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4년 봄 부활절 수양회2강(요11:1-4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조웨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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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부활절 수양회 2 강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또 죽음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며 함께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은 삶의 의욕을 앗아가 버립니다. 허무와 무의미, 슬픔과 무기력 속에 우리를 쳐 박아 넣습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로 인해서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보면서 그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 그리고 안산시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 세계 사람들이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렵고 답답합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미미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죽음은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큰 구덩이를 만들어 서로 오고 갈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이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아주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누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을 하고 또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들을 위로하며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며 새 생명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틀을 더 유하신 예수님(1-16)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가정도 시련과 환난을 겪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마리아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이들의 가정에 들러 말씀을 주시고 음식도 드시며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얼마 전에 차례로 여의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기둥 같은 든든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빠 나사로가 찬 비바람을 맞고 들어오더니 급성 폐렴과 같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환난을 만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마리아와 마르다는 동네에서 마라톤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예수님께 전갈을 부쳤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이 정도의 메시지만 전해도 예수님께서 총알 택시나 KTX를 타고 급히 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진도해역에서 아이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간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큰 환난과 위기를 만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뜻입니다. 삼성은 반도체가 불황일 때에 연구와 사업에 투자를 하여 호황의 때에 사업을 세계로 확장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소니는 호황의 때에 투자를 하여 제품이 나올 때쯤에 불황기를 만나서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소니는 사업이 위축되었습니다. 인생의 환난과 위기를 당하여 기도와 믿음을 배우고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적인 성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던 믿음마저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환난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모든 문명은 열악한 환경의 도전을 받고 응전을 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환난과 역경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탄생하고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음이 어두워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나사로 집안의 삼남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왜 이틀을 더 유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셨음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때를 찾으셨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취업의 문을 아무리 노크해도 열어주지 않는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 것인가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의도로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 돈을 가져가서 갚지도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 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급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있는 곳에서 기다리라는 방송을 듣고 순종하던 학생들만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고 이게 아니다 싶어 방송을 무시하고 빠르게 움직여 탈출하며 바다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다 구조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새 재난대처응급법이 나왔는데 그것은 “침착하게 기다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침착하게 대응했으면 다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도망간 선장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실험과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지혜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훈련하시는 사랑, 아픈 사랑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애타게 기다리는 줄을 아시면서도 이틀을 계시던 곳에 더 머무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과 절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우리들을 사랑하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식사초대 때는 그렇게 빨리 오시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왜 지체하실까? 그들로부터 이런 원망을 들을 줄 아시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면서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훈련하시는 사랑, 거룩한 사랑을 감당할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직장이나 물질문제나 집문제나 결혼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믿음을 심어주시는 것이 진정 참된 사랑입니다. 믿음을 심어주어야 다시 동일한 사건과 인생의 역경 환난 시련을 만나도 이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슬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시방편적으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지체하신 후 드디어 베다니로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의 얼굴색이 변하며 펄쩍 뛰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소경거지를 안식일에 고친 일로 인해 유대인과 사이가 악화되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10:31).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어떤 위험한 일이 있을지라도 행할 바를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1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잠 잘 자고 식사 잘하면 건강하다고 봅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을 듣고 나사로가 건강을 회복한 줄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분명히 알아듣도록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의리로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16b) 도마는 스승에 대한 의리로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의리에 기초한 이런 태도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갔습니다.
그 때 그 집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주님께서 초상을 만난 마르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의 집은 사망권세가 짙은 안개처럼 온 집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더운 지방이라 시체는 신속하게 매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례기간은 7일 동안 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을 하러 오는 것을 볼 때 나사로가 살았을 때 그 마을에서 많은 덕을 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덕도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위로를 해주고 같이 울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질 못합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 여객선 침몰 사고를 연일 뉴스를 통해서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슬픔과 분노와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옵니다. 대통령이 실종자와 유가족들에게 나와 위로의 말들과 약속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직업 특성상 장례식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느낀 점은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가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들에게는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 된 나사로의 시체처럼” 참 생명도 희망도 없고 다만 어둠만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부터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b) 사망 권세 앞에서 신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다도 믿음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께 원망을 하고 있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어떤 막연한 기대의 말을 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막연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마르다에게 부활신앙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 때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마르다의 말을 통해서 볼 때 마르다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르다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부활신앙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빠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절망을 하고 이제 체념단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만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인 상태에 있는 마르다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만이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부활의 권능자요 생명과 영생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26b)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일반적인 믿음, 상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개인적인 믿음이 있는지 인격적으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길 원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저는 죽음과 허무로 목적도 없이 방황하다 죄만 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4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는 내 삶에 짙은 어두움과 허무를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은 직장생활을 하던 30즈음, 당신의 때에 부활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어둡고 막연하던 삶이 일순간 빛으로 변하며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시간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믿음의 결혼을 한 얼마 되지 않은 31살 때 어머님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저는 육신적인 고아가 되었습니다. 연이어 33살 때는 가장 믿고 따랐던 셋째 형마저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은 사고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르다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백을 하면서도 사망권세는 나를 항상 따라 다녔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36살 때는 사랑하는 자녀를 태어난 지 1년3개월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38살 때는 제가 난치병에 걸려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님들의 많은 기도 지원과 위로 속에서도 슬픔과 아픔이 오랜 시간동안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남독려 외동딸 요안나의 재롱과 티없이 맑게 잘 자라줌에 행복하였습니다. 7년전인 만 41세 때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볼 때 제 주위에는 항상 죽음이 끊이지 않고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여기면서 하루 하루를 살 때가 많지만 죽음은 이렇듯 언제든지 우리를 위협하고 슬픔과 절망과 허무로 이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인 것처럼 나만 위협하고 허무로 이끌지만 본문 말씀은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한 번 유일하신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자라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 제 생애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참된 소망이요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28-44)
28-32절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도 마르다처럼 예수님께서 늦게 오심을 원망했습니다(32). 예수님은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예수님께서는 쉽게 우시는 분이 아니신데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며 신음하는 인생들에 대한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33). 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불신과 원망의 말을 하는 그들을 보고 통분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라고 말하며 손으로 코를 막았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이미 시체가 썩었으니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옮기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또 이는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주님은 마르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불가능할 일을 가능으로 바꿉니다. 믿음은 한계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두려워 떠는 자를 용감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연약한 자를 바꾸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한계 상황 앞에서, 죽음의 권세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을 갖도록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의 돌문을 여시고 그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러자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할 때와 같은 웅장하고 장엄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주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많은 무리들 앞에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부활이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수여하시는 생명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흘이 아니라 썩어서 흙이 된 자들도 일으켜 살리시는 절대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가 될 것입니다. 유일하신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와 죽음문제입니다. 또한 죽음의 권세인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과 원망과 허무와 운명주의가 인간을 괴롭혀 불행하게 만듭니다. 또한 죄의 종노릇으로 인해 인간은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더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웨슬레야, 두려움에서 나오라. 웨슬레야, 슬픔에서 나오라. 웨슬레야, 운명과 허무 속에서 나오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부활과 영생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과 죽음권세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실제 삶 가운데에서 부활신앙을 덧입고 항상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또 죽음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며 함께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은 삶의 의욕을 앗아가 버립니다. 허무와 무의미, 슬픔과 무기력 속에 우리를 쳐 박아 넣습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로 인해서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보면서 그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 그리고 안산시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 세계 사람들이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렵고 답답합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미미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죽음은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큰 구덩이를 만들어 서로 오고 갈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이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아주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누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을 하고 또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들을 위로하며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며 새 생명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틀을 더 유하신 예수님(1-16)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가정도 시련과 환난을 겪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마리아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이들의 가정에 들러 말씀을 주시고 음식도 드시며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얼마 전에 차례로 여의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기둥 같은 든든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빠 나사로가 찬 비바람을 맞고 들어오더니 급성 폐렴과 같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환난을 만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마리아와 마르다는 동네에서 마라톤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예수님께 전갈을 부쳤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이 정도의 메시지만 전해도 예수님께서 총알 택시나 KTX를 타고 급히 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진도해역에서 아이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간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큰 환난과 위기를 만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뜻입니다. 삼성은 반도체가 불황일 때에 연구와 사업에 투자를 하여 호황의 때에 사업을 세계로 확장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소니는 호황의 때에 투자를 하여 제품이 나올 때쯤에 불황기를 만나서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소니는 사업이 위축되었습니다. 인생의 환난과 위기를 당하여 기도와 믿음을 배우고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적인 성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던 믿음마저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환난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모든 문명은 열악한 환경의 도전을 받고 응전을 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환난과 역경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탄생하고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음이 어두워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나사로 집안의 삼남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왜 이틀을 더 유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셨음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때를 찾으셨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취업의 문을 아무리 노크해도 열어주지 않는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 것인가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의도로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 돈을 가져가서 갚지도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 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급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있는 곳에서 기다리라는 방송을 듣고 순종하던 학생들만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고 이게 아니다 싶어 방송을 무시하고 빠르게 움직여 탈출하며 바다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다 구조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새 재난대처응급법이 나왔는데 그것은 “침착하게 기다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침착하게 대응했으면 다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도망간 선장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실험과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지혜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훈련하시는 사랑, 아픈 사랑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애타게 기다리는 줄을 아시면서도 이틀을 계시던 곳에 더 머무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과 절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우리들을 사랑하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식사초대 때는 그렇게 빨리 오시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왜 지체하실까? 그들로부터 이런 원망을 들을 줄 아시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면서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훈련하시는 사랑, 거룩한 사랑을 감당할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직장이나 물질문제나 집문제나 결혼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믿음을 심어주시는 것이 진정 참된 사랑입니다. 믿음을 심어주어야 다시 동일한 사건과 인생의 역경 환난 시련을 만나도 이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슬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시방편적으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지체하신 후 드디어 베다니로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의 얼굴색이 변하며 펄쩍 뛰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소경거지를 안식일에 고친 일로 인해 유대인과 사이가 악화되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10:31).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어떤 위험한 일이 있을지라도 행할 바를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1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잠 잘 자고 식사 잘하면 건강하다고 봅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을 듣고 나사로가 건강을 회복한 줄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분명히 알아듣도록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의리로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16b) 도마는 스승에 대한 의리로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의리에 기초한 이런 태도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갔습니다.
그 때 그 집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주님께서 초상을 만난 마르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의 집은 사망권세가 짙은 안개처럼 온 집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더운 지방이라 시체는 신속하게 매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례기간은 7일 동안 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을 하러 오는 것을 볼 때 나사로가 살았을 때 그 마을에서 많은 덕을 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덕도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위로를 해주고 같이 울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질 못합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 여객선 침몰 사고를 연일 뉴스를 통해서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슬픔과 분노와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옵니다. 대통령이 실종자와 유가족들에게 나와 위로의 말들과 약속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직업 특성상 장례식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느낀 점은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가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들에게는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 된 나사로의 시체처럼” 참 생명도 희망도 없고 다만 어둠만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부터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b) 사망 권세 앞에서 신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다도 믿음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께 원망을 하고 있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어떤 막연한 기대의 말을 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막연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마르다에게 부활신앙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 때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마르다의 말을 통해서 볼 때 마르다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르다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부활신앙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빠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절망을 하고 이제 체념단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만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인 상태에 있는 마르다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만이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부활의 권능자요 생명과 영생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26b)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일반적인 믿음, 상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개인적인 믿음이 있는지 인격적으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길 원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저는 죽음과 허무로 목적도 없이 방황하다 죄만 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4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는 내 삶에 짙은 어두움과 허무를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은 직장생활을 하던 30즈음, 당신의 때에 부활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어둡고 막연하던 삶이 일순간 빛으로 변하며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시간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믿음의 결혼을 한 얼마 되지 않은 31살 때 어머님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저는 육신적인 고아가 되었습니다. 연이어 33살 때는 가장 믿고 따랐던 셋째 형마저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은 사고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르다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백을 하면서도 사망권세는 나를 항상 따라 다녔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36살 때는 사랑하는 자녀를 태어난 지 1년3개월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38살 때는 제가 난치병에 걸려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님들의 많은 기도 지원과 위로 속에서도 슬픔과 아픔이 오랜 시간동안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남독려 외동딸 요안나의 재롱과 티없이 맑게 잘 자라줌에 행복하였습니다. 7년전인 만 41세 때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볼 때 제 주위에는 항상 죽음이 끊이지 않고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여기면서 하루 하루를 살 때가 많지만 죽음은 이렇듯 언제든지 우리를 위협하고 슬픔과 절망과 허무로 이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인 것처럼 나만 위협하고 허무로 이끌지만 본문 말씀은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한 번 유일하신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자라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 제 생애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참된 소망이요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28-44)
28-32절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도 마르다처럼 예수님께서 늦게 오심을 원망했습니다(32). 예수님은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예수님께서는 쉽게 우시는 분이 아니신데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며 신음하는 인생들에 대한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33). 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불신과 원망의 말을 하는 그들을 보고 통분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라고 말하며 손으로 코를 막았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이미 시체가 썩었으니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옮기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또 이는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주님은 마르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불가능할 일을 가능으로 바꿉니다. 믿음은 한계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두려워 떠는 자를 용감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연약한 자를 바꾸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한계 상황 앞에서, 죽음의 권세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을 갖도록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의 돌문을 여시고 그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러자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할 때와 같은 웅장하고 장엄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주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많은 무리들 앞에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부활이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수여하시는 생명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흘이 아니라 썩어서 흙이 된 자들도 일으켜 살리시는 절대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가 될 것입니다. 유일하신 부활이요 유일하신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와 죽음문제입니다. 또한 죽음의 권세인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과 원망과 허무와 운명주의가 인간을 괴롭혀 불행하게 만듭니다. 또한 죄의 종노릇으로 인해 인간은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더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웨슬레야, 두려움에서 나오라. 웨슬레야, 슬픔에서 나오라. 웨슬레야, 운명과 허무 속에서 나오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부활과 영생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과 죽음권세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실제 삶 가운데에서 부활신앙을 덧입고 항상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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