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13강(9:18-38)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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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3 강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28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고질병을 가진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맹인이 보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십니다. 이런 기적들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치유 받는 사람들의 개인적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 힘으로 증상을 치유할 수는 있어도 영혼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아무 죄가 없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치유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우리 자신을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그는 야이로라 이름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예배 의식을 감독하고 두루마리를 돌보고 학교를 운영하며, 회중으로 하여금 율법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고 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안식일에 가르칠 랍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적대적이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그에게 나아와 절하며 그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야이로는 간절히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딸에 대한 야이로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였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권세를 가진 분으로 믿고 나아와 간구하는 야이로의 믿음으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간구를 기뻐하시고 즉각적으로 일어나 따라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멸시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가 구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회개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도리어 우상숭배자에게 나아가 묻는 그를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욕되게 죽게 하셨습니다. 똑같은 죽음이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지키고자 했습니다. 요시야 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9세의 나이에 앗수르를 치고자 올라온 애굽을 막아서 싸우다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 왜 하나님께서 의인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그를 아껴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어제 믿음으로 살다가 소천하신 이빌립목자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육신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현충원에 안치되었습니다. 선한 믿음의 싸움을 한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은 그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일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고에 대해서 이만 됐다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쉼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그를 기쁘게 하나님 나라로 보내야 하며 또 보냈습니다. 아빠를 하나님 나라로 보낸 사랑하는 딸 한나와 사라, 그리고 사모님, 장례를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목자님들께 주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매 제자들도 가는데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혈루증은 자궁내막염이라는 부인병으로서 부정기적으로 하혈하는 병입니다. 그녀는 끊임없는 출혈로 인해 빈혈에 시달리고 매사에 힘이 없었습니다. 또한 혈루증은 당시에는 부정하게 여겼습니다(레15:25-33). 그녀는 회당에서 예배할 수 없었으며 평범한 사회적 관계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병으로 육체가 시달리는데다가 사람들과 교제가 없어 정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형제들보다 더 관계를 중시합니다. 친구들이 없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질병이 생기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하다가도 잘 낫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밝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꿈을 꾸게 됩니다. 소망이 있으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선진들을 배우고 특히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해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녀는 애써 무리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 예수님 뒤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스치듯이 만졌지만 믿음으로 터치한 것을 예수님은 민감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세미한 부르짖음, 믿음으로 하는 작은 행동, 믿음으로 하는 생각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마가는 치유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앞서 치유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인이 터치하는 순간 혈루 근원이 말랐다고 기록합니다(막5:29). 그런데 마태는 치유의 과정보다는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인의 치유가 마가나 누가의 경우처럼 여인의 옷자락을 만진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결과인 것으로 기록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건드림이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을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그와 접촉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기계가 아니십니다. 또 모든 병든 사람을 고쳐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도 아니십니다. 그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하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세자이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을 ‘딸아!’ 하시면서 사랑스런 딸로서 영접해주십니다. 여인은 은밀하게 행한 일이기 때문에 ‘정죄당하지 않을까? 책망 받지 않을까? 예수님을 부정하게 한 것은 아닌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평강은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평강은 치료에도 도움이 됩니다. 마음의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평강 위에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을 낫게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지만 그 분의 치유의 능력과 구원을 불러일으킨 것은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백부장에게(8:13), 맹인들에게(9:29) “네 믿은 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믿음의 표현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깊은 신뢰를 주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믿음을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치료하였다”고 말씀하여야 할 것 같은데 왜 구원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나, 율법의 정죄나 관계성 단절, 공동체에서 소외 등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인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시니 피리를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장례식에서 슬픈 분위기를 짜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웃음과 불신의 분위기를 미워하십니다.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을 쫓아내심으로 영적인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소녀의 상태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무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내보낸 후에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죽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손을 만지시는 것을 본 회당장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삼일 전 고이빌립 목자님을 염을 하고 나서 입관하기 전에 한나가 장의사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아빠를 안아 봐도 돼요.”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 포옹은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손을 잡고 명령하시자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고 말씀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떠나실 때에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못 들은 체 하시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포기치 않는 자세로 예수님께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아오자 물으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어보셨을까요? 그들이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것인지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하셨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자세로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하실 분이신 줄 믿고 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정말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다윗의 자손이신지 묻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에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주님이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홍대 학생 열두 명 제자 양성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처한 현재의 물질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막힌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내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때 믿은 대로 되는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져주신 것은 그들에 대한 긍휼의 표현입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할 수도 있는데, 보지 못하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 캄캄한 세계에서 소외되어 살던 그들의 눈에 따뜻한 메시아의 손을 대어 주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그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손길을 느꼈을 때 상처 받은 마음이 녹았을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렸던 예수님의 생명의 손이 이번에는 빛을 잃었던 그들 눈에 빛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떠서 아름다운 꽃과 파란 하늘과 푸른 자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밤과 아침의 기이한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사람도 큰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고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인생의 운명을 개척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는 것은 내가 겸손하지 않을 때 많이 일어납니다. 내가 겸손히 듣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면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럼으로 말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며 인간 상호간에도 서로 관계 맺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 선물을 빼앗아 갑니다. 의사소통과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한 평생 같이 산 부부도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성령을 주시자 다른 언어로 인해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것을 뚫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닫힌 것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겸손히 배울 때 서로 간에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무리는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다르게 보았습니다.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며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눈은 떠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기진하는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여기셨습니다. ‘고생하다’라는 말은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의미이고, ‘기진하다’라는 말은 ‘쓰러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힘이 있었던 원천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이스라엘의 비참함은 정치, 경제적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목자가 없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생명의 꼴과 깨끗한 물 대신 독초나 구정물을 먹고 병들어 고통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이 길 저 길을 가다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이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천국의 능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만져주고 손을 잡아주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불쌍한 양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시대 캠퍼스 상황이 황폐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습니다. 천국에 관심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목자가 필요하고 천국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긍휼을 마음에 품고 캠퍼스에 나가 천국 복음으로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한계에 갇혀 있지 말고 다르게 생각해 보고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한계에 도전하고 정복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28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고질병을 가진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맹인이 보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십니다. 이런 기적들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치유 받는 사람들의 개인적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 힘으로 증상을 치유할 수는 있어도 영혼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아무 죄가 없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치유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우리 자신을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그는 야이로라 이름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예배 의식을 감독하고 두루마리를 돌보고 학교를 운영하며, 회중으로 하여금 율법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고 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안식일에 가르칠 랍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적대적이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그에게 나아와 절하며 그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야이로는 간절히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딸에 대한 야이로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였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권세를 가진 분으로 믿고 나아와 간구하는 야이로의 믿음으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간구를 기뻐하시고 즉각적으로 일어나 따라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멸시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가 구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회개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도리어 우상숭배자에게 나아가 묻는 그를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욕되게 죽게 하셨습니다. 똑같은 죽음이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지키고자 했습니다. 요시야 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9세의 나이에 앗수르를 치고자 올라온 애굽을 막아서 싸우다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 왜 하나님께서 의인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그를 아껴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어제 믿음으로 살다가 소천하신 이빌립목자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육신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현충원에 안치되었습니다. 선한 믿음의 싸움을 한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은 그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일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고에 대해서 이만 됐다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쉼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그를 기쁘게 하나님 나라로 보내야 하며 또 보냈습니다. 아빠를 하나님 나라로 보낸 사랑하는 딸 한나와 사라, 그리고 사모님, 장례를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목자님들께 주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매 제자들도 가는데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혈루증은 자궁내막염이라는 부인병으로서 부정기적으로 하혈하는 병입니다. 그녀는 끊임없는 출혈로 인해 빈혈에 시달리고 매사에 힘이 없었습니다. 또한 혈루증은 당시에는 부정하게 여겼습니다(레15:25-33). 그녀는 회당에서 예배할 수 없었으며 평범한 사회적 관계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병으로 육체가 시달리는데다가 사람들과 교제가 없어 정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형제들보다 더 관계를 중시합니다. 친구들이 없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질병이 생기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하다가도 잘 낫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밝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꿈을 꾸게 됩니다. 소망이 있으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선진들을 배우고 특히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해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녀는 애써 무리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 예수님 뒤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스치듯이 만졌지만 믿음으로 터치한 것을 예수님은 민감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세미한 부르짖음, 믿음으로 하는 작은 행동, 믿음으로 하는 생각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마가는 치유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앞서 치유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인이 터치하는 순간 혈루 근원이 말랐다고 기록합니다(막5:29). 그런데 마태는 치유의 과정보다는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인의 치유가 마가나 누가의 경우처럼 여인의 옷자락을 만진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결과인 것으로 기록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건드림이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을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그와 접촉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기계가 아니십니다. 또 모든 병든 사람을 고쳐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도 아니십니다. 그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하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세자이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을 ‘딸아!’ 하시면서 사랑스런 딸로서 영접해주십니다. 여인은 은밀하게 행한 일이기 때문에 ‘정죄당하지 않을까? 책망 받지 않을까? 예수님을 부정하게 한 것은 아닌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평강은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평강은 치료에도 도움이 됩니다. 마음의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평강 위에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을 낫게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지만 그 분의 치유의 능력과 구원을 불러일으킨 것은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백부장에게(8:13), 맹인들에게(9:29) “네 믿은 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믿음의 표현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깊은 신뢰를 주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믿음을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치료하였다”고 말씀하여야 할 것 같은데 왜 구원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나, 율법의 정죄나 관계성 단절, 공동체에서 소외 등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인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시니 피리를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장례식에서 슬픈 분위기를 짜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웃음과 불신의 분위기를 미워하십니다.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을 쫓아내심으로 영적인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소녀의 상태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무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내보낸 후에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죽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손을 만지시는 것을 본 회당장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삼일 전 고이빌립 목자님을 염을 하고 나서 입관하기 전에 한나가 장의사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아빠를 안아 봐도 돼요.”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 포옹은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손을 잡고 명령하시자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고 말씀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떠나실 때에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못 들은 체 하시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포기치 않는 자세로 예수님께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아오자 물으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어보셨을까요? 그들이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것인지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하셨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자세로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하실 분이신 줄 믿고 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정말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다윗의 자손이신지 묻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에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주님이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홍대 학생 열두 명 제자 양성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처한 현재의 물질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막힌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내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때 믿은 대로 되는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져주신 것은 그들에 대한 긍휼의 표현입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할 수도 있는데, 보지 못하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 캄캄한 세계에서 소외되어 살던 그들의 눈에 따뜻한 메시아의 손을 대어 주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그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손길을 느꼈을 때 상처 받은 마음이 녹았을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렸던 예수님의 생명의 손이 이번에는 빛을 잃었던 그들 눈에 빛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떠서 아름다운 꽃과 파란 하늘과 푸른 자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밤과 아침의 기이한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사람도 큰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고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인생의 운명을 개척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는 것은 내가 겸손하지 않을 때 많이 일어납니다. 내가 겸손히 듣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면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럼으로 말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며 인간 상호간에도 서로 관계 맺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 선물을 빼앗아 갑니다. 의사소통과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한 평생 같이 산 부부도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성령을 주시자 다른 언어로 인해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것을 뚫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닫힌 것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겸손히 배울 때 서로 간에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무리는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다르게 보았습니다.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며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눈은 떠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기진하는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여기셨습니다. ‘고생하다’라는 말은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의미이고, ‘기진하다’라는 말은 ‘쓰러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힘이 있었던 원천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이스라엘의 비참함은 정치, 경제적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목자가 없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생명의 꼴과 깨끗한 물 대신 독초나 구정물을 먹고 병들어 고통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이 길 저 길을 가다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이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천국의 능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만져주고 손을 잡아주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불쌍한 양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시대 캠퍼스 상황이 황폐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습니다. 천국에 관심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목자가 필요하고 천국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긍휼을 마음에 품고 캠퍼스에 나가 천국 복음으로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한계에 갇혀 있지 말고 다르게 생각해 보고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한계에 도전하고 정복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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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4-05-26 09: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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