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7강(4:35-5:20) 그가 누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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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7강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나오는 광풍 훈련과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고, 군대 귀신도 제어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힘으로는 제어하기 어려운 환난을 만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있는 광풍을 잠잠케 해 주시고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내적 외적 광풍을 통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35-41). 가버나움에서 큰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은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놀이 중에 최고의 놀이는 뱃놀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아름답게 지는 석양을 뒤로하고 뱃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중해보다 해수면이 300미터 낮습니다. 북쪽에는 2,670미터나 되는 헐몬 산이 있습니다. 헐몬 산은 만년설로 덮여 있어서 눈 녹은 차가운 물이 좁은 계곡을 타고 내려와 갈릴리 호수로 모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방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아열대성 기후 열풍의 영향으로 상당히 덮습니다. 헐몬 산으로부터 내려온 차가운 공기와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리 호수에서 충돌하면 엄청난 위력을 가진 바람이 되어 갈릴리 호수를 내리치게 됩니다. 그날 불어온 바람은 ‘광풍’(狂風)으로서 ‘미친 바람’, 사납고 폭력적인 바람입니다. 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종종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언제 이런 바람이 발생할지는 어부들도 알 수 없습니다. 광풍을 예상했으면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큰 광풍이 들이닥쳐 물결이 배에 부딪치면서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모든 경험과 기술을 동원해서 대처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과 기술로는 광풍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배에 물이 가득하여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느라 매우 피곤하셨습니다. 그는 광풍으로 주위가 소란스럽고 물보라가 얼굴에 스쳤지만 곤히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자신들은 광풍과 싸우느라 지쳐가고 있는데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볼 때 그들은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큰 광풍 앞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과 죽어간다고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큰 광풍 속에서도 지극히 놀라운 평안을 누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안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14:7). 제자들은 평안을 누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의 어려움에 관심이 없다고 오해했습니다. 우리도 환난이나 예기치 못한 질병을 만나거나 어려운 상황이 오면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안도와주시고 내버려두신다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제까지 나에게 베풀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에 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간다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변할지 몰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타고 있는 배도 큰 광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광풍이 내리치지 않거나 혹은 광풍이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는 신자나 불신자나 다 걸리듯이 암도 신자나 불신자나 다 걸립니다. 이와 같이 광풍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올 수 있습니다. 광풍이 온다고 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광풍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이상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명에 가까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깨어 일어나셨습니다. 그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꼬리를 내리고 쥐 죽은 듯이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으냐?” 이는 너희가 어찌 아직까지 믿음이 없느냐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지금의 광풍 앞에서도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한 이유는 광풍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라고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지켜야 하는데, 광풍 앞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당연히 무서워할만한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이 왜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대상도 없고 실체도 없는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무서워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믿음을 가질 법한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이해력이 둔하고 성장이 더딥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거룩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광풍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제자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광풍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알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좀 더 깊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환난과 어려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환난과 어려움은 개인과 신앙 공동체를 망하게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도 예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신자들은 환난의 때 환난 자체보다도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게 됩니다. 신자와 교회 공동체에 광풍과 같은 환난이 들이닥치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풍과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고 예수님께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십니다.
저는 어머니의 위암 소식과 장모님의 치매, 자녀의 질병 문제 그 외에도 여러 문제로 광풍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처럼 여러 광풍 앞에서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광풍 앞에서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목자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바라보며 말씀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25,26, 40).” 우리에게 때때로 일어나는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거라사 광인을 치료하신 예수님(5:1-20). 예수님께서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도착해서 배에서 나왔습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20절에서 ‘데가볼리’에 속한 지역으로 나옵니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헬라화 되고 발달한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방인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말씀을 영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납니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제어한다는 말은 통제하다, 길들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교육이나 제도, 법, 전통, 권위로 통제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고 길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신의 통제를 받고 귀신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파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살 시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겉보기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넘어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쓸모없다고 여기며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으나 귀신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하였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그를 만나기도 전에 더러운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보이지 않지만 실체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영입니다. 성경은 사탄과 귀신이 지배하는 나라에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엡6:12).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면서도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이 사람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통찰하시고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 ‘그 사람’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강한 자 귀신은 지금까지 그 사람을 괴롭게 했지만 더 강한 자 예수님이 오시자 괴로워합니다. 지금까지 귀신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자기 집처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가라고 하시니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 먼저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그가 비록 귀신이 들렸지만 아주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고 소망을 두고 계시는지 알 때에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이름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를 소중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로 보았습니다. 그냥 ‘미친 놈’, ‘인간쓰레기’ 정도로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의 이름 대신에 그의 직업, 연봉, 집 평수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로 자기의 정체성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진짜 자아 대신 거짓 자아에 속아서 괴로워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자기의 인생 목표로 삼고 살아가면서 괴로워합니다. 참 자유는 거짓 자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자아를 찾을 때 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동시에 그 사람의 본래의 자아와 인격을 되찾게 해 주십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은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신에 의해 상실한 그의 자아를 찾아주는 것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묻자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는 대략 6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단급 부대를 의미합니다. 귀신은 군대와 같이 조직과 계급을 가지고 사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강한 자’라고 하셨습니다(3:27).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리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군대로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 정부는 신자들을 잔인하게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폭력성과 잔인함 뒤에는 귀신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로마 군대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고 짓밟혔다가 분노에 차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군대 귀신에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이에 귀신이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고자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셨을까요?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그 사람을 가치 있게 보셨습니다. 큰 희생을 통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처럼 대하는 쓸모없는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큰 희생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을 보고 예수님이 더 계시면 거라사의 경제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얼마나 물질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면서 자기 대신 이 사람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하자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보스톤의 한 정신병원 지하 병동에 어떤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정신질환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그 소녀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복 불가능을 선언하고 소녀를 독방에 감금했습니다. 소녀의 부모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소녀를 버렸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를 불쌍히 여긴 은퇴한 늙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소녀에게 사랑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먹을 것을 주면 집어던지고 말을 건네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변함없이 계속 사랑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이 소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간호사 때문에 이 소녀는 사람을 사랑하고 수용하게 되었으며 인격적인 만남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에서 치료되어 새 삶을 살게 되었으며, 다른 영혼을 향하여 봉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앤 설리반으로 나중에 자기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헬렌 켈러를 사랑과 인내로 교육함으로 헬렌을 세계적인 인물로 키워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생 거라사 광인과 같이, 앤 설리반과 같이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혈기의 종, 교만의 종, 열등감의 종, 정욕의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은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가장 귀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보배로운 피로 인해 생명을 얻었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광풍과 사탄의 공격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믿고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나오는 광풍 훈련과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고, 군대 귀신도 제어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힘으로는 제어하기 어려운 환난을 만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있는 광풍을 잠잠케 해 주시고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내적 외적 광풍을 통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35-41). 가버나움에서 큰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은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놀이 중에 최고의 놀이는 뱃놀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아름답게 지는 석양을 뒤로하고 뱃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중해보다 해수면이 300미터 낮습니다. 북쪽에는 2,670미터나 되는 헐몬 산이 있습니다. 헐몬 산은 만년설로 덮여 있어서 눈 녹은 차가운 물이 좁은 계곡을 타고 내려와 갈릴리 호수로 모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방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아열대성 기후 열풍의 영향으로 상당히 덮습니다. 헐몬 산으로부터 내려온 차가운 공기와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리 호수에서 충돌하면 엄청난 위력을 가진 바람이 되어 갈릴리 호수를 내리치게 됩니다. 그날 불어온 바람은 ‘광풍’(狂風)으로서 ‘미친 바람’, 사납고 폭력적인 바람입니다. 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종종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언제 이런 바람이 발생할지는 어부들도 알 수 없습니다. 광풍을 예상했으면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큰 광풍이 들이닥쳐 물결이 배에 부딪치면서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모든 경험과 기술을 동원해서 대처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과 기술로는 광풍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배에 물이 가득하여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느라 매우 피곤하셨습니다. 그는 광풍으로 주위가 소란스럽고 물보라가 얼굴에 스쳤지만 곤히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자신들은 광풍과 싸우느라 지쳐가고 있는데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볼 때 그들은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큰 광풍 앞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과 죽어간다고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큰 광풍 속에서도 지극히 놀라운 평안을 누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안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14:7). 제자들은 평안을 누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의 어려움에 관심이 없다고 오해했습니다. 우리도 환난이나 예기치 못한 질병을 만나거나 어려운 상황이 오면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안도와주시고 내버려두신다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제까지 나에게 베풀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에 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간다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변할지 몰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타고 있는 배도 큰 광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광풍이 내리치지 않거나 혹은 광풍이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는 신자나 불신자나 다 걸리듯이 암도 신자나 불신자나 다 걸립니다. 이와 같이 광풍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올 수 있습니다. 광풍이 온다고 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광풍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이상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명에 가까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깨어 일어나셨습니다. 그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꼬리를 내리고 쥐 죽은 듯이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으냐?” 이는 너희가 어찌 아직까지 믿음이 없느냐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지금의 광풍 앞에서도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한 이유는 광풍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라고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지켜야 하는데, 광풍 앞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당연히 무서워할만한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이 왜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대상도 없고 실체도 없는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무서워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믿음을 가질 법한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이해력이 둔하고 성장이 더딥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거룩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광풍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제자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광풍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알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좀 더 깊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환난과 어려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환난과 어려움은 개인과 신앙 공동체를 망하게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도 예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신자들은 환난의 때 환난 자체보다도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게 됩니다. 신자와 교회 공동체에 광풍과 같은 환난이 들이닥치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풍과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고 예수님께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십니다.
저는 어머니의 위암 소식과 장모님의 치매, 자녀의 질병 문제 그 외에도 여러 문제로 광풍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처럼 여러 광풍 앞에서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광풍 앞에서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목자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바라보며 말씀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25,26, 40).” 우리에게 때때로 일어나는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거라사 광인을 치료하신 예수님(5:1-20). 예수님께서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도착해서 배에서 나왔습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20절에서 ‘데가볼리’에 속한 지역으로 나옵니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헬라화 되고 발달한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방인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말씀을 영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납니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제어한다는 말은 통제하다, 길들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교육이나 제도, 법, 전통, 권위로 통제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고 길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신의 통제를 받고 귀신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파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살 시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겉보기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넘어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쓸모없다고 여기며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으나 귀신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하였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그를 만나기도 전에 더러운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보이지 않지만 실체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영입니다. 성경은 사탄과 귀신이 지배하는 나라에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엡6:12).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면서도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이 사람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통찰하시고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 ‘그 사람’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강한 자 귀신은 지금까지 그 사람을 괴롭게 했지만 더 강한 자 예수님이 오시자 괴로워합니다. 지금까지 귀신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자기 집처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가라고 하시니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 먼저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그가 비록 귀신이 들렸지만 아주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고 소망을 두고 계시는지 알 때에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이름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를 소중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로 보았습니다. 그냥 ‘미친 놈’, ‘인간쓰레기’ 정도로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의 이름 대신에 그의 직업, 연봉, 집 평수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로 자기의 정체성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진짜 자아 대신 거짓 자아에 속아서 괴로워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자기의 인생 목표로 삼고 살아가면서 괴로워합니다. 참 자유는 거짓 자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자아를 찾을 때 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동시에 그 사람의 본래의 자아와 인격을 되찾게 해 주십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은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신에 의해 상실한 그의 자아를 찾아주는 것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묻자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는 대략 6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단급 부대를 의미합니다. 귀신은 군대와 같이 조직과 계급을 가지고 사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강한 자’라고 하셨습니다(3:27).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리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군대로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 정부는 신자들을 잔인하게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폭력성과 잔인함 뒤에는 귀신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로마 군대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고 짓밟혔다가 분노에 차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군대 귀신에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이에 귀신이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고자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셨을까요?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그 사람을 가치 있게 보셨습니다. 큰 희생을 통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처럼 대하는 쓸모없는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큰 희생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을 보고 예수님이 더 계시면 거라사의 경제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얼마나 물질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면서 자기 대신 이 사람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하자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보스톤의 한 정신병원 지하 병동에 어떤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정신질환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그 소녀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복 불가능을 선언하고 소녀를 독방에 감금했습니다. 소녀의 부모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소녀를 버렸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를 불쌍히 여긴 은퇴한 늙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소녀에게 사랑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먹을 것을 주면 집어던지고 말을 건네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변함없이 계속 사랑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이 소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간호사 때문에 이 소녀는 사람을 사랑하고 수용하게 되었으며 인격적인 만남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에서 치료되어 새 삶을 살게 되었으며, 다른 영혼을 향하여 봉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앤 설리반으로 나중에 자기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헬렌 켈러를 사랑과 인내로 교육함으로 헬렌을 세계적인 인물로 키워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생 거라사 광인과 같이, 앤 설리반과 같이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혈기의 종, 교만의 종, 열등감의 종, 정욕의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은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가장 귀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보배로운 피로 인해 생명을 얻었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광풍과 사탄의 공격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믿고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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