떼어 줄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10명, 50명, 100명, 1000명, 5000명을 떼어 먹이셨습니다. 여기서 ‘손에 들다’, ‘축사하다’, ‘떼다’, ‘주다’ 네 동사는 마태복음 26장 26절 최후의 만찬에 나온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를 볼 때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심을 의미하는 성만찬과 관계가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자기 몸을 부수어(break)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암시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의미를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영혼을 가진 우리를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과 희생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참석자 전원이 완전히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어떤 잔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식성과 취향이 다 다르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광야 식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그 잔치에 완전히 만족했습니다. 이는 메시아가 베푸시는 하늘 잔치의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다는 말은 이 잔치가 넉넉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도 참석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광야 잔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사건(출 16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의 원형이십니다. 이 시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주려 있습니다(암8:11).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을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살, 예수님의 사랑을 떼어 먹고 살아가며 참된 영혼의 만족을 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없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겠습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때 이를 받으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름 수양회도 우리의 오병이어를 드리는 심정으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오병이어, 심방의 오병이어, 초청의 오병이어, 식사 한 끼,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면서 양들을 초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시간과 정성을 드려서 수양회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참석자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고 배불리 먹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말씀 | 마태복음 14:1-21
요절 | 마태복음 14:20,21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늘 말씀은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헤롯은 분봉 왕으로서 백성들을 돌보고 먹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일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세례 요한의 목을 벰으로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배고픈 무리들을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이후 제자들이 백성들의 목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지도자로서 무리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시대 상황.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누가 징계하지 않았지만 악을 행하는 자의 영혼에 곤고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그 능력이 예수님 속에서 역사한다고 신하들에게 떨면서 말을 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자 요한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선동죄로 요한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마침내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때 헤로디아는 딸을 시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라고 끔찍한 요구를 했습니다. 왕은 근심하였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헤롯의 생일 잔치였습니다. 그의 잔치는 시뻘건 피의 잔치였습니다. 소름이 끼치는 잔치였습니다. 이런 공포 시대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둘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은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도하러 빈 들로 가셨습니다. 이는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라 요한의 죽음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영접하고 자신도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빈들은 은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시대가 너무나 황량했습니다. 기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불안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에 희망이 사라진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알음알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원했지만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헤롯은 자신과 왕권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접하십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때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배고픈 그들을 먹이고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험악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부담을 안고 가십니다. 그들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백성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영육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꿈을 주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이 약속처럼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때마다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들을 견디며 하루 하루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존해 있다는 자체로 인해서 감사하고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양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도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일자리는 주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마음이 펴지고 믿음이 생기면 취직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믿음이 있는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셋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들의 제안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 저녁을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안인데 무리들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은 돈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자신들이 목자요 지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또 믿음이 없는 태도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핑계가 보이고 믿음이 있으면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환경만 바꾸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빈들에서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와 계시면 어떤 곳도 빈 들이 아닙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불가능한 가운데서 많은 기적을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이적들을 많이 체험했지만 예수님이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 가다가 기진할 것을 아셨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제자들을 그 시대의 목자로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이후에 그들이 시대를 책임지도록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할 것인가? 너희가, 바로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한 번 해 보자. 찾아나 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하게 됩니다. 찾아보지도 않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 그만 두는 것과 찾아보는 것, 시도해 보는 것, 해 보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는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요 심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해 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지가 있을 때 번뜩거리는 지혜가 떠오릅니다. 너무 쉽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 것이니(마 7: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지도자로서 일을 해결해 나가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확실합니다. 책임감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양들의 인생 문제에 관심을 갖고 끝까지 해결해 주려는 책임감이 있을 때 기도하게 됩니다. 양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목자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부담감을 안고 일을 하면서 속사람이 강해지고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없자 무리 중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안드레가 한 어린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고 예수님께 가져와 말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겨우 이것뿐이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한탄조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제자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비참할까요? 예수님께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정도로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예수님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상황을 바라볼 때 무슨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과소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찾지 않으시고 있는 것에서부터 큰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겨우 이것을 가져 왔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텍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온 그것을 인하여 감사하십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 모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사 목자님들, 사모님들, 대학생들, 중고생들, 초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적지만 시간도 있고 물질도 있고 일할 수 있는 건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가정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작아 보이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작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그것을 마중물로 쓰십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작게 여기고 초라하게 여기는 것들, 내 곁에 있는 문제 많은 동역자들, 연약한 양들, 부족한 물질, 부족한 시간, 이것뿐인가? 생각하면 자괴감,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낙심을 이기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템플 그랜든은 자폐증을 가진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녀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통해서 사고하고 생각을 키워나가는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가 말을 하게 되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엄마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예의와 규칙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현재 콜로라도 대학교 축산학과 교수입니다. 북미에서 길러지는 소의 절반 이상이 템플이 설계한 인도적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섬기는 몇몇 사람들을 그에게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가 가진 것들을 큰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들을 친히 먹이시고 키우실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셨습니다. 풀이 죽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서로 눈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도록 시키셨습니다. 그들은 50명씩, 100명씩 그룹을 지어 자리에 앉혔습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환경을 만들었을 때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이는 감사하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기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문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통로입니다. 기도할 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듣고 응답하시면 얼마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참할 뿐입니다. 무리들을 실제로 먹이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감사기도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떡을 떼어 주어도 계속 떼어 줄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10명, 50명, 100명, 1000명, 5000명을 떼어 먹이셨습니다. 여기서 ‘손에 들다’, ‘축사하다’, ‘떼다’, ‘주다’ 네 동사는 마태복음 26장 26절 최후의 만찬에 나온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를 볼 때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심을 의미하는 성만찬과 관계가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자기 몸을 부수어(break)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암시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의미를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영혼을 가진 우리를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과 희생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참석자 전원이 완전히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어떤 잔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식성과 취향이 다 다르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광야 식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그 잔치에 완전히 만족했습니다. 이는 메시아가 베푸시는 하늘 잔치의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다는 말은 이 잔치가 넉넉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도 참석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광야 잔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사건(출 16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의 원형이십니다. 이 시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주려 있습니다(암8:11).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을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살, 예수님의 사랑을 떼어 먹고 살아가며 참된 영혼의 만족을 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없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겠습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때 이를 받으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름 수양회도 우리의 오병이어를 드리는 심정으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오병이어, 심방의 오병이어, 초청의 오병이어, 식사 한 끼,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면서 양들을 초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시간과 정성을 드려서 수양회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참석자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고 배불리 먹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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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다운로드 | DATE : 2014-07-13 14: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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