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4강(2:18-3:6)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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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4강
말씀 | 마가복음 2:18-3:6
요절 |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날로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하루가 다르게 자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면 성장하고 변화해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원동력이십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담는 새 부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먹기를 탐하는 자들처럼 보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세자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는 날인 줄 알고도 레위의 잔치에 참석하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진 것이 없지만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금식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즉 날이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혼인 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혼인 잔칫날은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간 잔치를 벌이고 그때는 기뻐합니다. 어제 토요일에 임제임스목자와 권효선 자매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 후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만약 이때 금식을 하면서 슬퍼한다면 신랑을 모독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사람들에게 제자들의 행동이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혁신적인 행동의 표지라고 변호하십니다. 이사야서 선지자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하면서 하나님을 신랑에 비유했습니다(사61:10,62:5). 그런데 유대인들이 금식하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천국 잔치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하셨습니다(마22:1).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 사함을 받고 병든 자들이 치료가 되고 귀신들이 떠나가서 자유롭고 평안하고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합니다. 경건은 근엄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잘 먹고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금식할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신자들이 죄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하고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리면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또는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한 목자님은 동역자가 큰 수술을 받아야 할 때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한 사모님은 자녀를 위해서 오랫동안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문제로 삼일 금식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은 빨면 줄어듭니다. 새 것일수록 신축성이 좋습니다. 그러나 낡은 옷은 신축성이 없습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붙이면 둘 다 상하게 됩니다. 또 새 포도주는 발효성이 강하기 때문에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얼마 후에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때 마음이 새 가죽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돌 같이 굳은 마음을 회개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내적 충만함을 누릴 때 우리는 섬기는 일이 즐겁게 됩니다. 복음은 기존 질서와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복음은 살아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마음이 낡아지는 것은 자연법칙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낡아져 가는 것을 새 부대로 만들려면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성령 충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본래 의미를 잘 드러내시면서 그 시대를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신구약 말씀을 새롭게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때 마음이 늘 새로워집니다.
철재인 철근과 석재인 시멘트는 놀랍게도 온도 습도에 따라 정확하게 같은 비율로 수축 팽창한다고 합니다. 건축 엔지니어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열팽창계수가 같기 때문에 철근에 시멘트를 부어서 한 덩어리를 만들어도 건물에 조금도 틈이 생기거나 전혀 금이 가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열팽창계수가 다르다면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한 번만 지나도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릴 것입니다. 또한 철근과 시멘트의 완벽한 공존 가능성 때문에 철근 시멘트로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과 충돌하면 망하지만, 복음과 공존할 수만 있으면 한 사람의 인생에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도 복음과 함께 영적 마천루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쉴 때 새로워집니다(23-28).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긍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 앞에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적절하게 행동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행13:22). 성전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 주었지만, 다윗이나 그의 부하들 그리고 진설병을 준 아비아달 대제사장도 정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레24:9, 삼상21:6).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안식일 유전을 모아 놓은 미쉬나와 비교할 수 없는 성경의 권위로 제자들을 변호하고 보호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입니다(창2:3).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쉼이 필요하셨을까요? 그보다는 사람의 쉼을 위해 복을 주시고 구별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노동에 대한 부담과 압박으로 지칠 수 있는 사람들(남종, 여종)이나 동물들(소,나귀,모든 가축)까지 안식일에 쉬게 하셨습니다(신5:12-14). 안식일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사58:14).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말씀은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굉장히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의 형편에 따라 안식일 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고 있느냐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39개나 되는 안식일 규례로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사람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본래의 취지와 정신을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 의해 왜곡되거나 훼손 또는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시키시고 사람들에게 돌려주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안에서 쉼과 힘을 얻는 날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누리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안식일의 정신과 본질로부터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구분된 날입니다. 본질과 의도와 목적이 사라지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만 남은 게 낡은 가죽부대의 특징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의 목적과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율법의 의도를 본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문자적이 되고, 형식과 의식, 프레임으로 고정된 율법을 신축적인 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새 것’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28). ‘주인’은 ‘κύριός’(퀴리오스)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질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권위자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중 가장 거룩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까지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안식일 해석에 대한 정통성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온전하게 실현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물질 자립에 대한 스트레스 등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각종 정신병, 육체적인 병으로 이어집니다. 스트레스를 잘 다스리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로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잘 쉴 때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셋째, 마른 손을 드러낼 때 새로워집니다(3:1-6).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줄 모릅니다. 컴퓨터도 두 손으로 쳐야 빨리 칠 수 있고, 피아노나 바이올린도 두 손을 사용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두 손은 문명창조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웬일인지 오른손이 자라지 않고 말라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불균형한 자신의 마른 손을 볼 때마다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마른 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여름에도 긴 옷으로 가리고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 손에 대한 열등감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또 드러날 것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한 손이 마름으로 해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악수를 청할라 치면 얼른 먼저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컴퓨터로 리포트를 쳐야 할 때는 두 손으로 400타를 신속하게 타이핑해서 제출하는 친구들에 비해 한손으로 겨우 40타밖에 치지 못해 제시간에 제출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체육대회 때는 배구도 못하고 야구도 못하고 한 손이 보일까봐 축구 족구도 못하였습니다. 손이 없으니 운전면허 원서도 못 내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생각할 때 “나도 팔만 정상이면 팔팔거리며 살 수 있을 텐데”하고 자학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한 손만 마르고 다른 곳은 정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지만 한 손 때문에 모든 것이 쓸모가 없게 되어 중풍병자와 같이 누워 지냈습니다. 한 손이 마른 것으로 인해 그의 내면이 마르고 그의 감정도 마르고 삶의 의욕도 마르고 그 인생 전체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겉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한 손 마른 사람과 같이 인생문제를 안고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 술과 혈기로 다스리는 아버지로 인해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지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가난한 가정, 어둡고 별 볼일 없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두려워하고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렸을 때 남몰래 지은 죄로 인해 죄의식으로 내면이 메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의 손이 마르고, 희생의 손이 마르고, 섬김의 손이 말라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합니다. 그는 누가 보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눅6:8). 알고도 그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손 마른 사람을 회당의 한복판에, 종교 지도자들과의 안식일 논쟁의 한복판에 세우십니다. 안식일과 회당은 유대인들의 심장과 같은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매우 의도적입니다. 그들과 충돌을 피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들의 문제와 직면하시고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나실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고서 이 사람의 한 손 마른 병을 고쳐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죽이는 것과 구하는 것이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사람들에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답이 너무 뻔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선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안식일에 생명을 해치는 악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논란을 해야 해? 이상하지 않나?’ 이 질문은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죄송합니다! 생각을 바꾸겠습니다!”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의 반응은 침묵입니다. 이는 옳은 선택을 거부하는 침묵입니다. 그들의 침묵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으며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마른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그는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일 보여주기 싫은 게 그의 마른 손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 열등감이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른 손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요 영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주인이 되는가 보여줍니다. 인간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새 가죽부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렸습니다.
이후에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더 악랄해졌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들이 마음은 낡은 옷감처럼 신축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고 지성적으로 보이나 심각한 장애인들입니다. 드디어 나가서 원수 같았던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일은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도 안식을 누려야 하는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간 취급하지 않는 한 사람의 안식을 위해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안식을 위해 죽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새 부대처럼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으로 늘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2:18-3:6
요절 |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날로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하루가 다르게 자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면 성장하고 변화해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원동력이십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담는 새 부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먹기를 탐하는 자들처럼 보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세자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는 날인 줄 알고도 레위의 잔치에 참석하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진 것이 없지만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금식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즉 날이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혼인 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혼인 잔칫날은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간 잔치를 벌이고 그때는 기뻐합니다. 어제 토요일에 임제임스목자와 권효선 자매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 후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만약 이때 금식을 하면서 슬퍼한다면 신랑을 모독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사람들에게 제자들의 행동이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혁신적인 행동의 표지라고 변호하십니다. 이사야서 선지자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하면서 하나님을 신랑에 비유했습니다(사61:10,62:5). 그런데 유대인들이 금식하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천국 잔치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하셨습니다(마22:1).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 사함을 받고 병든 자들이 치료가 되고 귀신들이 떠나가서 자유롭고 평안하고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합니다. 경건은 근엄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잘 먹고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금식할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신자들이 죄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하고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리면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또는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한 목자님은 동역자가 큰 수술을 받아야 할 때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한 사모님은 자녀를 위해서 오랫동안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문제로 삼일 금식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은 빨면 줄어듭니다. 새 것일수록 신축성이 좋습니다. 그러나 낡은 옷은 신축성이 없습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붙이면 둘 다 상하게 됩니다. 또 새 포도주는 발효성이 강하기 때문에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얼마 후에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때 마음이 새 가죽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돌 같이 굳은 마음을 회개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내적 충만함을 누릴 때 우리는 섬기는 일이 즐겁게 됩니다. 복음은 기존 질서와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복음은 살아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마음이 낡아지는 것은 자연법칙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낡아져 가는 것을 새 부대로 만들려면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성령 충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본래 의미를 잘 드러내시면서 그 시대를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신구약 말씀을 새롭게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때 마음이 늘 새로워집니다.
철재인 철근과 석재인 시멘트는 놀랍게도 온도 습도에 따라 정확하게 같은 비율로 수축 팽창한다고 합니다. 건축 엔지니어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열팽창계수가 같기 때문에 철근에 시멘트를 부어서 한 덩어리를 만들어도 건물에 조금도 틈이 생기거나 전혀 금이 가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열팽창계수가 다르다면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한 번만 지나도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릴 것입니다. 또한 철근과 시멘트의 완벽한 공존 가능성 때문에 철근 시멘트로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과 충돌하면 망하지만, 복음과 공존할 수만 있으면 한 사람의 인생에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도 복음과 함께 영적 마천루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쉴 때 새로워집니다(23-28).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긍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 앞에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적절하게 행동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행13:22). 성전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 주었지만, 다윗이나 그의 부하들 그리고 진설병을 준 아비아달 대제사장도 정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레24:9, 삼상21:6).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안식일 유전을 모아 놓은 미쉬나와 비교할 수 없는 성경의 권위로 제자들을 변호하고 보호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입니다(창2:3).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쉼이 필요하셨을까요? 그보다는 사람의 쉼을 위해 복을 주시고 구별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노동에 대한 부담과 압박으로 지칠 수 있는 사람들(남종, 여종)이나 동물들(소,나귀,모든 가축)까지 안식일에 쉬게 하셨습니다(신5:12-14). 안식일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사58:14).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말씀은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굉장히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의 형편에 따라 안식일 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고 있느냐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39개나 되는 안식일 규례로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사람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본래의 취지와 정신을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 의해 왜곡되거나 훼손 또는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시키시고 사람들에게 돌려주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안에서 쉼과 힘을 얻는 날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누리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안식일의 정신과 본질로부터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구분된 날입니다. 본질과 의도와 목적이 사라지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만 남은 게 낡은 가죽부대의 특징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의 목적과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율법의 의도를 본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문자적이 되고, 형식과 의식, 프레임으로 고정된 율법을 신축적인 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새 것’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28). ‘주인’은 ‘κύριός’(퀴리오스)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질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권위자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중 가장 거룩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까지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안식일 해석에 대한 정통성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온전하게 실현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물질 자립에 대한 스트레스 등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각종 정신병, 육체적인 병으로 이어집니다. 스트레스를 잘 다스리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로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잘 쉴 때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셋째, 마른 손을 드러낼 때 새로워집니다(3:1-6).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줄 모릅니다. 컴퓨터도 두 손으로 쳐야 빨리 칠 수 있고, 피아노나 바이올린도 두 손을 사용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두 손은 문명창조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웬일인지 오른손이 자라지 않고 말라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불균형한 자신의 마른 손을 볼 때마다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마른 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여름에도 긴 옷으로 가리고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 손에 대한 열등감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또 드러날 것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한 손이 마름으로 해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악수를 청할라 치면 얼른 먼저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컴퓨터로 리포트를 쳐야 할 때는 두 손으로 400타를 신속하게 타이핑해서 제출하는 친구들에 비해 한손으로 겨우 40타밖에 치지 못해 제시간에 제출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체육대회 때는 배구도 못하고 야구도 못하고 한 손이 보일까봐 축구 족구도 못하였습니다. 손이 없으니 운전면허 원서도 못 내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생각할 때 “나도 팔만 정상이면 팔팔거리며 살 수 있을 텐데”하고 자학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한 손만 마르고 다른 곳은 정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지만 한 손 때문에 모든 것이 쓸모가 없게 되어 중풍병자와 같이 누워 지냈습니다. 한 손이 마른 것으로 인해 그의 내면이 마르고 그의 감정도 마르고 삶의 의욕도 마르고 그 인생 전체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겉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한 손 마른 사람과 같이 인생문제를 안고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 술과 혈기로 다스리는 아버지로 인해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지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가난한 가정, 어둡고 별 볼일 없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두려워하고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렸을 때 남몰래 지은 죄로 인해 죄의식으로 내면이 메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의 손이 마르고, 희생의 손이 마르고, 섬김의 손이 말라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합니다. 그는 누가 보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눅6:8). 알고도 그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손 마른 사람을 회당의 한복판에, 종교 지도자들과의 안식일 논쟁의 한복판에 세우십니다. 안식일과 회당은 유대인들의 심장과 같은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매우 의도적입니다. 그들과 충돌을 피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들의 문제와 직면하시고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나실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고서 이 사람의 한 손 마른 병을 고쳐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죽이는 것과 구하는 것이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사람들에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답이 너무 뻔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선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안식일에 생명을 해치는 악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논란을 해야 해? 이상하지 않나?’ 이 질문은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죄송합니다! 생각을 바꾸겠습니다!”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의 반응은 침묵입니다. 이는 옳은 선택을 거부하는 침묵입니다. 그들의 침묵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으며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마른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그는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일 보여주기 싫은 게 그의 마른 손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 열등감이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른 손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요 영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주인이 되는가 보여줍니다. 인간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새 가죽부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렸습니다.
이후에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더 악랄해졌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들이 마음은 낡은 옷감처럼 신축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고 지성적으로 보이나 심각한 장애인들입니다. 드디어 나가서 원수 같았던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일은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도 안식을 누려야 하는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간 취급하지 않는 한 사람의 안식을 위해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안식을 위해 죽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새 부대처럼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으로 늘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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