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12강(9: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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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자신이 센터로 삼고 활동하던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 몇 사람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위에서부터 침상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자신들의 행동을 용납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실제적이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축복해주셨습니까?
2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고 상식에 어긋난 그들의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학벌을 보시거나 세상 지위를 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하셔서 말씀하십니다. 2b절을 보십시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예수님은 작은 자야,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용기를 가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2c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온 그에게 먼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가 마음으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몸뿐만 아니라 내면도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 미움과 판단으로 평강을 잃은 그의 내면을 아셨습니다. 음란과 정욕으로 정죄의식에 시달리고 무기력해진 그를 아셨습니다. 여러 가지 죄로 인한 그 영혼의 울부짖음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요즈음은 엑스레이사진으로 사람의 살 속의 뼈를 들여다보고, 내시경으로 위와 대장을 살피고, DNA 검사로 어떤 균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합당한 치료를 합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은 사람의 무의식 세계를 살피고 마음의 병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시고 죄를 치료 하십니다.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속죄를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자이십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요일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할 때 죄를 사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9:22절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물로 먼지나 때를 씻어내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냅니다. 죄를 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써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적용되도록 역사하십니다.
목자인 우리가 양들을 돕고자 할 때 일차적인 목표는 회개하고 거듭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나 돕는 양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도울 때 학업 성적을 올리고 취직을 하는 것 이전에 죄 사함을 받도록 도와야 합니다. 직장인들도 돈을 버는 것 이전에 죄 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내면에 힘이 생기고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공부도 잘 하게 되고 담대해지고, 직장에서도 효율적으로 일하게 됩니다. 사명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을 때 행복하고 자유롭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서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발끈했습니다. ‘감히 사람이 되어 죄 사함을 선포하다니. 무엄하도다.’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영육 간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힘 있게 일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복하고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는 무기력에서 박력있는 삶으로, 남을 의지하던 데서 자립적이고 정복하는 삶으로, 불평과 원망하던 삶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죄 사함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뀌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앉아 있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돌이키기 힘들만큼 너무 빗나간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세리가 되어 돈을 벌어서 인생을 즐기며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당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매국노요 죄인으로 멸시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과 같은 적대감이 깊은 자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당해 사병을 두기도 했습니다. 세리는 노예나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보다도 더 멸시를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세리가 되면 사회에서 추방되어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난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으면 창녀와 같이 공인된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부를 얻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함도 존경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을 위해 동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명예심도 팔고 인간의 고귀함도 팔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든 빗나간 삶을 보면서 절망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런 고뇌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돈을 따르는 인생 방향과 목적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열정이 있고 잘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방향만 잘 잡아주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마태의 이기심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를 인내하며 치료하셨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고 그를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두신 소망대로 그는 예수님의 사도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한 신문사 기자가 미국에 있을 때 20대 초반의 앳된 여군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 여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늘 ‘목숨을 걸만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목숨을 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리 마태처럼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자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럴 때 결과는 정욕과 우상숭배와 음란과 허무 등 비참한 죄의 열매만 맺으며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잡고 생명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평생 목숨을 걸 만한 일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사는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목숨을 걸만한 가치 있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감격한 마태는 세리 송별식을 하면서 예수님을 특별 강사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죄인들이 함께 만나는 장을 마련하여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또 서로 많이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고 주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많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불신으로 마음이 딱딱해지고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겸손히 섬기시는 예수님이 영접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태를 비롯한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사랑과 기쁨의 천국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님을 비난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도 소망을 두고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2,1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예수님은 죄인을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병든 자는 병만 치료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요, 세리와 같은 죄인을 병든 자로 보시고 그를 치료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호세아 6:6절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섬겨주신 사랑에 힘입어 양들을 섬기고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갖가지 모양으로 병든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잘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가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을 잘 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목자로 세우심을 입었지만 죄인들을 가르쳐 의롭게 살도록 돕지 않음으로 직무유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의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들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불쌍히 여기십니다.
셋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하시는 것을 보고 불평할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금식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 냄새와 향료가 그들의 코를 자극하였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볼멘소리를 하였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시 요한은 감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구자인 요한을 위한 구명 운동을 하거나 금식을 함으로 슬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제자들도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늘 즐겁고 기쁘게 생활을 하니 이상하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통 자체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시고 그 원리를 따라 행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새롭고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우리 마음이 새 가죽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성장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영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 가죽 부대가 되면 복음은 나를 통해서 생명력 넘치는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나가 깊이 회개하고 새 가죽 부대가 되어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자신이 센터로 삼고 활동하던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 몇 사람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위에서부터 침상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자신들의 행동을 용납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실제적이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축복해주셨습니까?
2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고 상식에 어긋난 그들의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학벌을 보시거나 세상 지위를 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하셔서 말씀하십니다. 2b절을 보십시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예수님은 작은 자야,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용기를 가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2c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온 그에게 먼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가 마음으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몸뿐만 아니라 내면도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 미움과 판단으로 평강을 잃은 그의 내면을 아셨습니다. 음란과 정욕으로 정죄의식에 시달리고 무기력해진 그를 아셨습니다. 여러 가지 죄로 인한 그 영혼의 울부짖음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요즈음은 엑스레이사진으로 사람의 살 속의 뼈를 들여다보고, 내시경으로 위와 대장을 살피고, DNA 검사로 어떤 균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합당한 치료를 합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은 사람의 무의식 세계를 살피고 마음의 병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시고 죄를 치료 하십니다.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속죄를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자이십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요일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할 때 죄를 사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9:22절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물로 먼지나 때를 씻어내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냅니다. 죄를 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써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적용되도록 역사하십니다.
목자인 우리가 양들을 돕고자 할 때 일차적인 목표는 회개하고 거듭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나 돕는 양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도울 때 학업 성적을 올리고 취직을 하는 것 이전에 죄 사함을 받도록 도와야 합니다. 직장인들도 돈을 버는 것 이전에 죄 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내면에 힘이 생기고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공부도 잘 하게 되고 담대해지고, 직장에서도 효율적으로 일하게 됩니다. 사명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을 때 행복하고 자유롭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서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발끈했습니다. ‘감히 사람이 되어 죄 사함을 선포하다니. 무엄하도다.’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영육 간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힘 있게 일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복하고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는 무기력에서 박력있는 삶으로, 남을 의지하던 데서 자립적이고 정복하는 삶으로, 불평과 원망하던 삶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죄 사함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뀌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앉아 있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돌이키기 힘들만큼 너무 빗나간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세리가 되어 돈을 벌어서 인생을 즐기며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당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매국노요 죄인으로 멸시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과 같은 적대감이 깊은 자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당해 사병을 두기도 했습니다. 세리는 노예나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보다도 더 멸시를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세리가 되면 사회에서 추방되어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난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으면 창녀와 같이 공인된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부를 얻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함도 존경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을 위해 동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명예심도 팔고 인간의 고귀함도 팔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든 빗나간 삶을 보면서 절망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런 고뇌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돈을 따르는 인생 방향과 목적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열정이 있고 잘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방향만 잘 잡아주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마태의 이기심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를 인내하며 치료하셨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고 그를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눈으로 마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두신 소망대로 그는 예수님의 사도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한 신문사 기자가 미국에 있을 때 20대 초반의 앳된 여군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 여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늘 ‘목숨을 걸만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목숨을 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리 마태처럼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자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럴 때 결과는 정욕과 우상숭배와 음란과 허무 등 비참한 죄의 열매만 맺으며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잡고 생명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평생 목숨을 걸 만한 일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사는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목숨을 걸만한 가치 있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감격한 마태는 세리 송별식을 하면서 예수님을 특별 강사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죄인들이 함께 만나는 장을 마련하여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또 서로 많이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고 주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많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불신으로 마음이 딱딱해지고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겸손히 섬기시는 예수님이 영접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태를 비롯한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사랑과 기쁨의 천국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님을 비난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도 소망을 두고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2,1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예수님은 죄인을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병든 자는 병만 치료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요, 세리와 같은 죄인을 병든 자로 보시고 그를 치료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호세아 6:6절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섬겨주신 사랑에 힘입어 양들을 섬기고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갖가지 모양으로 병든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잘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가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을 잘 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목자로 세우심을 입었지만 죄인들을 가르쳐 의롭게 살도록 돕지 않음으로 직무유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의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들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불쌍히 여기십니다.
셋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하시는 것을 보고 불평할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금식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 냄새와 향료가 그들의 코를 자극하였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볼멘소리를 하였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시 요한은 감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구자인 요한을 위한 구명 운동을 하거나 금식을 함으로 슬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제자들도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늘 즐겁고 기쁘게 생활을 하니 이상하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통 자체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시고 그 원리를 따라 행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새롭고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우리 마음이 새 가죽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성장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영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 가죽 부대가 되면 복음은 나를 통해서 생명력 넘치는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나가 깊이 회개하고 새 가죽 부대가 되어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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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다운로드 | DATE : 2014-05-18 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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