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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33강(마27:11-66)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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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14-11-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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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33 강
말씀 | 마태복음 27:11-66
요절 | 마태복음 27:46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줄기차게 공부해온 마태복음 공부가 이제 십자가와 부활 두 말씀이 남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두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애쓰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철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사형판결을 내렸지만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새벽에 그를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 앞에 서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대항하는 자요, 영적으로는 메시야 즉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의미로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가 원하시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명하여 자기를 호위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권세가 있으시지만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포기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자 결심하신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수많은 것으로 예수님을 쳐서 증언했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수많은 재판을 진행해왔던 빌라도 총독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를 따라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고 물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를 충동질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도록 사주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바라바를 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5일전 종려 주일(Palm Sunday)에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은 이제 괴물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싸우면 대개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이기는데, 저들의 큰 소리가 빌라도를 압도했습니다. 빌라도는 비겁하게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무리 앞에서 손을 씻는 의식을 행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장으로서 최종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가장 잘못된 판결을 한 재판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는 유배를 당하고 5년 후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확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울지를 모르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20대의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소리 없이 그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통도 맨몸으로 쇠조각과 철편이 달린 채찍에 120대를 맞는 예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을 뜯어내는 쓰라림, 맞은 데를 또 맞을 때 살을 파고드는 고통, 이 채찍은 어떤 매를 맞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깊이 아려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감각이 마비되어 온 몸이 굳어버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기절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내 대신 이런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끊임없이 불순종하여 매를 맞던 우리가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목자 되신 주님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힘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가 힘이 없는 것을 보자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습니다. 누구의 면전에서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를 맞으면 기분을 아십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에게, 또 의로우신 분이 죄인들에게 가시 면류관을 쓴 채로 머리를 맞는다면 속에서 분노의 불이 치솟아오를 것입니다. 고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사회 명사의 조문에 참석하고 나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청와대 수석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나이 어린 그가 점잖게 가려는 정주영 회장의 바지를 붙잡아 넘어뜨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맨 땅에 넘어진 그의 얼굴은 하얗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고 집에 돌아갔는데 홧병이 생겨서 갑자기 시력이 약해지고 토사곽란을 일으켜 며칠을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수모를 겪으셨지만 그들의 무례와 희롱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희롱을 다 한 후에 왕의 상징인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골고다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시장 통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이 70Kg이나 되는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가다가  자꾸 쓰러지자 군인들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가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크게 임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계속 거부하다가 억지로 받아들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는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도록 맡기실 때 자원해서 하면 좋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히고 대못으로 손과 발에 박고자 할 때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약간의 마취 기능을 갖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잔을 온전히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목에 쾅, 쾅, 쾅하고 박히면서 동맥과 정맥을 끊을 때 피가 솟구쳤을 것입니다. 신경줄이 끊어지고 뼈를 뚫고 지나가는 대못으로 인하여 마음이 촛밀 같이 녹아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발목을 포개어 대못을 박을 때 그의 온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렸습니다. 누구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구덩이에 십자가를 박고 수직으로 세웠습니다. 체중으로 인해서 살은 찢어지고 고통은 가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있는 가시관의 가시에 찔려 피는 얼굴을 타고 내려왔고 그의 양 손목을 통해 나오는 피는 그의 팔을 타고 옆구리로 흘러 내렸습니다. 그 피와 발목에서 나오는 피가 합하여 흘러내리며 대지를 적셨습니다. 그 피는 아담 이래 인간이 범한 모든 죄로 더럽혀진 온 땅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뚝 뚝 뚝 떨어지는 피 흘림의 의미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 피를 마시는 자는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 그 피는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피는 죄로 쓸모없게 된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언약의 피 임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흰 눈보다 더 희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를 희생하는 고난을 감당하면서라도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무지한 죄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좌우편에 못 박혔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하고 조롱하고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이보다 더 슬프고 억울한 장면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주님은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사53:3)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셨습니다(고전4:13).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에서든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이 되고 잔인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으셨지만,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10:18, 막10:45).

  왜 예수님은 자신을 포기하시고, 스스로를 버리셨습니까? 이는 우리 인생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요10:1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으시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워졌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의 광채에 비췸을 받고 나서야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뜨거운 피의 은혜를 체험하고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어두운 가운데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복음 진리를 밝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119:132).” 주님께서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 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 육시는 정오를 말합니다. 태양 빛이 가장 뜨겁고 밝을 시간에, 그 해도 빛을 잃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온 몸에 짊어지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태양마저도 비출 수 없었습니다.  오후 세시쯤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의 고통과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아픔이 컸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혼의 고통은 이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다 견디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형벌로 그 영혼을 버리셨을 때, 예수님은 생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인하여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어오셨고 아무도 없어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충족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셨습니다(요10:30).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은 죄로 인해서 버림받는 모든 자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에게 내리시는 최고의 형벌은 ‘내 버려두심’의 형벌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준수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겸손했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고 그는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을 주시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무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복해서 불순종하였습니다. 원수가 가까이 온다고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제사를 지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아각과 그의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것과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하나님께 버림 받은 그의 영혼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다윗에 대한 시기심에 불탔습니다. 나중에는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는 쾌락이 있지만 그 열매는 쓰고 어둡습니다. 불안하고 눈이 멍하고 초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기를 잃어버린 꽃과 같습니다. 어떤 일에도 의욕을 찾지 못합니다. 마음에 깊은 어두움과 두려움, 불안, 피곤함, 허무에 빠져 살아갑니다. 버림받은 마음을 극복해보고자 친구를 찾습니다. 이성의 달콤한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카페에 나가 대화를 해보고 시끌벅적한 술자리에 나가 마음껏 취해봅니다.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을 방문해보고 대화도 나누어 보고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내 영혼의 소외감, 외로움, 버림받은 느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 안에는 무엇이 있기에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버려진 영혼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돌이킬 시간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날, 마지막 날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완전히 버리십니다. 이것은 불과 유황불로 타는 지옥에서 영원히 버려지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버림받는 지옥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절규는 버림받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내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는 예수님의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우리 마음의 고통을 친히 체험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버림받는 고통도 큰데,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장차 회개치 않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을 버림받는 심판은 심히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대신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 버림받으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버려진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내 대신 버림받은 주님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음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자신의 아들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내가 비록 죄를 짓고 비참하게 되었을지라도 나는 하나님 편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잃어버려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를 다시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기까지 나를 찾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버리심으로 죄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우리가 이 사랑을 의지하여 모든 가식과, 허울을 다 벗어 버리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때 내 삶에 구원이 임합니다. 마음에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 속에서 영성이 깊어가는 법을 배웁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지 않고 도리어 진리와 의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버림받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보다 강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에서는 특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속죄하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만인이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우리 각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고, 버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버림받은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올 때, 두려움 없는 인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의 십자가, 자기 부인을 감당하면서 제자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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