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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24강 (19:16-35) 영생을 얻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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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89회 작성일 14-09-01 00:19

본문

마태복음 제 24 강 

말씀 | 마태복음 19:16-35
요절 | 마태복음 19:21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영생을 얻으려면”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15절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 관한 내용입니다. 16~35절은 영생을 얻는 길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영생’, ‘천국’, ‘구원’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깨달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영생에 잇대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생에 관하여 바른 진리를 배우고 그 가운데 굳게 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영생을 얻으려면(16-22)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한 사람이 나와 물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말씀에 그가 청년이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돈과 지위와 명성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의 대명사로 불릴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영생에 관심을 갖기보다 인생을 즐기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 절의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감탄사 ‘보라(이두)’가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끓어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막10:17) 이는 그가 예수님께 달려 나와야 할 만큼 다급했고 무릎을 끓어야할 만큼 간절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진정 영생 얻는 길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이 질문을 예수님께 처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오랜 시간 랍비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던 주제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당시 랍비들은 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랍비들은 계명 중에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 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즉 어겨도 별 상관이 없는 계명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노인들에 대한 공경 등을 통해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다 지키고도 영생을 확신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뇌에 찬 이 청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17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 예수님은 먼저 그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무슨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질문은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이 청년처럼 답이 없는 질문을 붙잡고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잘 풀려면 질문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잘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1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옛말에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우문현답”이 아니라 “우문우답”이었습니다. 외냐하면 계명을 지켜서 생명에 들어갈 사람이 없고 이는 그가 찾던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답을 하시니 청년이 어느 계명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8,19)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이 청년이 어릴 때부터 지켜온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생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께 다시한번 고뇌에 찬 질문을 던집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을 통해 우리는 율법아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모든 계명을 지키고도 항상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로인한 불의와 정죄감에 고뇌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처럼 율법을 심으면 정죄를 거두는 법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고 심판할 뿐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계명을 지켜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필경 이 청년처럼 고뇌에 찬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을 돕고자 한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이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고자 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맛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그가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이 요구하는 완전한 수준에 이르려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는 영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오기 전보다 더 근심하며 영생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영생을 얻고자 하면서 영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고자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이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이 청년의 딜레마이고 또한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실상 오늘날 교회 안에도 수많은 신자들이 이 청년과 같이 영생을 알지 못하여 고뇌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목사님, 장로님들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헌금을 가지고 주식투자를 하고 장로님이 죄짓고 쇠고랑 차는 부끄러운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없고 우리의 삶에 선한 열매가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생이 무엇인지, 내가 참으로 영생 안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시급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영생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영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원히 사는 것, 죽음이후의 삶 우리는 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도 가운데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을 통해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정의하신 영생은 "시간"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밖에 나가 슬피 울면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는 심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천국과 지옥은 시간적으로 모두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고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생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 생명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생이 있는 자의 삶에는 선한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나타내주는 예화가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실상 그는 이 세상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생의 삶보다 이 세상의 삶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실상 영생에 눈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이 영생을 말씀하셨지만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 청년처럼 실상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하루살이는 아닌지, 메뚜기는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생의 사전적인 의미는 죽음 이후에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시간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교회를 하루만 다녔어도 하나님을 알면 영생이 있는 것이고 교회를 10년, 20년을 다녔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청년처럼 계명을 다 지키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나아온 제자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그와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외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앎으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아는 자, 주님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곳,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아는 것 그를 믿는 것 그리고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으므로 그를 알고 그를 따르므로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23-26) 영생을 얻고자 나온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난 후에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외냐하면 당시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었고 제자들도 주님을 따르면 언젠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관하여 심각한 회의에 빠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심각하게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구원을 사람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죄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사람이 할 일이 없습니다. 외냐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라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가 아니라 강도, 세리, 창기와 같은 죄인들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셋째 영생을 얻은 자의 삶.(27-30) 제자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받고 베드로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무엇을 보상해 줄 수 있느냐? 물은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영생을 얻은 자의 삶이 무엇이며 그들이 받을 상급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째로 영생을 얻은 자의 삶입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를 보면 마가복음에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생을 얻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때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의미는 관계를 끊는다거나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위해 그들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가족중심적인 삶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은 자의 삶에 나타나는 삶의 선한 열매들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받을 상급입니다. 그들이 받을 상급은 내세에 주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을 상급이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을 현세의 상급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기서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은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얻게 될 수많은 영적인 가족들과 물질보다 더 영원한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님을 얻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영생을 얻은 자는 자신의 신앙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예화를 소개합니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마스 모어(1478-1535)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그는 영국 대심원장으로 있을 때 헨리8세가 본처인 캐서린 황후와 이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고 사표를 제출한 후 투옥되었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는 영생을 믿었기에 죽음을 불사하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누군가 “내일도 오늘 같고, 모레도 오늘 같고, 한 달 후도 오늘 같고 1년, 10년, 100년 후, 영원히 오늘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하냐면 우리는 오늘 영생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내일의 영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외냐하면 영생이란 영원한 내일이 아니라 영원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일의 영생이 아니라 오늘의 영생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을 때 이는 “나는 오늘의 부활이요 오늘의 생명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영생은 내일의 영생이 아니라 오늘의 영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팔아야 할 것이 있다면 오늘 파십시오. 우리가 용서할 사람이 있다면 오늘 하십시오. 우리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면 오늘 하십시오. 우리가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한다면 오늘 하십시오. 꼭 만나야할 사람이 있다면 오늘 만나십시오.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으면 오늘 하십시오. 왜, 오늘입니까? 우리가 살아야할 영생은 오늘의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일이 온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영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일의 영생도 사모하게 되고 그 이름을 위해 헌신하는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억하십시오. “과거는 역사이며 미래는 미스테리이지만 현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의 영생을 누리며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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