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9강(7:1-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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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마태복음 제 9 강
말씀 | 마태복음 7:1-12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이 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본이 됩니다. 우리가 이 기본적인 자세를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며 살아갈 때 유익하고 복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초로 인간관계를 가꾸어 감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판하지 말라.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비판이란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재판장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비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없는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문제가 있다면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손가락질을 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향하고 하나는 오발탄이고 세 개는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월권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비판은 재판관이 사건에 대해서 다 각도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정황을 신중하게 살피고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정황을 다 알지 못하고 한 면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삼가야 하고 판단하려면 아주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기꾼이 나를 속이려고 하는지 정말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거기서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고 또 구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건이나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사람이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주고자 하면 티를 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눈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철저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받고 자기의 행동을 바꾸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남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자발적으로 고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을 볼 때 더 큰 감동을 받고 따라하게 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는 누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허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깊이 먹고 소감을 진실 되게 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발견한 나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의 눈이 밝아진 후에야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또 남을 돕고자 할 때 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너 같은 아들을 둔 내가 불쌍하다, 왜 돌아왔냐?”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보니 기쁘구나. 네가 돌아오니 새롭게 아들을 얻은 행복한 마음이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 메시지입니다. 일반인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하는 짓이 정말 못 마땅하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하고 말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인들은 돌아온 탕자에게 “너 그 재산 다 어찌했느냐?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느냐? 사람들 보기가 정말 창피하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살진 송아지를 잡아 함께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랑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죄인을 회개로 이끌며 선한 사람으로 바꿉니다. 잠 17:10절은 말씀합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비판과 충고는 다릅니다. 충고는 남의 결함이나 잘못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기보다 한 마디라도 사랑이 담긴 말로 따끔하게 충고하는 것이 낫습니다. 형제의 죄 문제를 돕는 것은 눈에서 티를 빼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해야 합니다. 형제의 연약함을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비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남이 나에게 하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경청이야말로 자기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들을 때에 사랑을 느낍니다. 특히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나를 도우십니다. 동료들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경청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 객관적으로 진실인가? 그 사람이 선의에서 하는 말인가? 그 비판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생각을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청을 할 때 인격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면서 속을 끓이고 판단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직면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을 해야 합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아픈 책망을 할 때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멸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사람은 항상 잘못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망할 때는 먼저 그가 잘 한 점을 칭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열리고 부드러워집니다. 그 후에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해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을 고치게 됩니다. 또한 책망한 후에는 소망의 말, 위로의 말로 격려해서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지서를 연구해보면 대개 전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후반부에 위로의 메시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지혜롭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하나님 나라의 비밀 등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개를 애완견으로, 반려동물로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개는 사람이 토했던 것을 먹었습니다. 또 개는 부도덕한 짐승이었습니다. 돼지는 깨끗하게 씻겨주어도 도로 더러운 곳에 가서 눕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짐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한 의도로 말씀을 듣고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인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그들의 죄를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판단하고 물러서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살기등등할 때에는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인 후에 마음이 가난해졌고,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무지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해치고 괴롭히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후에 마음이 가난해져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고 주의 일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현 상황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신중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비판 문제가 나오고 다음에 기도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이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 자신의 변화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복음의 원수들을 잘 분별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어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들고 나가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말씀은 주님께 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손과 발을 움직여서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물러서거나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장애물을 극복하기까지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 때 우리는 강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얻고자 하는 것을 받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문은 열리라고 만든 것입니다. 벽을 두드리지 말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개 사람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과 관계해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람 속에 있는 영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이것도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파의 교리가 관계된 선장과 선원들의 양심을 마비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에 기초한 삶을 살지 않고 물질적인 토대 위에 인생을 건축하고자 할 때 풍랑이 오면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시민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부패한 본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성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치고 박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 위에 인생의 토대를 쌓아야 합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현재 듣고 계시며 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처럼 나의 기도를 열정적이 되게 하고 격려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고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시오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며 상담자요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롬8:32)? 천국백성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극복하여 풍성하고, 승리하는 위대한 생애를 살게 됩니다. 우리는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드리는 심정으로 새벽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고 양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을 풍성히 얻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므로 이를 믿고 남에게 대접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만 가지고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가장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죠지 뮬러아 같이 기도로 남을 대접할 수 있습니다. 남을 대접할 때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남을 돕는 것은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하고 지혜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최고의 대접을 할 때 그의 장래가 열립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돕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앞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대응입니다. 적극적인 대응은 비판하지 않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대접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남을 깎아 내리고 죽이는 것이지만 대접은 남을 세우고 치료하고 살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고 위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의 의견이 무시되지 않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기 원합니다. 나의 자존심이 무시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을 받기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똑 같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내가 먼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실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난해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가 잘 되도록 말씀을 주고, 칭찬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칭찬받기를 좋아하면서도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사람들은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볼 일만 끝나고 나면 가기가 바쁩니다.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먼저 대접하면 언젠가는 그 대접하는 대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먼저 선을 베풀면 반드시 자기에게 선이 돌아옵니다. 인간관계는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달라져야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태도가 달라지면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무엇을 받기만 바라지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그를 멸시하는 자를 그가 경멸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7:1-12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이 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본이 됩니다. 우리가 이 기본적인 자세를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며 살아갈 때 유익하고 복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초로 인간관계를 가꾸어 감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판하지 말라.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비판이란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재판장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비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없는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문제가 있다면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손가락질을 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향하고 하나는 오발탄이고 세 개는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월권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비판은 재판관이 사건에 대해서 다 각도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정황을 신중하게 살피고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정황을 다 알지 못하고 한 면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삼가야 하고 판단하려면 아주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기꾼이 나를 속이려고 하는지 정말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거기서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고 또 구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건이나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사람이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주고자 하면 티를 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눈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철저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받고 자기의 행동을 바꾸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남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자발적으로 고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을 볼 때 더 큰 감동을 받고 따라하게 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는 누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허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깊이 먹고 소감을 진실 되게 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발견한 나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의 눈이 밝아진 후에야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또 남을 돕고자 할 때 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너 같은 아들을 둔 내가 불쌍하다, 왜 돌아왔냐?”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보니 기쁘구나. 네가 돌아오니 새롭게 아들을 얻은 행복한 마음이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 메시지입니다. 일반인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하는 짓이 정말 못 마땅하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하고 말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인들은 돌아온 탕자에게 “너 그 재산 다 어찌했느냐?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느냐? 사람들 보기가 정말 창피하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살진 송아지를 잡아 함께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랑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죄인을 회개로 이끌며 선한 사람으로 바꿉니다. 잠 17:10절은 말씀합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비판과 충고는 다릅니다. 충고는 남의 결함이나 잘못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기보다 한 마디라도 사랑이 담긴 말로 따끔하게 충고하는 것이 낫습니다. 형제의 죄 문제를 돕는 것은 눈에서 티를 빼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해야 합니다. 형제의 연약함을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비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남이 나에게 하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경청이야말로 자기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들을 때에 사랑을 느낍니다. 특히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나를 도우십니다. 동료들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경청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 객관적으로 진실인가? 그 사람이 선의에서 하는 말인가? 그 비판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생각을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청을 할 때 인격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면서 속을 끓이고 판단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직면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을 해야 합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아픈 책망을 할 때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멸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사람은 항상 잘못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망할 때는 먼저 그가 잘 한 점을 칭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열리고 부드러워집니다. 그 후에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해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을 고치게 됩니다. 또한 책망한 후에는 소망의 말, 위로의 말로 격려해서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지서를 연구해보면 대개 전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후반부에 위로의 메시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지혜롭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하나님 나라의 비밀 등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개를 애완견으로, 반려동물로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개는 사람이 토했던 것을 먹었습니다. 또 개는 부도덕한 짐승이었습니다. 돼지는 깨끗하게 씻겨주어도 도로 더러운 곳에 가서 눕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짐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한 의도로 말씀을 듣고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인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그들의 죄를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판단하고 물러서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살기등등할 때에는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인 후에 마음이 가난해졌고,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무지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해치고 괴롭히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후에 마음이 가난해져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고 주의 일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현 상황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신중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비판 문제가 나오고 다음에 기도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이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 자신의 변화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복음의 원수들을 잘 분별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어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들고 나가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말씀은 주님께 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손과 발을 움직여서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물러서거나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장애물을 극복하기까지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 때 우리는 강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얻고자 하는 것을 받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문은 열리라고 만든 것입니다. 벽을 두드리지 말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개 사람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과 관계해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람 속에 있는 영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이것도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파의 교리가 관계된 선장과 선원들의 양심을 마비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에 기초한 삶을 살지 않고 물질적인 토대 위에 인생을 건축하고자 할 때 풍랑이 오면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시민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부패한 본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성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치고 박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 위에 인생의 토대를 쌓아야 합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현재 듣고 계시며 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처럼 나의 기도를 열정적이 되게 하고 격려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고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시오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며 상담자요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롬8:32)? 천국백성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극복하여 풍성하고, 승리하는 위대한 생애를 살게 됩니다. 우리는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드리는 심정으로 새벽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고 양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을 풍성히 얻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므로 이를 믿고 남에게 대접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만 가지고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가장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죠지 뮬러아 같이 기도로 남을 대접할 수 있습니다. 남을 대접할 때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남을 돕는 것은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하고 지혜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최고의 대접을 할 때 그의 장래가 열립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돕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앞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대응입니다. 적극적인 대응은 비판하지 않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대접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남을 깎아 내리고 죽이는 것이지만 대접은 남을 세우고 치료하고 살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고 위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의 의견이 무시되지 않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기 원합니다. 나의 자존심이 무시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을 받기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똑 같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내가 먼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실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난해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가 잘 되도록 말씀을 주고, 칭찬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칭찬받기를 좋아하면서도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사람들은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볼 일만 끝나고 나면 가기가 바쁩니다.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먼저 대접하면 언젠가는 그 대접하는 대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먼저 선을 베풀면 반드시 자기에게 선이 돌아옵니다. 인간관계는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달라져야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태도가 달라지면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무엇을 받기만 바라지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그를 멸시하는 자를 그가 경멸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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