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10강(7:13-29) 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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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10 강
말씀 | 마태복음 7:13-29
요절 | 마태복음 7:24
듣고 행하는 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오늘 말씀은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배웠던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의 주옥같은 말씀에 대해서 아 좋은 말씀이다 라며 듣고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는 두 문, 두 종류의 나무, 두 선지자, 두 건축자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대조되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 ‘좁다’라는 원어의 의미는 ‘고난’, ‘박해’의 뜻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박해와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길이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길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죽이며 회개하는 투쟁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죽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요, 세상 욕심과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과 아픔을 감당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또 한 번의 결단과 각오로 좁은 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한 후에도 좁은 길이 기다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선한 분량이 충만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엡4:13) 끊임없이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회개의 소감을 쓰고 말씀을 붙드는 투쟁을 줄기차게 감당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여기서 ‘넓다’는 말의 뜻은 육신적으로 편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써 인간의 육체적 소욕에 걸맞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삶은 죄악된 본성 그대로, 육신이 원하는 삶, 세상 조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며 헛된 세상 영광을 얻고자 달려가는 삶입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 삶은 당장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결과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반면 좁은 문, 좁을 길로 가는 삶은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입니다. 현재 감당하는 수고나 고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좁은 길의 목표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길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와 동행하는 길이라면 좁은 길은 목자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힘입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소수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감사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이 길을 힘있게 가야겠습니다.
둘째,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라고 해서 다 쉽고 편한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어려운 길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이리는 양을 헤치고 잡아먹고자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자 합니다. 거짓된 교리, 잘못된 교리를 사용합니다. 그들의 삶이 비윤리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성을 가지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거짓 평강을 말합니다(렘6:13,14). 그들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바른 것을 보게 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 거짓된 것을 보입니다(사30:10). 탐욕을 부립니다(렘6:13).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는데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며 속입니다(겔22:28).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미혹합니다(렘23:25, 마24:24).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짓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6,20). 그들의 열매는 삶의 열매입니다. 그들이 선함과 의로움,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이들의 삶을 보려면 오래 지켜보아야 합니다. 통일교 문선명,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구원파 유병언 등도 각각 며느리와 그 측근들에 의해 실체가 폭로됨으로써 거짓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는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될 때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요,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스려 노하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지 않고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화목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지 않고 마음을 더럽히는 꼬투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할 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의를 행하는 것,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고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말만 하는 사람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의 대조입니다. 신앙고백을 진실 되게 하면 고백하는 사람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성경도 가르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불법을 행하는데도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탄도 능력을 행사합니다. 이 말씀은 은사주의의 함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사는 나오고 사람은 모이고 능력도 있는데, 불법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주님이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권능을 행하는 것과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주님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행한 그 일을 통해 자기들의 영광을 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주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름을 높인 것이므로 외식을 행한 것이 됩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여러 일을 행했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선지자처럼 말을 했지만 말한 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습니다(마24:24).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불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여러 일을 했지만 실상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주님을 잘 아는 것처럼 말했겠지만, 정작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흠 없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동기가 자기 영광에 기초한 것이었다거나 양에게 가르친 것과 다르게 산다면 역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24-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결국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의 차이는 환란 날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본문보다 장로들이 전해준 규례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한마디를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고 깊이 알게 되면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의지적인 결단을 해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인 결단을 한다고 해도 그 말씀대로 살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에 익숙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이 몸에 배어 행할 수 있으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배가 침몰하는데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구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왕좌왕하다가 시간을 허비합니다. 구명조끼가 있고 구명정이 있어도 사용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 줄 알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하지 못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동주의자들은 마음은 없는데 행동하는 것으로 때울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 사람이 사랑으로 느끼도록 사랑해야지 나 중심적으로 사랑해서는 사랑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의 사랑 표현이 다릅니다. 개는 꼬리를 세우면서 흔들면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그것을 화가 날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봉사를,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스킨쉽을,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을 잘 알아야 그가 원하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질적인 구제를 해도 죄 사함을 받는 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고 맛있는 것만 전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로 본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해서는 한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할 때 듣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서 자유롭게 또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반석 위에 짓든, 모래 위에 짓든 외형상으로는 똑같은 집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하나는 무너지고 하나는 고고하게 든든히 서 있습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심하게 무너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한 사람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지만 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비와 창수와 바람은 각종 환난들, 죽음, 그리고 최후에는 주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한계적인 인간의 이성과 능력 위에 집을 짓고서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원한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들었다면 들은 대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은 좋은데 수준이 너무 높아’, ‘어차피 지킬 수 없을 텐데’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너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에 행함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원을 위해서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므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이 임했습니다. 값비싼 복음을 헛되게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즐기기는 쉽지만 그것을 내면화시키고 순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주초를 파고 반석 위에다가 집을 지을 때 수고로움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또 반석이 나오기까지 땅을 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만나기까지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 작업에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쏟을 때 견고하고 오래 지속되는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여기서 놀란 것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위 있다는 것은 그 가르침 자체에 힘이 있어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본을 보여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할 때 그 가르침이 힘이 있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는 인격에서 또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7:13-29
요절 | 마태복음 7:24
듣고 행하는 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오늘 말씀은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배웠던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의 주옥같은 말씀에 대해서 아 좋은 말씀이다 라며 듣고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는 두 문, 두 종류의 나무, 두 선지자, 두 건축자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대조되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 ‘좁다’라는 원어의 의미는 ‘고난’, ‘박해’의 뜻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박해와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길이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길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죽이며 회개하는 투쟁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죽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요, 세상 욕심과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과 아픔을 감당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또 한 번의 결단과 각오로 좁은 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한 후에도 좁은 길이 기다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선한 분량이 충만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엡4:13) 끊임없이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회개의 소감을 쓰고 말씀을 붙드는 투쟁을 줄기차게 감당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여기서 ‘넓다’는 말의 뜻은 육신적으로 편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써 인간의 육체적 소욕에 걸맞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삶은 죄악된 본성 그대로, 육신이 원하는 삶, 세상 조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며 헛된 세상 영광을 얻고자 달려가는 삶입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 삶은 당장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결과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반면 좁은 문, 좁을 길로 가는 삶은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입니다. 현재 감당하는 수고나 고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좁은 길의 목표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길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와 동행하는 길이라면 좁은 길은 목자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힘입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소수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감사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이 길을 힘있게 가야겠습니다.
둘째,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라고 해서 다 쉽고 편한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어려운 길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이리는 양을 헤치고 잡아먹고자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자 합니다. 거짓된 교리, 잘못된 교리를 사용합니다. 그들의 삶이 비윤리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성을 가지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거짓 평강을 말합니다(렘6:13,14). 그들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바른 것을 보게 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 거짓된 것을 보입니다(사30:10). 탐욕을 부립니다(렘6:13).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는데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며 속입니다(겔22:28).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미혹합니다(렘23:25, 마24:24).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짓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6,20). 그들의 열매는 삶의 열매입니다. 그들이 선함과 의로움,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이들의 삶을 보려면 오래 지켜보아야 합니다. 통일교 문선명,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구원파 유병언 등도 각각 며느리와 그 측근들에 의해 실체가 폭로됨으로써 거짓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는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될 때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요,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스려 노하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지 않고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화목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지 않고 마음을 더럽히는 꼬투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할 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의를 행하는 것,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고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말만 하는 사람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의 대조입니다. 신앙고백을 진실 되게 하면 고백하는 사람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성경도 가르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불법을 행하는데도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탄도 능력을 행사합니다. 이 말씀은 은사주의의 함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사는 나오고 사람은 모이고 능력도 있는데, 불법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주님이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권능을 행하는 것과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주님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행한 그 일을 통해 자기들의 영광을 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주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름을 높인 것이므로 외식을 행한 것이 됩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여러 일을 행했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선지자처럼 말을 했지만 말한 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습니다(마24:24).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불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여러 일을 했지만 실상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주님을 잘 아는 것처럼 말했겠지만, 정작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흠 없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동기가 자기 영광에 기초한 것이었다거나 양에게 가르친 것과 다르게 산다면 역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24-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결국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의 차이는 환란 날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본문보다 장로들이 전해준 규례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한마디를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고 깊이 알게 되면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의지적인 결단을 해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인 결단을 한다고 해도 그 말씀대로 살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에 익숙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이 몸에 배어 행할 수 있으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배가 침몰하는데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구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왕좌왕하다가 시간을 허비합니다. 구명조끼가 있고 구명정이 있어도 사용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 줄 알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하지 못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동주의자들은 마음은 없는데 행동하는 것으로 때울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 사람이 사랑으로 느끼도록 사랑해야지 나 중심적으로 사랑해서는 사랑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의 사랑 표현이 다릅니다. 개는 꼬리를 세우면서 흔들면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그것을 화가 날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봉사를,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스킨쉽을,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을 잘 알아야 그가 원하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질적인 구제를 해도 죄 사함을 받는 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고 맛있는 것만 전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로 본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해서는 한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할 때 듣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서 자유롭게 또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반석 위에 짓든, 모래 위에 짓든 외형상으로는 똑같은 집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하나는 무너지고 하나는 고고하게 든든히 서 있습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심하게 무너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한 사람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지만 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비와 창수와 바람은 각종 환난들, 죽음, 그리고 최후에는 주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한계적인 인간의 이성과 능력 위에 집을 짓고서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원한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들었다면 들은 대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은 좋은데 수준이 너무 높아’, ‘어차피 지킬 수 없을 텐데’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너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에 행함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원을 위해서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므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이 임했습니다. 값비싼 복음을 헛되게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즐기기는 쉽지만 그것을 내면화시키고 순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주초를 파고 반석 위에다가 집을 지을 때 수고로움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또 반석이 나오기까지 땅을 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만나기까지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 작업에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쏟을 때 견고하고 오래 지속되는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여기서 놀란 것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위 있다는 것은 그 가르침 자체에 힘이 있어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본을 보여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할 때 그 가르침이 힘이 있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는 인격에서 또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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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4-05-17 19: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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