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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녁 막5강(3:7-35) 열 둘을 세우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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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2회 작성일 24-04-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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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5강(화랑 백요셉)

열둘을 세우셨으니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다니시며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나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을 피하사 가까운 다른 마을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천국 복음을 전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1:38).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낡은 가죽 부대 같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을 그 마음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상한 심정, 애끓는 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삯군 목자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백성들은 고통하고 유리하고 방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감당하시기 위해 열두 사도를 세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방향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생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길 기도합니다.

1. 열둘을 세우신 예수님(7-19)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3장 7절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직전 말씀인 6절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경찰서에 신고해서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할까요? 잠시 다른 곳으로 피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여전히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을 고치셨습니다(7-12).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장소를 옮기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서 바다로 나가셨고, 바다에서 산으로 또 집으로 부지런히 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계실 때에는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가버나움입니다. 그런데 최남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두매(에돔)는 그보다 더 남쪽 이방지역입니다. 요단강 동편에서, 그리고 갈릴리 북쪽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시키도록 말씀하셔야 할 만큼 유대와 주변 지역에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갈릴리 바닷가 모래사장은 넘쳐났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육지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낭만적입니다. 시원한 봄 바람이 불고, 미세먼지가 없이 깨끗한 하늘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은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뜻을 풀어 가르치시는 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우선순위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 나온 무리 중에는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육신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치료를 기대하고 나왔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귀신같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12). 만약 차분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예배시간에 더러운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운다면 우리가 말씀에 집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굳이 더러운 귀신들의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분은 아닙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 위축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작은 고난에도 움츠러들고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할까 회의적인 생각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에도, 늘 하시던 일, 즉 가르치시고 치료하시던 일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믿음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감히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돕는 목자로 살아가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8-19).
예수님 하면 생각나는 게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신 후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것이 일종의 교육목표나 교육철학이자 교육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첫 번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시든 그와 함께 있어 예수님을 잘 배우도록 하기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잘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적인 자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기도의 삶,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하면서 점점 자립적이고 영적인 사람들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열둘이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계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심입니다. 여기서 전도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끔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온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이셨습니다. 중풍병을 낫고자 나온 사람에게도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인간 조건을 개선해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사함이 사람에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혼 구원 사역을 함께 할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겠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일을 감당할 예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분명한 목적 가운데 열둘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를 부르신 세 번째 목적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천국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부딪쳐야 하는 세력은 세상의 육의 세력이나 정치세력이 아니라 영적 세력입니다.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악령의 세력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러한 악령들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권세를 덧입혀 주시고자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은 역사의식을 가지시고 열두 사도를 키우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하루 24시간 영향력을 끼쳐 그들을 사도들로 빚으셨습니다. 자신의 후대를 생각하시고 사도양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시고 조용히 그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목표의식이 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선하고 훌륭한 사람을 키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치, 사회 지도자들 또는 자선 사업가들을 키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 전파의 전도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으시고 그 일을 감당할 일군들을 세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사역의 본질은 영적 싸움인 것을 아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영적 권세가 있는 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말씀의 종이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자들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겉으로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도들은 모두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이들을 도우셨고, 결국 예수님 승천 후에 이들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빼어난 말씀의 종이요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권세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복음역사가 이루어지고 계승이 되었습니다. 이들과 이들의 제자들을 통한 복음전파 역사로 온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장구한 역사의식 가운데 소수의 사도들을 양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낙망하기 쉽습니다. 캠퍼스 양들은 영적 소원과 복음의 수용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되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죽임의 위협을 받으시고 실제로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병든 사람, 귀신들린 자들은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조차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 양성을 통한 세계 구원의 비전에 불타셨습니다. 그리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이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성경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 주시는 비전이 없는 백성과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도 이 힘든 시대 환경을 탓하면서 절망하는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과 같이 열두 사도를 세우는 일에 도전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캠퍼스의 학생들과 가정의 자녀들을 말씀의 종이요 영적 권세를 가진 종들로 세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과 늘 가까이 하는 생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날마다 배우며 영적인 권세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제자 양성!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이 시대 예수님의 제자요 제자 양성가들로 세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제자의 이름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역적으로 갈릴리 등 이스라엘 북쪽 지방 출신이 베드로를 포함해서 6명 이상이고, 가룟 유다가 유대 남부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직업으로 볼 때, 어부들이 4명이고, 전직 세리 1명, 운동권 출신이 1명 등입니다. 세리 레위(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은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달랐습니다. 기질적으로 볼 때도 제자들은 서로 달랐습니다. 베드로처럼 MBTI에서 극단적인 E를 나타내는 외향적인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요한이나 안드레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I 타입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계산적인 빌립이나 마태와 달리, 안드레나 나다나엘 같은 사람은 순수하고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 사회적인 배경이 달랐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처음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망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원해서 부르시고, 예수님의 소망 중에 제자로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같이 일할 사람, 혹은 같이 여행가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고를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 잘 생긴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키 큰 사람 등등 여러 가지 자격을 따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나 성격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딱 하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가 있는가”였습니다. 한 사람의 재능이나 잠재력이 아닌 배우려는 마음을 보시고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금요일있었던 선교보고를 통해서 어느 나라에서나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겸손히 배우는 사람이 제자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우리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 선교일선에서 여전히 헌신하실 수 있는 것도 이 사실을 믿고 제자양성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 Those who sow with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시126:5)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영적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제자들과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한 사람을 섬기며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역사하신 것을 돌이킬 때 제 마음에 겸손히 고백하게 되는 것은 제가 “꿩 대신 닭으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생도 3학년 어느 겨울밤, 동기생과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을 때, 지금은 노스 캐롤라이나에 선교사로 계신 양스데반 선교사님이 4학년 생도로 순찰을 돌고 있었습니다. 순찰생도는 제 동기생에게 아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듣던 동기생은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순찰생도는 그냥 가려다 말고 옆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제게 성경공부를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거절당한 선배 생도가 조금은 불쌍하게 보이기도 했고, 마침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지라 성경공부를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선배는 제게 교수님을 소개시켜 주었고 저는 새 학기부터 김아브라함 선교사님과 창세기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꿩 대신 닭으로 초청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이후에 교수목자가 되고 평신도 스텝이 되는 과정에서도 저는 꿩 대신 닭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매번 저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죄인을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제자양성에 대한 비전과 소원을 가지고 신실하게 기도하며 도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점점 계급이 올라가면서 바쁜 자리에서 일하게 되고, 생도들과도 만남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생도들을 말씀공부와 예배로 초청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가 학교에서 근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역의 때에 충성하지 않으면 후회만이 남을 뿐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계속해서 목자요 제자 양성가로 젊은 지성인들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2. 예수님의 영적 가족관(20-35)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모든 것이 순탄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후, 그들로 하여금 몇 가지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하십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들어가시자 무리가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들을 돕느라 너무 바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미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가 나그네요 행인같이 사셨고, 온갖 결점 투성이의 사람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떼지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당시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신랄하게 정죄를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조사차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보고는 바알세불 곧 사탄에 들렸다 또는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이 보통 사람들은 행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분의 능력의 원천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사탄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듯이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강한 귀신의 세력을 먼저 결박하시고 그 사람을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소유가 된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강탈하여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귀신을 결박하고 사람을 자유케 하는 역사는 명백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역사를 보고 도리어 “사탄의 역사다. 귀신의 역사다”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생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살리는 영이십니다. (요 6:63)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영원히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따라서 생명을 얻지도 못합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성령께서 그 마음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회개하는 자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받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셨지만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귀신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이 오해와 핍박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심 받은 열두 사도에게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반면에 이런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큰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이는 예수님의 반가족적인 말씀이 아니라 초가족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혈연에 기초한 가족관보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고귀한 영적 가족관을 말씀하십니다. 34,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을 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혈육의 가족들에게 오해와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특권도 누립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Ron Ward 목자님은 저를 보고 “우리는 모두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한형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목자님께서 저를 형제로 환영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황송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나가보면 우리 선교사님들이나 목자님들은 우리를 형제처럼 환영해 줍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공동체요, 또 선교하면서 동일한 고난을 받으며 살아가는 고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동료의식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Ron Ward목자님이나 나이지리아의 Elizabeth 목자님은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려운 그 시대를 열두 사도를 부르시고 섬기셨습니다.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들을 밀착하여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양성의 목적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자 곧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종이요 영적 권세가 있는 종들로 키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 이스라엘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도 제자 양성이라는 분명한 영적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군들을 집중하여 양성하도록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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