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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26강(21:1-22)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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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5회 작성일 14-09-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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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26 강 
말씀 | 마태복음 21:1-22
요절 | 마태복음 21:12,13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를 원합니다. 또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전 된 우리가 어떠해야 하며, 우리 공동체는 어떤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본질을 알고 이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감람산 밧베게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두 제자를 보내시며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나귀 새끼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맞은 편 마을에 가 보지 않았지만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 나귀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나귀를 보낼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시고 상황을 아십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알고 싶어 탐구해도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인지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 시간을 함께 지내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나의 사정을 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그 양을 아십니다. 우리도 목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양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를 잘 알아야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이 통하지 않아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서로 간에 오해도 있고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서운해 하기 전에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면 이해가 더 빠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님은 만물의 주관자요 소유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것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집, 부엌, 가구들, 자동차, 돈과 아내와 남편과 자녀들도 다 주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이런 것들을 쓰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쓸 때 의미가 있고 더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것을 주님께서 쓰신다면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가 쓰겠다 할 때 쓰시도록 기꺼이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내 것을 쓰신다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쓰시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본문에 나온 나귀 새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 쓰임 받았고, 내어 드린 나귀 주인도 쓰임 받아 성경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나귀는 세상에 있었던 나귀 중에서 가장 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곽누가 목자님이 드린 탁구대는 참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조웨슬레 목자님이 드린 세탁기도 그러합니다. 요리하고 청소하는 분들의 수고를 귀하게 쓰십니다. 형제자매님들이 자신의 인생의 어느 기간을 풀타임으로 드려 헌신한 기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성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4,5).” 예수님은 발이 땅에 끌릴 정도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면서 사람들의 손을 잡기도 하고 아기들을 안아 주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에게 가장 낮은 자들도 부담 없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당시 왕들이나 승전한 장군들은 군마를 타고 화려하게 입성했습니다. 세상 왕들은 권력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랑이 많고 교만합니다. 말과 나귀를 비교해 보면 말은 근육질 몸매에 얼굴도 각 지게 잘 빠졌습니다. 귀족 스타일입니다. 이에 비해 나귀는 펑퍼짐한 몸매에 얼굴도 평범합니다. 나귀는 고난의 짐을 지고 다닙니다. 말은 전쟁의 상징이지만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히 품고 섬기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며 섬김의 왕이십니다. 그는 고난의 왕이십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백성들에게 놀라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연약한 군대로 인해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휴전을 하고자 하지만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화려했던 소비에트 정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푸틴의 야망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죽으실 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져야만 사람들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겸손한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앗씨시의 프란시스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는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윗 왕국의 영광이 재현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길에 폈던 나뭇가지는 승리의 상징이었던 종려 나무였습니다(요12:13).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승리를 기대했습니다. 또 앞뒤에 따르며 호산나 찬송을 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의 의미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찬송과 기대는 정치적 메시야 관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헤롯과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시대를 펼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그런 메시아가 아님을 보이셨지만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변하고 ‘호산나’ 찬송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저주의 함성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환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많은 복을 받고 부자가 되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열매가 많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삶이 그렇게 영광스럽지 않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 때 내가 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또 예수님은 누구신가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소동하면서 이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려왔던 메시야, 구원자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평화의 왕이시오 겸손의 왕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고난의 왕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욕하고 침을 뱉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소리질렀습니다. 우리는 내 속에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기대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시장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높은 환전 수수료를 요구하며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열배의 이익을 내며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으셨습니다.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하지만 타락한 성전의 모습 앞에 영적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이런 모습 앞에서도 분노가 없다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역대하를 묵상하다 보니 선하고 훌륭한 왕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가 회복되도록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악한 왕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왕이 성전을 청소하고 예배하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잘 하도록 도왔을 때 그의 통치 기간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면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이방의 침입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의로운 왕으로서 성전이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하는지 아셨고 이를 온전히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하는 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사야 56:7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성전과 동일한 의미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십자자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성전이 되셨습니다. 또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과 교회는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권징이 있는 곳입니다. 권징을 통해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보편성, 사도성, 거룩성, 하나됨을 본질로 합니다. 보편성이라 함은 남녀노소, 빈부격차, 유대인, 이방인 구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다 교회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성이라 함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받은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그 말씀을 선포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요 교제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거룩해집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나서 성전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곳에서 또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그들이 범한 죄를 사해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또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처럼 경외하게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이때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참된 성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구원하고 또 심판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외하며 하나가 됩니다. 

  고린도전도 3:16,1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우리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 토요일 다 모여 센터를 청소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입니다. 이런 것들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합니다. 거룩한 삶,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그냥 버려두면 금방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청소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신문과 뉴스로 채울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또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까? 항상 기도하며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혼자서도 기도해야 하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주님이 임재하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또한 성전은 보편성과 함께 회복과 치료의 기능을 감당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본래 맹인과 저는 자들은 성전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성전의 거룩성을 훼손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을 돌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연약한 자들, 병든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사랑함으로 온전한 성전으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또 성전에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메시야 만세 하는 어린이들의 찬미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의 찬미를 온전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성전 된 우리가 입으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내적인 치유를 경험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 있는 힘을 다해서 부릅니다. 우리도 어린 아이들과 같이 힘을 다해서 찬송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음악성이 떨어져 찬송을 잘 못하는 사람들도 찬송하는 것을 겁내지 말고 소리 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가서 유하시다가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 시장하셨습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고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부패한 모습과 열매없는 모습을 보고 이들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열매는 없고 형식만 남은 교회, 신자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전 된 우리는 더러운 것을 버리고 기도와 말씀과 사랑과 찬양으로 채워야합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던지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상징하는 비유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불가능할 일도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 회복, 캠퍼스 제자 양성의 산, 학교생활을 잘 감당하는 것, 직장에서의 승진, 가정의 화목 등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의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산은 우리가 옮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일수록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섬김의 왕이요 겸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주께서 나의 것을 쓰겠다고 하실 때 기꺼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전 된 우리가 강도의 소굴과 같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기도와 말씀과 사랑과 찬양으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복된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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