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1강(1: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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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강
말씀 | 마가복음 1:1-15
요절 |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오늘 나눌 말씀은 마가복음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도에 대해서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1절은 마가복음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목을 잘 이해하면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2절부터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1절과 15절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저자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을 말하고 예수는 그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직분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에서의 승리나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고 있었기에 황제의 탄생과 같은 것들이 좋은 소식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기쁜 소식으로 여깁니다.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새번역 전 10:19)”라고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Money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그런데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인들은 ‘복음’을 복수로 많이 썼는데, 마가는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가는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전쟁 승리 소식도 기쁜 소식이지만 로마는 얼마 후 망할 나라이고, 또 이 소식은 로마 제국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마가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소식은 모든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온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삶을 가져다 줄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고 복된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그는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이 그에게 나아가면 쉼을 얻습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종노릇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떠는 인생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회복하게 해 주십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몰라 낮은 자존감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복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걸작품이란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무기력한 자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치 밭에서 일을 하다가 밭에 감추인 보물 상자를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은 그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가 기존의 체계와 질서를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주적인 세력과의 갈등, 권력자들과의 갈등, 제자들과의 갈등이 나옵니다. 이런 갈등을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실천하심으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해결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현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계속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의 통치가 힘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변화가 안 되고 성장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기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질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며 세상을 헤쳐 나갑니다.
저자는 복음의 시작을 말하면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대통령이 어디를 가던지 준비팀이 먼저 가서 보안점검을 하고 경호를 준비하고 행사를 시작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과 같이 그들은 출바벨론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이나 출바벨론은 죄와 사망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하려는 메시야 사역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하나님의 오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2,3절을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세례요한을 통해 성취되고 있고 또 세례요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는 생명체가 자라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광야에 거하면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정결예식을 행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광야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던 사람들은 유대 나라 각 고을에서 광야로 나아와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전하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기 죄를 자복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통치자들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때로는 살기 힘든 세상으로 인해서 낙담하고 좌절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입으로 쏟아냈습니다. 살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서 서로 욕을 하고 다투었습니다. 미움과 증오와 시기, 탐욕과 정욕과 게으름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메시지를 통해서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적시는 빗줄기가 강을 이루어 주변을 푸르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심령에 생명이 싹트고 자라났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당시 신발끈을 푸는 것은 이방인 종,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제자는 스승을 위하여 노예가 주인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하여야 하지만 신발 끈을 푸는 일만은 예외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비천한 자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도 될 자격이 안 된다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도록 준비시켰습니다(눅3:10-14).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병 치료나 이적이 아니라 죄 사함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로잡고 있는 궁극적 실체인 사탄을 몰아내시고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심으로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십니다. 그는 사탄보다 더 강한 분이십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님께 자신이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저에게 받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연합의 의미가 있습니다(롬6:3). 세례는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물에 잠겨서 무엇과 무엇이 같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이를 식초에 담그면 오이지가 됩니다. 오이와 식초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한없이 자기를 낮추시고 죄인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의미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실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하늘이 갈라짐’은 ‘찢어지다’는 의미입니다. 열리는 것은 닫힐 수도 있지만 찢어진 것은 쉽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막15:38). 이로 인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심으로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은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종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메시아이십니다(행 3:13). 이는 예수님의 인격의 비밀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는 종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중에 이방인 로마 백부장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을 합니다. 로마의 황제와 제국을 ‘복음’으로 알고 살아온 로마 백부장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입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의 신분도 종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이중직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요회에서 서로 종노릇하면서 섬깁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는 동기는 바로 종으로서 은사를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섬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섬겨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지는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되어집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 위에 임한 성령의 첫 사역이 ‘곧’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대면하시고 시험받으신 것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우주적 충돌입니다. 또 이 대결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충돌입니다(8:33). 사탄은 영적 세력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선한 창조를 파괴하며 인간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것은 메시아의 구원이 영적 전쟁과 관련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아 이기심으로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만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들짐승’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내몰리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그가 신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 신자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사 우리를 위로하고 도우십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요한처럼 행동하면 누구라도 참수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요한은 증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순교함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안전하고 어려움이 없는 길을 가려고 하셨다면, 복음역사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요한의 사역을 이어받으셨고, 고난과 죽음의 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잡힌 때가 예수님의 눈에는 드디어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실 때로 본 것입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는 것은 기다리던 것이 무르익은,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준비해 오신 구속 역사의 때가 찼고 약속된 메시아의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다스리심, 통치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도래하였습니다. 동시에 앞으로 치유, 가르침,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실현되고,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우리 곁에 왔지만 ‘아직(not yet) 완전히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본래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지만, 이 세계는 뒤틀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인간이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혔고, 질병에 눌려 고통당하고 있으며, 여러 모양의 인생 풍랑에 압도되어 두려움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강한 자 사탄의 집이고 사탄이 통치하고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분위기로 만연합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창조시의 질서를 선언하시며, 그 질서를 회복하고 새 질서가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왜곡되고 훼손된 하나님의 율법의 본래 취지를 가르치고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십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질병을 몰아내고, 사탄을 쫓아내시며, 권력과 군대로 억압하고 압제하는 대신 소자 한 사람을 섬기고 소중하게 여기는 정의로운 세상이 되게 하십니다. 차별과 분리를 없애고 지역과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 거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다’(μετανοέω,메타노에오)는 문자적으로 사고방식이나 의도하는 것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뉘우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익숙한 사고방식이 옛 시대에 속한 사탄적인 생각과 사고방식임을 깨닫고 인정하고 버리는 것, 즉 방향의 전환이요, 순종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리거나 바꾸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내가 추구하는 목표보다 더 좋다는 확신이 없으면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회개해야 하는 분명한 근거와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 버리고 다 바꿔도 좋을 만큼 좋은 소식입니다. 저는 자기 힘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기력하였습니다. 4월에 활짝 핀 목련꽃을 보면서 환희를 느꼈다가 잠시 후에 추하게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나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에게 무한대한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또 죄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오 왕이 되셨을 때 허무함 대신에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삶이 허전했는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진정으로 너무나 기뻤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기쁨이 있는데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삶은 보화를 캐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목련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때가 되어서 떨어져야 꽃이고, 사람은 물러날 때 물러나야 하고 죽을 때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 삶을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의 시작을 배우며,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복음이 계시하는 주의 길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더 깊고 풍성하게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1-15
요절 |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오늘 나눌 말씀은 마가복음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도에 대해서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1절은 마가복음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목을 잘 이해하면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2절부터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1절과 15절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저자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을 말하고 예수는 그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직분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에서의 승리나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고 있었기에 황제의 탄생과 같은 것들이 좋은 소식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기쁜 소식으로 여깁니다.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새번역 전 10:19)”라고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Money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그런데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인들은 ‘복음’을 복수로 많이 썼는데, 마가는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가는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전쟁 승리 소식도 기쁜 소식이지만 로마는 얼마 후 망할 나라이고, 또 이 소식은 로마 제국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마가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소식은 모든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온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삶을 가져다 줄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고 복된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그는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이 그에게 나아가면 쉼을 얻습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종노릇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떠는 인생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회복하게 해 주십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몰라 낮은 자존감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복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걸작품이란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무기력한 자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치 밭에서 일을 하다가 밭에 감추인 보물 상자를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은 그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가 기존의 체계와 질서를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주적인 세력과의 갈등, 권력자들과의 갈등, 제자들과의 갈등이 나옵니다. 이런 갈등을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실천하심으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해결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현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계속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의 통치가 힘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변화가 안 되고 성장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기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질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며 세상을 헤쳐 나갑니다.
저자는 복음의 시작을 말하면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대통령이 어디를 가던지 준비팀이 먼저 가서 보안점검을 하고 경호를 준비하고 행사를 시작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과 같이 그들은 출바벨론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이나 출바벨론은 죄와 사망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하려는 메시야 사역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하나님의 오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2,3절을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세례요한을 통해 성취되고 있고 또 세례요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는 생명체가 자라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광야에 거하면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정결예식을 행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광야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던 사람들은 유대 나라 각 고을에서 광야로 나아와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전하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기 죄를 자복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통치자들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때로는 살기 힘든 세상으로 인해서 낙담하고 좌절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입으로 쏟아냈습니다. 살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서 서로 욕을 하고 다투었습니다. 미움과 증오와 시기, 탐욕과 정욕과 게으름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메시지를 통해서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적시는 빗줄기가 강을 이루어 주변을 푸르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심령에 생명이 싹트고 자라났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당시 신발끈을 푸는 것은 이방인 종,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제자는 스승을 위하여 노예가 주인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하여야 하지만 신발 끈을 푸는 일만은 예외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비천한 자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도 될 자격이 안 된다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도록 준비시켰습니다(눅3:10-14).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병 치료나 이적이 아니라 죄 사함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로잡고 있는 궁극적 실체인 사탄을 몰아내시고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심으로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십니다. 그는 사탄보다 더 강한 분이십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님께 자신이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저에게 받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연합의 의미가 있습니다(롬6:3). 세례는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물에 잠겨서 무엇과 무엇이 같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이를 식초에 담그면 오이지가 됩니다. 오이와 식초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한없이 자기를 낮추시고 죄인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의미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실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하늘이 갈라짐’은 ‘찢어지다’는 의미입니다. 열리는 것은 닫힐 수도 있지만 찢어진 것은 쉽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막15:38). 이로 인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심으로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은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종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메시아이십니다(행 3:13). 이는 예수님의 인격의 비밀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는 종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중에 이방인 로마 백부장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을 합니다. 로마의 황제와 제국을 ‘복음’으로 알고 살아온 로마 백부장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입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의 신분도 종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이중직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요회에서 서로 종노릇하면서 섬깁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는 동기는 바로 종으로서 은사를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섬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섬겨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지는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되어집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 위에 임한 성령의 첫 사역이 ‘곧’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대면하시고 시험받으신 것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우주적 충돌입니다. 또 이 대결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충돌입니다(8:33). 사탄은 영적 세력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선한 창조를 파괴하며 인간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것은 메시아의 구원이 영적 전쟁과 관련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아 이기심으로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만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들짐승’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내몰리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그가 신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 신자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사 우리를 위로하고 도우십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요한처럼 행동하면 누구라도 참수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요한은 증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순교함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안전하고 어려움이 없는 길을 가려고 하셨다면, 복음역사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요한의 사역을 이어받으셨고, 고난과 죽음의 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잡힌 때가 예수님의 눈에는 드디어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실 때로 본 것입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는 것은 기다리던 것이 무르익은,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준비해 오신 구속 역사의 때가 찼고 약속된 메시아의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다스리심, 통치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도래하였습니다. 동시에 앞으로 치유, 가르침,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실현되고,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우리 곁에 왔지만 ‘아직(not yet) 완전히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본래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지만, 이 세계는 뒤틀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인간이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혔고, 질병에 눌려 고통당하고 있으며, 여러 모양의 인생 풍랑에 압도되어 두려움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강한 자 사탄의 집이고 사탄이 통치하고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분위기로 만연합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창조시의 질서를 선언하시며, 그 질서를 회복하고 새 질서가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왜곡되고 훼손된 하나님의 율법의 본래 취지를 가르치고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십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질병을 몰아내고, 사탄을 쫓아내시며, 권력과 군대로 억압하고 압제하는 대신 소자 한 사람을 섬기고 소중하게 여기는 정의로운 세상이 되게 하십니다. 차별과 분리를 없애고 지역과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 거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다’(μετανοέω,메타노에오)는 문자적으로 사고방식이나 의도하는 것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뉘우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익숙한 사고방식이 옛 시대에 속한 사탄적인 생각과 사고방식임을 깨닫고 인정하고 버리는 것, 즉 방향의 전환이요, 순종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리거나 바꾸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내가 추구하는 목표보다 더 좋다는 확신이 없으면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회개해야 하는 분명한 근거와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 버리고 다 바꿔도 좋을 만큼 좋은 소식입니다. 저는 자기 힘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기력하였습니다. 4월에 활짝 핀 목련꽃을 보면서 환희를 느꼈다가 잠시 후에 추하게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나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에게 무한대한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또 죄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오 왕이 되셨을 때 허무함 대신에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삶이 허전했는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진정으로 너무나 기뻤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기쁨이 있는데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삶은 보화를 캐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목련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때가 되어서 떨어져야 꽃이고, 사람은 물러날 때 물러나야 하고 죽을 때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 삶을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의 시작을 배우며,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복음이 계시하는 주의 길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더 깊고 풍성하게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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