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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15강(마11:1-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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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3회 작성일 14-06-0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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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마태복음 15강
말씀 | 마태복음 11:1-30
요절 | 마태복음 11:28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날 사람들은 피곤함이 말로 다할 수 없어서 참된 쉼을 갖기 원합니다. 워낙 삶이 피곤하기 때문에 누구나 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병에 걸리고 피곤해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의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기억력이 약해지고 학생은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의욕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힘들어집니다. 쉬어도 피곤이 풀리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의존적이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의심하고, 조급하고, 외로움에 시달리고 이중적인 생활로 인해서 피곤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마음의 쉼이 없습니다. 이런 인생들을 예수님은 다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죄 짐, 인생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진정한 쉼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천국은 침노를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전도여행을 보내신 이후에 자신도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솔선수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힘이 있었고 영향력이 컸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을 듣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이신지 묻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마카이루스 성의 천연 요새 감옥에서 풀려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헤롯을 도끼로 징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심판보다는 겸손과 온유로 치유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 예수님을 인하여 그가 진정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회의는 요한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헛되이 살아온 것인가,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의심이 일어날 때 감옥 생활은 더욱 피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이 듣고 보는 것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사역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요한이 얼마나 큰 자인지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아무리 작은 자 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목격함으로 또는 성령의 역사로 천국의 실재를 믿게 된 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 보다 더욱 크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지금의 신자 등 어떤 인물의 위대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새 시대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이 이 세상에서 막강한 힘으로 전진하는데, 이러한 천국에 들어가고자 열정적으로 애쓰는 자들에 의해 그 나라가 채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요한의 천국 복음 전파 이후,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고요하게 머물지 않습니다. 휘몰아치듯 세상에서 확장되고 있고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이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천국은 점잖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가진 용기 있는 자들이 그 나라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천국은 그 가치를 알고 온 힘을 다하여 얻고자 하는 자의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세로 목적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자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대한 회의와 고민을 가지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쓰임 받고 상급을 얻는 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투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수양회를 할 때도 적극적인 자세로 참석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번 학사 수양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은혜를 받는 센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센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잘 분별하고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여름 수양회 강사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야 훈련도 받고 성장합니다. 강사를 하면 기도 지원도 받고 자신이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가장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는 것도 침노하는 자세를 가지고 해야 데려갈 수 있습니다. 연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침노하는 자세로 끈질기게 구하는 맹인들이 보게 되었고, 야이로가 딸을 구원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스피릿이 있고 젊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노하는 자세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쉼도 침노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 어린 아이같이 겸손한 자에게 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관심한 세대, 방관자의 세대라고 지적하십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놀이를 하였습니다. 피리를 불면 아이들이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슬피 울면 가슴을 치며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공감할 줄 모르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깊이 병든 것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금식을 하자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식충이다, 술꾼이다, 죄인의 친구로다 말하며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편이 아니면 무조건 비방하고 원수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그들은 요한과 예수님을 비방하였지만 하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대로 산 요한과 예수님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에 이리 저리 휘둘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에 따라 살 때 그 옳은 결과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지역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그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교만한 가버나움은 음부에 까지 낮아질 것입니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그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그 받을 형벌이 더 무겁게 됩니다. 시38:4절에 보면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며 시인은 탄식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생활은 마음에 돌덩어리를 계속 얹으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받은 것이 많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십니다. 특권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 보다도 더 큰 축복을 은혜의 선물로 받은 만큼,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서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진리의 계시가 가려지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영접하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 곧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영접하며 기뻐하는 자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잘 믿고, 회개도 잘 하고 마음이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에 부모님이나 어른들을 잘 믿고 따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죄악됨을 잘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천국을 누립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겸손한 사람들은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의 마음은 안정됩니다.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것’ 이란 만물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일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또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계시를 받은 것은 실로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때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사람들은 죄의 짐, 율법의 짐, 노동의 수고를 하면서 영육 간에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쟁심이 치열하기 때문에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조차도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스펙을 쌓아서 취직을 하고자 쉼이 없습니다.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죽도록 일하고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고, 사모님들은 아이들 양육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양 치느라 피곤합니다. 전도자는 “실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다(전 1:8)”고 설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피곤을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잠을 실컷 자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컴퓨터 게임이나 오락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술과 잡기로 피곤을 이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 보았자 그 때 잠간만 피곤이 풀리지 다시 피곤해 집니다. 여행을 하면서 피곤을 풀고자 하는데 사실 여행만큼 피곤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세상 유혹이 늘어나고 죄에 넘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잠시의 쾌락을 추구하면 될 것 같지만 한 번 맛을 보면 세상의 쾌락은 점점 강도를 더해야 만족을 누리기 때문에 나중에는 중독이 됩니다. 중독에서 헤어 나오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우리는 이를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날마다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서 죄의 짐을 그에게 내려놓고 대신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 모양의 막대인데 한 마리에 멜 수도 있고 두 마리에 멜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소 두 마리가 함께 메고 마차를 끄는데 쓰는 도구입니다. 어미 소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새끼 소는 가벼운 멍에를 메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거운 멍에를 다 지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옆에 와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멍에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그 혜택을 받아서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멍에는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게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삶이 가볍습니다. 우리가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죄에서 사함을 받고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가야 합니다. 그때 생명 구속 역사를 함께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에 딱 맞는 멍에를 메어주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짐을 지던지 예수님이 주신 짐을 지던지 멍에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 평신도 목자님들은 먹고 살기 위한 짐을 기본적으로 지면서 예수님이 주신 사명의 짐을 져야 합니다. 직장 일을 하고 나면 피곤하고 파김치가 되는데 거기다가 캠퍼스 양들을 섬기는 짐을 져야 하기 때문에 사명인의 삶은 이중의 멍에를 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명의 짐이라도 벗으면 더 편하고 자유로울 것 같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그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것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짐을 져 주시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짐을 져 주시면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어렵게 보여도 예수님이 함께 져 주시는 짐이 훨씬 더 가볍습니다. 평신도 학사 수양회에 참석하여 간증을 듣는 가운데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어떤 짐을 질 것인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는 것이 참으로 복을 받는 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연단하기 위해서 많은 짐을 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고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실제로 경험해 보면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더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쉼을 약속하십니다. 이 쉼은 마지막 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 가운데 누리는 쉼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주십니다. 사망이 주는 모든 두려움과 염려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주시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짐을 우리에게 지우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짐이 무거우면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던지 지혜를 주시던지 이를 감당할 내적외적 힘을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는 마음에 쉼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죽음의 권세와 허무에 시달렸고 무엇을 해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피곤하였습니다. 허무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먹고 씻는 것도 귀찮게 됩니다. 만사가 피곤해집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쉼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외롭습니다. 내면은 혈기와 반발심으로 속이 시끄럽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긴장하게 됩니다. 사나운 마음이 되면 긴장하게 되기 때문에 쉼이 없습니다. 죄의 짐은 우리의 마음을 누릅니다. 마음에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또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마음에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삶의 방향이 없으니 이리 저리 방황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다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마음은 구름 위를 날아다닐 것 같이 가벼워집니다. 마음이 가벼우니 삶에 활력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깁니다.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우게 되니 날마다 작지만 변화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겸손하면 마음이 안정을 찾게 됩니다. 온유한 예수님을 배우면 화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면서 깊이 소통하게 될 때 마음이 만족을 체험하게 됩니다. 공감과 소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독으로 인한 마음의 불안이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외롭고 함께 있으면 불안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소통과 공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사람과도 화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시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참된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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