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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년 막14강(0:1-29) 그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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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3회 작성일 24-06-3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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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4강
말씀 | 마가복음 9:1-29
요절 | 마가복음 9:7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형되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앞서서 부활의 영광을 먼저 보았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신 뜻은 무엇일까요?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1-13). 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엿새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아마 그들이 예수님의 버림받고 죽으신다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눈 앞에 국무총리 자리, 비서실장의 자리가 있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니 자기들의 숨겨진 꿈도 박살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그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도록 도우십니다. 또 핵심 리더들을 키우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현장에, 또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장차 죽음 앞에서 가장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변형되다는 문법이 신적 수동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의 본래 모습으로 변형시키신 것입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장차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얻게 될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습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3명의 언급, 구름이 산을 덮음, 6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산에 올라감, 영광스러운 광경을 봄은 출애굽기 24장과 평행됩니다. 모세는 메시야의 모형입니다. 잠시 후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제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별세는 엑소더스인데 출애굽의 그림자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죄인들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십니다.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출애굽을 이룬 모세를 보내심으로 구원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내다보게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세 제자에게 이런 영광스런 모습들을 보여주셨을까요?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마디로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엔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경험할 때 고난과 죽음을 자신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적인 의지만 가지고서는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 제자의 길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맛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맛보면 세상에서 고난 받고 깨어지고 내려놓는 게 조금은 쉬워집니다. 고난이 없이 영광만을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영광은 바라보지 않고 고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때에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나가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힘들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자매님들은 형제님들보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고난이 더 큽니다. 가정에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이 분들을 돌보아야 하는 실제적인 어려움과 마음고생도 있습니다. 우리 모임에 끝까지 남아서 사명을 감당하는 분들이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보석이요 금맥입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의 내면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갖기까지 연단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장점과 고난을 잘 다듬을 때 고귀한 인격으로 다듬어지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경험함으로 온유하고 겸손해집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더욱 클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분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고 예수님에게 ‘여기’ 머물자고 하면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 초막을 짓게 해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속으로는 저의 것도 하나 만들죠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엿새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해놓고 지금은 ‘랍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곧 떠났지만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서 두 사람을 계속 붙들어두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치셨는데, 베드로는 영광의 자리에 있는 게 좋으니 여기 머물자고 합니다. 

  그가 왜 이런 대답을 하였을까요? 성경은 제자들이 몹시 무서워하였고, 베드로도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해서 그랬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횡설수설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무의식에는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난보다 산 위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잠시 거쳐 가는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라는 태도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를 속이는 세상 가치관, 사람들의 소리를 따를 것이 아닙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도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되 경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경청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와 삶을 경청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며 연약한 우리의 소리를 경청하시며 우리의 삶을 용납하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도 진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대화할 때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 1:19)”고 강조합니다. 진지한 경청은 나의 생각과 말을 잠시 접어두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의 가슴 깊은 곳의 내적 심정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조용한 장소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먼저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그 말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샛별과 같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샛별’은 본래 ‘근원으로서의 빛’을 의미합니다. 모든 빛의 근원입니다. 즉 태양 빛을 포함하는 모든 빛을 가져오는 분, 예수님이 샛별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과 삶을 비추이십니다.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을 힘을 주십니다. 낙심과 절망을 바꿔 소망과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없었는데 떠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감정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전인적으로 들어야 하기에 엄청만 수고를 동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사랑을 느끼며, 그 말씀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치유와 회복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공감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믿음이 감당이 안 될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합니다. 조정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관하고 계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조정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나의 인생을 조정하고자 결단하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돈을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로 그의 인생을 조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의 농기구를 불태우고 24마리의 소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2마리의 소를 잡아 요리해서 온 동네 사람을 먹였습니다. 그는 필요한 조정을 하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비싼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관과 맞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고난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과 맞지 않고 세상이 부끄러워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기준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생각, 세상의 가치관에 매여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복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16,17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위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고 확신있게 고난의 길을 가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14-29). 예수님과 세 제자가 와서 보니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졌습니다. 이 아들은 뇌전증 환자였습니다. 그가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쳤으면 논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난 받고 죽으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경험에 의지하고 자신들을 의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귀신은 자기에게 집중하도록 시선을 끄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이 발광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고 아이의 아버지를 먼저 도우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은 그의 아픔을 들으시고 공감하셨습니다. 그의 말에는 예수님에게 가능하지 않은 일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한계를 지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파악하시고 어떻게 도우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작은 말 한 마디에 담긴 뿌리 깊은 불신앙을 간파하시고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기서 ‘믿는 자’는 아이의 아버지 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5:34,10:52).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표현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관계된 것 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애매하지만 ‘믿는 자’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부르짖음은 아버지의 회개가 담긴 기도였습니다. 그의 불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불신앙을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그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떤 문제 앞에서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불신앙을 고백하고 고쳐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앞에서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기도 외의 다른 것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도와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신앙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기도를 통해 일하십니다. 기도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강사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샛별같이 떠오르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초청하는 양들 안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구원을 받으며 제자로 살고자 결단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한계가 많이 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떠나가고, 믿음이 자라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는 힘들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력하고 수치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를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시도록 예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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