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2강(1:16-45) 권위 있는 새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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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강
말씀 | 마가복음 1:16-45
요절 | 마가복음 1:27
권위 있는 새 교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권위 있는 새 교훈입니다.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말은 말만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그의 인격과 삶이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죄인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 있고, 나병으로 병든 사람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섯 개의 사건이 나오는데 다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하시고 능력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를 따라 오라(16-20).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물이 있고 배가 있는 것을 볼 때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 하루 열심히 고기 잡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사람의 생명을 건져내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고기를 낚는 삶과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삶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비전 메이커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하루 세끼 먹고 살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복된 사명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이웃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복이 되게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은 예수님이 어부들을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으로 소집해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로 부르시는 명령입니다(딤후2:3). 사탄의 통치를 몰아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난 후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자 그들이 곧 따른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오직 은혜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곧 따른 것을 볼 때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무의미를 느끼고 좀 더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삶을 살고 싶은 어떤 열망이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가 어디로 가시든,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기 생각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둘째, 귀신도 순종하는 권위 있는 새 교훈(21-28). 예수님은 네 제자들과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예배, 성경공부, 그리고 다른 종교적, 사회적인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몇 Kg 이상은 들어서는 안 되고 1.5Km 이상은 가면 안 된다.” “손을 어떻게 씻어야 정결하게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당위성만 강조했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전통을 따라서 가르칠 뿐 율법의 정신을 찾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전달 단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통하는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웃음도 나오고, 공감이 갔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과 같아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귀신들이 그 말씀을 듣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스스로 도전을 받고 소리를 지르고 나갔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공부할 때 심정이 통하고 삶을 나누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상처가 치료가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삶의 방향을 잡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닮고 싶은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아픈 형제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섬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원동력이 됩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귀신은 더럽습니다. 거짓과 속임과 음란과 쓰레기 같은 생각들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귀신은 무당이나 점치는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속에 쉽게 들어갑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귀신은 거짓과 미신을 진리처럼 믿고 따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상대적인 진리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귀신은 더러운 것, 불륜을 아름답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포장을 합니다. 문화의 힘으로 이런 일을 행합니다. 더러운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심으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자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물어보았습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는 것은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 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장애가 전혀 없을 정도로, 어떤 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라는 말은 하나님이나 왕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과 귀신 모두에게 압도적인 권위로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새 교훈’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다른 새 가르침으로서 망가지고 부패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29-34). 예수님은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시고 쉬기보다는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양을 알기 위해서 그가 사는 집을 찾아가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예수님이 첫 제자 시몬의 집에 가보니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의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음식을 차리고 수종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자기 가족들에 대한 예수님의 실제적인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그와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이전까지 회당에 모이던 사람들이 이제 시몬의 집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 ‘온 동네’,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이런 표현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게 나타났는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회당이 아닌 집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모임 장소가 탄생한 것입니다. 즉 가정교회가 회당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가정 교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오늘 병원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정신적인 병도 많고 육체적인 병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돌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기도의 능력과 전도하러 오신 예수님(35-39). 35절을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의 방향을 잡고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새벽 기도가 능력의 원천이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잘 감당하는 사람들은 문제에 잘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하루하루 문제를 정리하고 털어버리기 때문에 가볍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낙담 대신에 더욱 깨어 기도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9:29).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몰입하고 계실 때에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기에 매우 흥분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인기에 영합하고 성공지향적인 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뒤에서 따르기보다 지금 예수님보다 앞서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이 세상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로서 선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목적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만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주권을 영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긍휼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권위가 나옴(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나병’은 ‘λεπρό’(레프로스)로, ‘비늘 모양의’, ‘비늘에 덮인, 딱지로 덮인’을 뜻하며, 여러 종류의 피부병을 말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은 자처럼 여겨졌고, 이들과 신체적 접촉은 사체(死體)를 만진 것과 동일하게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민12:12, 욥18:13).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레13:45,46). 그런데 이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모든 처분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습니다. 병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율법에 따라 부정하게 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돌에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극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도 놀랍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더 놀랍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보면 움츠러들고 피하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율법은 나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하고 접촉하지 못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그 경계선을 넘어 그를 만지셨습니다. 그는 말씀만으로 치료하실 수 있으셨을텐데 왜 굳이 나병환자를 만지셨을까요? 율법의 규정과 달리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신다고 해서 부정하게 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외로움, 고독, 버림받은 상처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강하게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깨끗하게 된 사람이 당시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시지만 율법을 존중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굴레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에서 나은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격이 넘쳐서 동네방네 소문을 냈습니다. 병이 낫고 삶이 회복된 것으로 인한 감격이 컸지만,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한 사람에게 삶의 목적을 부여해 주시고(16-20),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파괴된 삶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시며(21-39),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을 회복시켜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40-45).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본래의 온전한 형태로 회복시킵니다. 오늘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파괴되고 조각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역사할 때 치유되고 회복되고 온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때에 주의 권능이 함께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16-45
요절 | 마가복음 1:27
권위 있는 새 교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권위 있는 새 교훈입니다.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말은 말만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그의 인격과 삶이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죄인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 있고, 나병으로 병든 사람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섯 개의 사건이 나오는데 다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하시고 능력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를 따라 오라(16-20).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물이 있고 배가 있는 것을 볼 때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 하루 열심히 고기 잡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사람의 생명을 건져내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고기를 낚는 삶과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삶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비전 메이커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하루 세끼 먹고 살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복된 사명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이웃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복이 되게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은 예수님이 어부들을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으로 소집해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로 부르시는 명령입니다(딤후2:3). 사탄의 통치를 몰아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난 후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자 그들이 곧 따른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오직 은혜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곧 따른 것을 볼 때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무의미를 느끼고 좀 더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삶을 살고 싶은 어떤 열망이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가 어디로 가시든,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기 생각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둘째, 귀신도 순종하는 권위 있는 새 교훈(21-28). 예수님은 네 제자들과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예배, 성경공부, 그리고 다른 종교적, 사회적인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몇 Kg 이상은 들어서는 안 되고 1.5Km 이상은 가면 안 된다.” “손을 어떻게 씻어야 정결하게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당위성만 강조했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전통을 따라서 가르칠 뿐 율법의 정신을 찾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전달 단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통하는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웃음도 나오고, 공감이 갔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과 같아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귀신들이 그 말씀을 듣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스스로 도전을 받고 소리를 지르고 나갔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공부할 때 심정이 통하고 삶을 나누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상처가 치료가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삶의 방향을 잡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닮고 싶은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아픈 형제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섬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원동력이 됩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귀신은 더럽습니다. 거짓과 속임과 음란과 쓰레기 같은 생각들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귀신은 무당이나 점치는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속에 쉽게 들어갑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귀신은 거짓과 미신을 진리처럼 믿고 따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상대적인 진리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귀신은 더러운 것, 불륜을 아름답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포장을 합니다. 문화의 힘으로 이런 일을 행합니다. 더러운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심으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자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물어보았습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는 것은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 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장애가 전혀 없을 정도로, 어떤 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라는 말은 하나님이나 왕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과 귀신 모두에게 압도적인 권위로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새 교훈’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다른 새 가르침으로서 망가지고 부패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29-34). 예수님은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시고 쉬기보다는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양을 알기 위해서 그가 사는 집을 찾아가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예수님이 첫 제자 시몬의 집에 가보니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의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음식을 차리고 수종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자기 가족들에 대한 예수님의 실제적인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그와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이전까지 회당에 모이던 사람들이 이제 시몬의 집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 ‘온 동네’,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이런 표현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게 나타났는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회당이 아닌 집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모임 장소가 탄생한 것입니다. 즉 가정교회가 회당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가정 교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오늘 병원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정신적인 병도 많고 육체적인 병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돌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기도의 능력과 전도하러 오신 예수님(35-39). 35절을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의 방향을 잡고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새벽 기도가 능력의 원천이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잘 감당하는 사람들은 문제에 잘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하루하루 문제를 정리하고 털어버리기 때문에 가볍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낙담 대신에 더욱 깨어 기도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9:29).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몰입하고 계실 때에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기에 매우 흥분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인기에 영합하고 성공지향적인 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뒤에서 따르기보다 지금 예수님보다 앞서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이 세상에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로서 선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목적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만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주권을 영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긍휼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권위가 나옴(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나병’은 ‘λεπρό’(레프로스)로, ‘비늘 모양의’, ‘비늘에 덮인, 딱지로 덮인’을 뜻하며, 여러 종류의 피부병을 말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은 자처럼 여겨졌고, 이들과 신체적 접촉은 사체(死體)를 만진 것과 동일하게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민12:12, 욥18:13).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레13:45,46). 그런데 이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모든 처분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습니다. 병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율법에 따라 부정하게 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돌에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극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도 놀랍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더 놀랍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보면 움츠러들고 피하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율법은 나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하고 접촉하지 못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그 경계선을 넘어 그를 만지셨습니다. 그는 말씀만으로 치료하실 수 있으셨을텐데 왜 굳이 나병환자를 만지셨을까요? 율법의 규정과 달리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신다고 해서 부정하게 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외로움, 고독, 버림받은 상처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강하게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깨끗하게 된 사람이 당시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시지만 율법을 존중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굴레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에서 나은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격이 넘쳐서 동네방네 소문을 냈습니다. 병이 낫고 삶이 회복된 것으로 인한 감격이 컸지만,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한 사람에게 삶의 목적을 부여해 주시고(16-20),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파괴된 삶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시며(21-39),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을 회복시켜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40-45).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본래의 온전한 형태로 회복시킵니다. 오늘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파괴되고 조각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역사할 때 치유되고 회복되고 온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때에 주의 권능이 함께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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