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3강(2: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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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3강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전도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1:38).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2:17).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죄사함을 받을 때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 선언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셔야 합니다(10:45). 이 시간 각자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12).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문이 나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시고 광야에 계셨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4:14-20), 하나님의 말씀(7:13), 그리스도의 길(8:32),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16:20)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기에 부합하여 기적을 행하시기보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치와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병을 고침 받고 귀신이 떠나기를 원하여 그에게 나아왔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치료해주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한다든지,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지는 않고 거기서 즐거움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다 부분적이고, 한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먼저 도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람은 그를 의지하는 피조물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 친구들은 무리들 때문에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망하지 않고 간절히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길을 내기 위해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냈습니다. 이 길이 막혔으면 땅굴이라도 팠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이렇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방지붕에서 쿵쿵 소리가 나고 지붕 파편이 튀고 먼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의 머리 위에 큰 구멍이 뚫리고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이 밧줄에 매여 서서히 내려왔습니다. 모든 시선이 상 위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당시엔 심각한 지를 지었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불법입니다(요일 3:4). 죄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왜 법을 어깁니까?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고 돈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무법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죄가 없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모든 사람을 판단합니다.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늘 판단 대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야고보 선지자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합니다(약 4:17). 사람들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이웃에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고 놀랍니다.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죄의 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부인하고 자기 소원대로 행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고 선언합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이 죄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깊은 죄에 빠진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져서 밥도 먹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무기력하게 사는 분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힘들게 합니다. 죄는 자아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존감을 병들게 합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100점이라면 다 10점, 15점 밖에 안 되는 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격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선물로 죄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이 되는 문제도 병이 아니라 죄이며, 그의 인생은 병이 아니라 죄가 사함 받음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육신의 병 고침은 한시적이지만 영혼의 죄 사함은 영원합니다.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 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지만, 병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죄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육신의 질병보다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병 치료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지만, 죄 사함은 전체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육신의 병은 사람이 해결할 수도 있지만,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묻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서기관들의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1:15). 하나님의 통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죄 사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죄 사함을 통해 사람이 아름답고 존귀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가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곧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을 신성 모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병 치유는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율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레24:10-23, 민15:30-31). 예수님은 이 발언이 몰고 올 파장을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셨습니다. 만일 그것을 우려하셨다면 중풍병만 고쳐서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자기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중풍병만 고쳐주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의 놀라운 믿음에 예수님은 최고의 선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이 즉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상에 실려 왔던 사람이 이제 상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가 일어나 걸어감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이 진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결과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감으로 자립적인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상을 가지고 감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중풍병자입니까? 사람을 의존하는 의존심도 중풍병의 일종입니다. 또 그는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때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중풍병자는 아마도 당황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거부, 그리고 종교적 경멸까지 겪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평과 원망,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는 생각을 사람들과 하나님께 투사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비된 부분, 죽어버린 부분이 예수님 안에서 치유되기 위해서 나아갑시다. 피가 돌지 않으면 신체의 한 부분이 마비가 되듯이 대화가 안 되면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의 교만과 편협한 생각으로 인해서, 오해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으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지 못하고 겉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으로 인한 죄사함을 믿기 때문에 즉시 회개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립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계가 회복되고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고 내면이 치유되고 자유하게 되면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되어 건강하고 풍성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경청과 공감을 통해서 의사소통이 잘 되면 속이 시원하고 치료가 되며 성숙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선한 일에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13-17).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 나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에 대해서 잘 아셨습니다. 레위는 세리로서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 들이고,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거두어들이기도 했습니다.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곳에서 통행료를 징수하였던 같습니다.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는 임의로 세금을 부과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세리들보다 더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 하는 레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돈을 모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았지만 그가 받는 마음의 상처를 돈으로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도 않았습니다. 번 돈으로 맛있는 것을 먹고 쾌락을 즐겼지만 잠깐 일뿐 갈증은 더해져 갔습니다. 누구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 놓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자식들도 용돈을 받을 때는 감사했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병도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감히 그에게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분이 나 같은 자를 만나주실까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는데 누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굴을 들어 보니 예수님이 자기를 긍휼히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빛났고 자기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의 자애로운 눈빛은 얼음장 같던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는 곧 일어나 따랐습니다. 회계 장부와 주판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비슷하지만, 부르신 사람의 직업이나 사회적 평판을 생각해 보면 첫 번째 부르심과 또 달랐습니다. 어부는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세리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값없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따르라’는 명령은 한 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본받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앞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더니, 이제는 아예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를 향한 사회적 인식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르심은 파격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들로서 사회적 오염을 막기 위해 죄인들과 교제하지 못하도록 했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애써서 쳐놓은 울타리를 허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민족의 배신자를 제자로 불렀으니 반민족적인 처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만 예외적으로 제자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습니다. 세리직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고별식을 겸한 제자로의 부르심에 대한 감사의 자리였습니다. 이 잔치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심사가 뒤틀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고,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사회는 의인과 죄인,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인 계층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형제요 자매로 영접하고 가족과 같이 여기며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 그들처럼 부정해지고 그들의 악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죄인들을 소외시키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사가 필요한 병자들로 보셨습니다. 자신은 그들을 고치러 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심으로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죄가 전염되고 악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자들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죄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소외시키고 격리하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죄를 해결합니다. 그들의 영향을 안 받으려고 애쓰는 대신 그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죄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죄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중풍병이 육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 죄는 영혼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레위는 겉으로 볼 때 매우 능력 있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병들대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레위를 비롯한 세리와 죄인들은 물건으로 치면 완전히 고장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폐기처리 했습니다. 더 이상 쓸 모 없다고 판단하고 버렸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하나님이 버린 자식이고 내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버린 그들을 불러다가 고치시고, 회복하셔서, 쓸모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고 고쳐서 쓸모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건강하게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병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 할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눅 18:13).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병든 사람임을 인식하고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께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레위는 나중에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긍휼이 가득합니다. 그 시대 공인된 죄인 레위의 인생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고, 어떤 죄인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소망과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쓸모 있는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값없이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부르심이요(요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입니다(사1:18).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복덩어리로 바뀌게 됩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지난 저의 인생을 돌아보면 죄와 허물뿐입니다. 눈먼 강아지와 같이 살았습니다. 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전도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1:38).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2:17).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죄사함을 받을 때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 선언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셔야 합니다(10:45). 이 시간 각자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12).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문이 나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시고 광야에 계셨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4:14-20), 하나님의 말씀(7:13), 그리스도의 길(8:32),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16:20)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기에 부합하여 기적을 행하시기보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치와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병을 고침 받고 귀신이 떠나기를 원하여 그에게 나아왔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치료해주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한다든지,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지는 않고 거기서 즐거움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다 부분적이고, 한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먼저 도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람은 그를 의지하는 피조물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 친구들은 무리들 때문에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망하지 않고 간절히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길을 내기 위해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냈습니다. 이 길이 막혔으면 땅굴이라도 팠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이렇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방지붕에서 쿵쿵 소리가 나고 지붕 파편이 튀고 먼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의 머리 위에 큰 구멍이 뚫리고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이 밧줄에 매여 서서히 내려왔습니다. 모든 시선이 상 위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당시엔 심각한 지를 지었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불법입니다(요일 3:4). 죄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왜 법을 어깁니까?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고 돈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무법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죄가 없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모든 사람을 판단합니다.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늘 판단 대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야고보 선지자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합니다(약 4:17). 사람들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이웃에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고 놀랍니다.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죄의 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부인하고 자기 소원대로 행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고 선언합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이 죄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깊은 죄에 빠진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져서 밥도 먹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무기력하게 사는 분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힘들게 합니다. 죄는 자아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존감을 병들게 합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100점이라면 다 10점, 15점 밖에 안 되는 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격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선물로 죄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이 되는 문제도 병이 아니라 죄이며, 그의 인생은 병이 아니라 죄가 사함 받음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육신의 병 고침은 한시적이지만 영혼의 죄 사함은 영원합니다.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 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지만, 병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죄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육신의 질병보다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병 치료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지만, 죄 사함은 전체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육신의 병은 사람이 해결할 수도 있지만,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묻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서기관들의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1:15). 하나님의 통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죄 사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죄 사함을 통해 사람이 아름답고 존귀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가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곧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을 신성 모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병 치유는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율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레24:10-23, 민15:30-31). 예수님은 이 발언이 몰고 올 파장을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셨습니다. 만일 그것을 우려하셨다면 중풍병만 고쳐서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자기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중풍병만 고쳐주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의 놀라운 믿음에 예수님은 최고의 선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이 즉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상에 실려 왔던 사람이 이제 상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가 일어나 걸어감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이 진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결과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감으로 자립적인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상을 가지고 감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중풍병자입니까? 사람을 의존하는 의존심도 중풍병의 일종입니다. 또 그는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때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중풍병자는 아마도 당황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거부, 그리고 종교적 경멸까지 겪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평과 원망,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는 생각을 사람들과 하나님께 투사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비된 부분, 죽어버린 부분이 예수님 안에서 치유되기 위해서 나아갑시다. 피가 돌지 않으면 신체의 한 부분이 마비가 되듯이 대화가 안 되면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의 교만과 편협한 생각으로 인해서, 오해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으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지 못하고 겉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으로 인한 죄사함을 믿기 때문에 즉시 회개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립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계가 회복되고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고 내면이 치유되고 자유하게 되면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되어 건강하고 풍성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경청과 공감을 통해서 의사소통이 잘 되면 속이 시원하고 치료가 되며 성숙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선한 일에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13-17).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 나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에 대해서 잘 아셨습니다. 레위는 세리로서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 들이고,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거두어들이기도 했습니다.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곳에서 통행료를 징수하였던 같습니다.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는 임의로 세금을 부과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세리들보다 더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 하는 레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돈을 모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았지만 그가 받는 마음의 상처를 돈으로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도 않았습니다. 번 돈으로 맛있는 것을 먹고 쾌락을 즐겼지만 잠깐 일뿐 갈증은 더해져 갔습니다. 누구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 놓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자식들도 용돈을 받을 때는 감사했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병도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감히 그에게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분이 나 같은 자를 만나주실까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는데 누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굴을 들어 보니 예수님이 자기를 긍휼히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빛났고 자기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의 자애로운 눈빛은 얼음장 같던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는 곧 일어나 따랐습니다. 회계 장부와 주판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비슷하지만, 부르신 사람의 직업이나 사회적 평판을 생각해 보면 첫 번째 부르심과 또 달랐습니다. 어부는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세리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값없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따르라’는 명령은 한 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본받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앞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더니, 이제는 아예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를 향한 사회적 인식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르심은 파격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들로서 사회적 오염을 막기 위해 죄인들과 교제하지 못하도록 했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애써서 쳐놓은 울타리를 허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민족의 배신자를 제자로 불렀으니 반민족적인 처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만 예외적으로 제자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습니다. 세리직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고별식을 겸한 제자로의 부르심에 대한 감사의 자리였습니다. 이 잔치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심사가 뒤틀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고,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사회는 의인과 죄인,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인 계층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형제요 자매로 영접하고 가족과 같이 여기며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 그들처럼 부정해지고 그들의 악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죄인들을 소외시키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사가 필요한 병자들로 보셨습니다. 자신은 그들을 고치러 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심으로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죄가 전염되고 악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자들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죄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소외시키고 격리하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죄를 해결합니다. 그들의 영향을 안 받으려고 애쓰는 대신 그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죄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죄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중풍병이 육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 죄는 영혼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레위는 겉으로 볼 때 매우 능력 있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병들대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레위를 비롯한 세리와 죄인들은 물건으로 치면 완전히 고장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폐기처리 했습니다. 더 이상 쓸 모 없다고 판단하고 버렸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하나님이 버린 자식이고 내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버린 그들을 불러다가 고치시고, 회복하셔서, 쓸모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고 고쳐서 쓸모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건강하게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병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 할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눅 18:13).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병든 사람임을 인식하고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께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레위는 나중에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긍휼이 가득합니다. 그 시대 공인된 죄인 레위의 인생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고, 어떤 죄인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소망과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쓸모 있는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값없이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부르심이요(요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입니다(사1:18).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복덩어리로 바뀌게 됩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지난 저의 인생을 돌아보면 죄와 허물뿐입니다. 눈먼 강아지와 같이 살았습니다. 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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