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11강(8:1-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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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11강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혼과 육체가 성한 곳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누군가 감당해주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부모님,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연약함을 감당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연약함을 감당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각자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음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예수님을 새롭게 더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내려 오셔서 그 말씀을 실천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는데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가족과 분리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그를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따뜻하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나아가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고쳐 주시겠지만 만에 하나 고쳐주지 않으셔도 원망할 수 있는 자격이 자기에게 없다는 자세입니다. 고쳐주지 않으셔도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또 주여 원하시면 이라는 고백은 주님께 간절한 소원을 아뢴 기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구한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더럽고 냄새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강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건강하고 순결하게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그는 나병을 앓게 되면서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생각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체념하고 이 모습 이대로 살다가 가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고 간구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환부에 대셨습니다. 이 스킨쉽으로 인해서 나병환자의 마음에 버림받은 상처, 거절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흑암에 앉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에 깊이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예수님께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그의 더럽고 고름이 흘러내리던 몸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흘러내리던 고름이 말라 버리고 굳어버린 딱정이가 떨어졌습니다. 짓물러진 피부에서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새 살이 돋아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믿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그가 이제 정결예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복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육체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회복까지 이루도록 도우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통합적이면서 완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건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들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둘째,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당시에 하인은 말하는 동물이요,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인을 한 인간으로서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의 고통에 동참하였습니다. 중풍병이 들면 계속 누워있기 때문에 욕창으로 인해서 큰 괴로움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은 몸을 수시로 뒤집어 주고 마사지를 해 주어야 하고 대소변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현실도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이런 하인의 아픔을 알고 백부장이 직접 나와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으시고 적극적으로 가셔서 치료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우주의 총사령관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높으신 분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집이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누추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독자로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죄인으로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하인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 경험을 통해서 말씀의 권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체계로 움직입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상관의 돌격 명령에 부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합니다. 군대는 상관의 말 한 마디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에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는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하인의 중풍병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세계, 영적 세계도 다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말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미치지 못할 사람, 미치지 못할 분야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대해 절대 신뢰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지식이 없지만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은 이렇게 큰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통째로 암송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다 암송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큰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믿음의 은사를 갖게 됩니다. 그는 장소가 달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그 능력이 전달될 것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서 전화를 하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대륙을 건너 러시아에서 목소리를 듣고 영상까지 봅니다. 인간의 과학기술도 이것이 가능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병환자도 그 믿음이 위대하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백부장도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이지만 공간을 초월해서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날 것을 믿었을 때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만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의 성취는 나의 현재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실 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캠퍼스 전도와 제자양성 역사는 나병이나 중풍병 치료처럼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부딪히는 현실이 이런 절망감을 갖게 합니다. 전도할 때 많은 거절과 떠남과 실패를 통해서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감당하도록 나를 금강석처럼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와 초월적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재주를 요구하지 않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생기면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제자 양성도 할 수 있고, 취직도 되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힘든 현실이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은 이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말,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아가고 믿음으로 아뢰고 믿음으로 행동해야겠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랄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은 택함 받은 자기들만 구원과 축복을 받는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 자손들은 쫓겨나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믿음은 혈통이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된 자부심만 갖고 있으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 쫓겨날 수 있고, 더 이상 쓰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거에 내 믿음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가진 믿음에 기초해서 그 믿음의 크기만큼 축복해 주셨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믿음은 우리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두 인격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의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그를 전적으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어떤 기대를 가지고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이성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식 수준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기도하며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열병은 풍토병입니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의 남모르는 아픔을 섬세하게 돌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손이 거칠고 쇠약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 손을 만지실 때 그의 사랑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속에서는 열병 환자의 손을 잡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여인은 주변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꽉 잡으셨습니다. 질병을 잡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심같이 이번에도 여인의 손을 잡으심으로 적극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닿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여인은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들었습니다. 앓아누운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서 수종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이 일어나서 수종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병에서 나음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로 회복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들어가서 영육간에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 구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안식일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은 메시야를 고난의 종, 슬픔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것, 병은 육적인 것이지만 그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며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인생들을 볼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그들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면서 치유하십니다. 이사야 53:4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의 연약함은 책망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함께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희생이 따릅니다. 사람들마다 한 가지 이상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를 잘 쳤지만 속두려움이라는 연약함이 있어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군이었지만 안목의 정욕에 약해서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했고 마음이 냉정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시고 그의 죄를 담당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글을 잘 썼지만 말은 어눌했습니다. 또 안질이나 간질이라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연약한 마가를 선교여행 중에 내쳤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를 영접하고 선교동역자로 함께 일을 했습니다. 또 그는 온유한 유모와 같이 양들을 사랑하며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병뿐만 아니라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의 사랑이 죄와 병을 짊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아파하고 근심하면서 도우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인생들의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슬피 우신 장면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 왕들처럼 자신의 무력을 행사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자 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왕의 모습이 단지 신적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연약함을 감당하는 섬세한 사랑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함과 질병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서 마음이 황폐해진 사람, 하도 무시를 받아서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고통하는 사람, 탐욕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정욕으로 인해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 질병으로 인해서 육신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등등. 예수님은 나의 말 못할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친히 담당하십니다. 수치스런 죄와 질병을 예수님의 몸으로, 십자가로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 복지와 소비의 행복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1:22-23). 우리가 더 부자가 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고난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배우는 삶에 생명력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감당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우리를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건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양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짊어지고 감당하는 사랑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내와 남편, 형제자매, 양들, 자녀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감당하고 짊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혼과 육체가 성한 곳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누군가 감당해주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부모님,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연약함을 감당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연약함을 감당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각자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음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예수님을 새롭게 더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내려 오셔서 그 말씀을 실천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는데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가족과 분리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그를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따뜻하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나아가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고쳐 주시겠지만 만에 하나 고쳐주지 않으셔도 원망할 수 있는 자격이 자기에게 없다는 자세입니다. 고쳐주지 않으셔도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또 주여 원하시면 이라는 고백은 주님께 간절한 소원을 아뢴 기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구한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더럽고 냄새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강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건강하고 순결하게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그는 나병을 앓게 되면서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생각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체념하고 이 모습 이대로 살다가 가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고 간구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환부에 대셨습니다. 이 스킨쉽으로 인해서 나병환자의 마음에 버림받은 상처, 거절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흑암에 앉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에 깊이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예수님께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그의 더럽고 고름이 흘러내리던 몸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흘러내리던 고름이 말라 버리고 굳어버린 딱정이가 떨어졌습니다. 짓물러진 피부에서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새 살이 돋아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믿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그가 이제 정결예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복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육체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회복까지 이루도록 도우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통합적이면서 완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건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들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둘째,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당시에 하인은 말하는 동물이요,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인을 한 인간으로서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의 고통에 동참하였습니다. 중풍병이 들면 계속 누워있기 때문에 욕창으로 인해서 큰 괴로움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은 몸을 수시로 뒤집어 주고 마사지를 해 주어야 하고 대소변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현실도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이런 하인의 아픔을 알고 백부장이 직접 나와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으시고 적극적으로 가셔서 치료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우주의 총사령관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높으신 분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집이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누추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독자로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죄인으로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하인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 경험을 통해서 말씀의 권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체계로 움직입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상관의 돌격 명령에 부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합니다. 군대는 상관의 말 한 마디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에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는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하인의 중풍병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세계, 영적 세계도 다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말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미치지 못할 사람, 미치지 못할 분야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대해 절대 신뢰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지식이 없지만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은 이렇게 큰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통째로 암송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다 암송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큰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믿음의 은사를 갖게 됩니다. 그는 장소가 달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그 능력이 전달될 것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서 전화를 하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대륙을 건너 러시아에서 목소리를 듣고 영상까지 봅니다. 인간의 과학기술도 이것이 가능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병환자도 그 믿음이 위대하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백부장도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이지만 공간을 초월해서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날 것을 믿었을 때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만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의 성취는 나의 현재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실 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캠퍼스 전도와 제자양성 역사는 나병이나 중풍병 치료처럼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부딪히는 현실이 이런 절망감을 갖게 합니다. 전도할 때 많은 거절과 떠남과 실패를 통해서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감당하도록 나를 금강석처럼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와 초월적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재주를 요구하지 않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생기면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제자 양성도 할 수 있고, 취직도 되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힘든 현실이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은 이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말,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아가고 믿음으로 아뢰고 믿음으로 행동해야겠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랄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은 택함 받은 자기들만 구원과 축복을 받는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 자손들은 쫓겨나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믿음은 혈통이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된 자부심만 갖고 있으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 쫓겨날 수 있고, 더 이상 쓰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거에 내 믿음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가진 믿음에 기초해서 그 믿음의 크기만큼 축복해 주셨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믿음은 우리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두 인격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의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그를 전적으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어떤 기대를 가지고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이성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식 수준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기도하며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열병은 풍토병입니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의 남모르는 아픔을 섬세하게 돌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손이 거칠고 쇠약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 손을 만지실 때 그의 사랑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속에서는 열병 환자의 손을 잡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여인은 주변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꽉 잡으셨습니다. 질병을 잡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심같이 이번에도 여인의 손을 잡으심으로 적극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닿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여인은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들었습니다. 앓아누운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서 수종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이 일어나서 수종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병에서 나음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로 회복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들어가서 영육간에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 구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안식일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은 메시야를 고난의 종, 슬픔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것, 병은 육적인 것이지만 그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며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인생들을 볼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그들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면서 치유하십니다. 이사야 53:4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의 연약함은 책망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함께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희생이 따릅니다. 사람들마다 한 가지 이상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를 잘 쳤지만 속두려움이라는 연약함이 있어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군이었지만 안목의 정욕에 약해서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했고 마음이 냉정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시고 그의 죄를 담당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글을 잘 썼지만 말은 어눌했습니다. 또 안질이나 간질이라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연약한 마가를 선교여행 중에 내쳤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를 영접하고 선교동역자로 함께 일을 했습니다. 또 그는 온유한 유모와 같이 양들을 사랑하며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병뿐만 아니라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의 사랑이 죄와 병을 짊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아파하고 근심하면서 도우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인생들의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슬피 우신 장면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 왕들처럼 자신의 무력을 행사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자 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왕의 모습이 단지 신적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연약함을 감당하는 섬세한 사랑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함과 질병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서 마음이 황폐해진 사람, 하도 무시를 받아서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고통하는 사람, 탐욕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정욕으로 인해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 질병으로 인해서 육신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등등. 예수님은 나의 말 못할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친히 담당하십니다. 수치스런 죄와 질병을 예수님의 몸으로, 십자가로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 복지와 소비의 행복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1:22-23). 우리가 더 부자가 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고난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배우는 삶에 생명력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감당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우리를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건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양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짊어지고 감당하는 사랑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내와 남편, 형제자매, 양들, 자녀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감당하고 짊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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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4-05-17 19: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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